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4:33:12

괴팅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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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팅겐
Götti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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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장
괴팅겐의 위치
행정
국가
[[독일|]][[틀:국기|]][[틀:국기|]]
시간대 (UTC+1/+2)
니더작센
괴팅겐 군
인문환경
면적 116.89km²
인구 120,261명(2023년 12월)
인구밀도 1028명/km²
정치
시장 페트라 보이슈테트


1. 개요2. 역사3. 사회
3.1. 인구3.2. 종교3.3. 정치
4. 경제
4.1. 교통4.2. 산업
5. 출신 인물6. 여담

[clearfix]

1. 개요

Die Stadt der Wissenschaft
학문의 도시[1]
독일 니더작센에 위치한 도시이자 그 도시를 둘러싼 군(Landkreis)의 명칭이기도 하다. 도시의 인구는 2024년 기준 12만 명가량으로 중간 정도지만, 괴팅겐 대학교로 대표되는 뛰어난 교육과 연구기관으로 유명하다. 군 전체 인구는 32만 명가량이다.

괴팅겐은 니더작센 헌법에 따라 특별히 괴팅겐군에 속하면서도 군급시로 인정되는 자치지역이다. 괴팅겐군과 괴팅겐시는 행정과 자치의회도 분리되고 시장직도 별개이다. 괴팅겐 군청과 괴팅겐 신시청사는 대로를 사이에 두고 위치하였다. 괴팅겐 군은 또한 2016년 이웃한 다른 군(오스테로데 암 하르츠(Osterode am Harz))과 통합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2. 역사

고고학 발굴 결과 7세기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또한 이 일대에 10세기 무렵 구팅기(Gutingi)라는 지명이 기록에 언급되며 처음 역사에 등장하였다.[2] 이후에도 듣보잡에 가깝던 이 곳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머물던 성(Pfalz Grona)이 지어지면서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하였다.[3] 특히 북쪽의 고슬라어브라운슈바이크, 함부르크와 남쪽의 카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을 이어주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무역업이 발달하였다.[4]

그러다 12세기에 도시 지위를 부여받았는데, 구체적으로 누가 도시 지위를 주었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하인리히 사자공[5]이 부여했다는 설이 가장 자주 언급되는 편. 명목상 하인리히 사자공의 가문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6]이 대대손손 소유하기는 했으나 상당한 자치권을 보유했고, 앞서 말했듯이 독일 남부와 북부를 오가는 교통로의 가운데에 있다는 이점[7]을 활용하여 한자동맹에 가입, 직물과 양모 무역을으로 중세 말기에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16세기 초반 칼렌베르크 공작 에리히 1세[8]의 간섭에 반발하여 그에게 충성 맹세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이 괴팅겐을 '무법도시'라고 불러 홍역을 치르면서 그 세가 빠르게 악화됐고[9]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6세기 후반 급성장한 잉글랜드 왕국의 모직물 산업에 밀리면서 도시가 완전히 몰락했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는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10] 1692년 하노버 선제후가 이 곳을 차지했다.

1737년 하노버 선제후이자 영국의 국왕인 조지 2세의 명령으로 괴팅겐 대학교가 건립되었다.[11]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프랑스군이 이 곳을 점령하면서 일시적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운 괴뢰국 베스트팔렌 왕국의 영지에 편입되었다가[12]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빈 회의하노버 왕국이 부활하면서 하노버 왕국에 속했다. 하지만 하노버 왕국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줄을 잘못 섰다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공중분해되어버렸고, 하노버 왕국 전역이 프로이센 왕국에게 흡수되면서 괴팅겐 역시 프로이센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독일 제국 시기에도 괴팅겐 대학교의 학문적 성취에 힘입어 괴팅겐은 독일 내에서도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맡았지만, 1933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암운이 드리웠다. 당시 괴팅겐 대학교에는 무수히 많은 유대계 학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대거 쫓겨났던 것. 특히 에드워드 텔러를 비롯한 유대계 학자들이 많았던 물리학 계열에서 타격이 컸다. 당시 나치는 이른바 아리안 물리학을 내세우면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주창한 상대성 이론 등을 유대인 물리학이라고 배척했다.[13] 그리고 에드워드 텔러는 미국으로 망명해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는 것으로 복수를 했다. 물론 유대계 학자들 뿐만 아니라 나치에 반대하는 학자들, 다른 이민 배경의 학자들, 여성인 학자들도 모두 떠나야 했다. 괴팅겐 대학교는 당시 여성인 에미 뇌터를 1919년 교수로 임명했을 정도로 독일 내에서도 당시 기준으로 가장 분유기가 자유로운 대학교였다.[14] 결국 대다수 교수들이 193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교직에서 쫓겨났고, 괴팅겐과 괴팅겐 대학교는 한동안 예전과 같은 학문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다.[15] 2차 대전 중에는 교육 산업 중심의 소규모 도시라는 점 덕분에 융단폭격은 피했지만, 위에서 언급한대로 독일의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간선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이기에 철도와 역 그리고 철도를 따라 조성되어있던 산업시설들 중심으로 폭격을 맞았으며, 구시가지도 역에 가까운 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다.[16]

종전 이후 이 지역 하노버 왕국과 관련이 많은 영국 관할지역으로 들어갔으며, 이후 서독의 성립과 함께 하노버 왕국 영역을 기반으로 새로이 편성된 행정구역인 니더작센 주에 편입되었다.

괴팅겐은 교육과 연구 중심의 대학도시로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전쟁 전의 명성을 잇기 위한 노력을 하여 볼프강 파울, 에르빈 네어 등의 유수 학자들을 교수로 초빙하기도 하였고 이들이 이후 노벨상도 수상하는 등 큰 성과를 내게 된다. 1962년에는 빌헬름스하펜에 있던 사회과학대학이 괴팅겐에 흡수이전되면서 사회학과 정치학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독일의 많은 유명 정치인들이 이 시기에 괴팅겐에서 공부하였는데, 게르하르트 슈뢰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이 그 예. 또한 반전, 노동, 환경 등 학생운동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1957년 독일 국적을 유지한 원자물리학 관련 18명의 유수 학자들이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는 성명 "괴팅겐 18인"을 괴팅겐에서 선언하기도 하였다.[17]

1964년에는 가이스마와 그로네, 벤데 등 괴팅겐 주변의 마을들을 괴팅겐으로 편입시키고, 도시 서편에 신규산업단지가 개발되어 도시가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처음으로 인구가 10만 명을 넘어섰다.[18] 물론 그럼에도 독일 분단 당시 괴팅겐은 동독으로부터 13km도 떨어지지 않았을 정도로 위수지역에 해당했으며, 군부대가 위치했던 도시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독일의 통일로 다시금 독일의 지리적 중심지역으로 되돌아오게되었고, 주요 교통로의 역할도 되찾았다.

3. 사회

3.1. 인구

1939년 인구조사에서 약 5만 명이 거주한다고 조사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분단으로 주변 동독지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과 구 동방 영토[19]에서 추방당해 이주해온 독일인들로 인해 8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면서 한때 독일 내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가 되기도 하였는데, 이때 급속도로 늘어난 인구의 주거를 위해서 라이네강 서안에 베스트슈타트(Weststadt)가 개발되었다.[20] 인구는 그 뒤로도 꾸준히 증가하여 1997년 12만 8419명으로 최대치를 찍었으며, 이후 정체기에 들어섰다. 2024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괴팅겐 시 인구는 12만여 명이다. 그 중 학생 인구는 약 2만 5천 명에 달한다.

도시의 부촌은 구시가지 기준 동쪽인 오스트피어텔(Ostviertel)에 형성되어있다. 이쪽은 전통적인 교외주거지역으로 주로 일가족 단위의 2~3층 저택들이 지어졌는데, 역사적인 외관의 저택, 넓은 개인 정원이 특징이다.

3.2. 종교

2021년 인구 조사에서 함께 조사된 바에 따르면, 종교인구는 33.4%가 개신교, 13.2%가 가톨릭이다.#

괴팅겐은 역사적으로 본레 마인츠 주교구 산하 뇌르텐[Nörten, 현 뇌르텐-하르덴베르크(Nörten-Hardenberg)] 교구에 속하였으나, 종교개혁 이후 루터파 개신교 도시가 되었다. 이에 괴팅겐 시내의 중심성당인 장크트 요하니스와 장크트 야코비 그리고 가장 오래된 장크트 알바니 성당들은 개신교
예배당이 되었고, 하노버 선제후령 차원에서 개신교회의 교구 지정을 진행하여, 하노버 개신루터 교회의 괴팅엔 루터파 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괴팅겐 대학교가 설립된 후 1746년에 와서야 외지에서 온 학생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주기 위해 가톨릭 미사가 다시 허용되었고, 시내 유일한 가톨릭 성당인 장크트 미하엘이 1789년에 완공되었다. 이때 힐데스하임 대교구 산하에 괴팅겐 카톨릭 교구도 신설되었다. 이후 1927년에 시 동부 오스트피어텔(Ostviertel)에 장크트 파울루스 성당을 건설하고 주교좌 성당을 이곳으로 옮겼다.

유대교는 16세기부터 괴팅겐에 존재했으며, 1869년엔 시내에 시나고그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나치들에 의해 1938년에 방화소실되어 현재 그 자리에는 추모기념물이 서있다.

전후 독일 경제 성장기에 튀르키예계 이민자들이 많이 유입되면서 이슬람 인구도 늘어, 무슬림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2006년에는 베스트슈타트에 튀르키예-이슬람 종교연합 소속의 살리미야 모스크가 건립되었다.

3.3. 정치

대학도시답게 진보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곳이다. 전후 역대 14명의 시장 중 9명이 사민당 소속이었으며,[21] 18번의 시의회 선거에서 사민당이 원내 1당이 되지 못한 선거는 단 4번뿐이다.

니더작센 주의회나 연방의회 선거에서도 사민당의 텃밭과 다름 없는 곳이고, 학생인구 덕에 녹색당 지지율도 높아 기민련과 2위를 다투는 곳이다. 2005년부터 2020년까지 괴팅겐을 지역구로 두고 있던 토마스 오퍼만이 연방하원의회 사민당 원내대표와 부의장을 맡을 정도로 유명한 정치인이었으나, 2020년에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2021년 총선에서는 사민당 안드레아스 필리피가 지역구 후보로 당선되었다.

4. 경제

4.1. 교통

괴팅겐의 시내외 교통은 GöVB(괴팅겐교통운영)사에서 담당하고 있으며, 2020년 기준 27개 버스노선을 운영 중이다. 괴팅겐 대학교 학생들은 학기마다 등록금에 버스정기권을 포함하여 지불하기 때문에 학생증만 있으면 버스를 탈 수 있다.[22]

과거 1900년대 초에 괴팅겐도 3개 노선의 트램을 설치하려는 노력이 있어 실제로 공사까지 진행하였지만 도중에 1차세계 대전이 터지며 운영도 못해보고 취소되었다. 당시 부설된 선로도 모두 철거되었다.

역사 문단에서 보다시피 독일 북부와 남부를 중앙에서 관통하는 지역에 있기 때문에 철도와 고속도로가 잘 깔린 지역이다. 괴팅겐역은 프랑크푸르트와 하노버를 잇는 고속철도 ICE의 기착지이기도 하여 도시의 접근성은 매우 좋은편이다. 하노버까지는 ICE로 35분, 프랑크푸르트는 1시간 45분, 함부르크는 약 2시간이 걸린다. 가장 가까운 중도시는 카셀로, 괴팅겐이 속한 니더작센과는 다른 헤센주에 위치해있지만 ICE로 20분 정도 걸린다.[23]

고속도로는 독일 남북을 잇는 A7 고속도로와, 괴팅겐과 라이프치히를 잇는 A38 고속도로가 지나간다. 독일이 분단상태였을 때에는 괴팅겐이 동독과의 국경 바로 근처에 위치한 도시였어서, 지금도 247번 국도에 위치한 아이흐스펠트 국경박물관(Grenzlandmuseum Eichsfeld)이나 1945년부터 지금까지 독일연방공화국으로 입국한, 동독을 탈출한 사람들과 강제이주자, 이민자, 난민에 대해 다루는 프리틀란트 박물관(Museum Friedland)을 방문해 볼 수 있다.[24]

가장 가까운 국제공항은 하노버 국제공항(Flughafen Hannover-Langenhagen)이다. 하노버 중앙역까지 ICE나 RE를 타고 간 뒤 S-Bahn 5호선으로 환승하면 갈 수 있다. 카셀에 더 가까운 공항(Flughafen Kassel-Calden)이 있지만, 여기는 2012년까지 활주로 취급만 받다가 공항 지위를 취득했을 정도로 지중해 관광지로 가는 노선밖에 없고, 자가용이 없으면 공항 자체도 가기 힘들다. 하노버 국제공항도 유럽권 취항 노선도가 대부분이며, 한국이나 미국 등을 가려면 하노버발 환승노선을 선택하거나 결국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으로 가야 한다.

4.2. 산업

그로네(Grone)에 큰 공단(Gewerbegebiet Goettingen-Grone)이 형성되어있으며, 괴팅겐의 대부분 제조업은 이 지역과 노르트슈타트(Nordstadt) 철도변에 있다.

괴팅겐에 본사를 둔 기업으로는 Sartorius(의료, 바이오기업), Friedrich Zufall(유통업), Mahr-Gruppe(계측&계량 장비 및 베어링 제조기업) 등이 있으며, 그 외에 Novelis(알루미늄), Zeiss(광학), Ottobock(보철) 등이 공장과 연구실을 두었다.

5. 출신 인물


6. 여담

  • 외래어 한글 표기법에 따라 괴팅겐이라 표기되지만 실제 발음은 괴팅엔이다. 그래서 두 표기가 혼재되어 사용된다. 게다가 독일과 일부 국가에서만 쓰이는 O-움라우트(Ö)가 지명에 들어가서, 국제소포 등 국제적으로 알아 볼 수 있게 주소를 쓸 때에는 Goettingen이라 표기한다.
  • 괴팅겐 구시가지 건물들을 보면 외벽에 이름이 적인 현판들이 붙었는데, 해당 건물(또는 그 건물이 있던 위치)에 살았거나 머물렀던 유명 학자들의 이름을 적어둔 것이다. 괴팅겐 대학교를 거쳐간 유명인이 많은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낯이 익은 이름들이 있는데 이를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 프랑스 가수 바르바라(Barbara)가 1964년에 부른 Göttingen이란 제목의 유명한 샹송이 있다. 어릴적 가족이 나치를 피해 도망을 다녔던 바르바라가 괴팅겐에 초대를 받고 마지못해 방문해 공연했다가 뜻밖의 환대를 받으면서 좋은 추억을 만든 후 지은 괴팅겐에 대한 서정적인 노래다.[26] 이후 바르바라는 독일과 프랑스간 양국 관계 개선과 문화 교류 등의 업적을 삼아 괴팅겐 시로부터 명예훈장도 받고, 바르바라의 이름을 딴 거리도 생겼다.
  • 괴팅겐 역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도로인 Goethe Alle의 왼쪽 인도변에 일정 거리 간격으로 청동으로 만들어진 안내문이 길거리에 서있는데, 잘 읽어보면 태양계의 행성들의 크기와 태양으로부터의 거리를 비율에 맞게 괴팅겐 시내에 재현해둔 것이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심지어 토성까지는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명왕성 안내판은 시 외곽에 있는 산 위 비스마르크 탑 옆에 위치해서, 등산을 예정해두지 않았다면 찾을 수 없다.
  • 괴팅겐 대학병원이 있어 의료시설도 잘 구비된 곳이다. 니더작센 주내에서는 탑 병원 중 하나이다. 과거 장기 이식 순위 조작 스캔들이 터졌어서 그렇지
  • 특이하게 독일 언론에서 여론조사 등을 보여주면서 자료화면으로 나오는 거리 화면에 괴팅엔 시내 거리가 자주 등장한다.

[1] 괴팅겐의 캐치 프레이즈. 혹은 이를 약간 비틀어서 Die Stadt, die Wissen schafft(지식을 창조하는 도시)라고 쓰기도 한다.[2] 10세기 무렵 이 곳에 새워진 수도원과 그 주변의 주거지에 흐르던 작은 개천의 이름이 Gote였는데, 여기서 유래한 지명이라 추측한다.[3] 본래 하르츠 지역에는 황실소유 광산들이 있었기 때문에 팔츠(Pfalz)가 흔했던 곳이다.[4] 현재도 독일의 남부와 북부를 잇는 고속도로와 철도가 괴팅겐을 지나간다.[5] Heinrich der Löwe. 작센바이에른의 공작을 겸하였고 동방식민운동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6] 훗날 세를 키워 하노버 선제후가 되었고 혈통에 힘입어 영국 하노버 왕조를 세웠다. 현재 영국 윈저 왕조의 조상이기도 하다.[7]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이 무렵 독일의 양대 상업거점이던 뤼베크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중간지점이었다.[8] 괴팅겐을 다스리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의 대가 일시적으로 끊긴 이후 새로 이 지역의 패권을 차지한 인물이다.[9] 막상 이 홍역을 치른 뒤 칼렌베르크 공작과 괴팅겐의 사이가 막상 꽤나 우호적이 되었다. 칼렌베르크 공작이 괴팅겐에게 금전적으로 많이 의존했기 때문이었다.[10] 오늘날의 니더작센 일대는 하노버 왕조의 직계조상 벨프 가문의 분할 상속 때문에 중세-근대 시기 독일 문화권 내에서도 군소공국이 가장 난립하던 지역이었다. 니더작센이라는 지명이 등장한 시기는 빨라야 19세기 후반 독일 제국의 성립 이후이고, 늦으면 1920년대까지로 밀린다.[11] 참고로 하노버와 영국의 동군연합은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끝이 났다. 살리카법에 따라 독일에서는 여자 군주가 즉위할 수 없었기 때문.[12] 이때 나폴레옹이 전투를 수행하던 도중 괴팅겐을 포격하려다가 가우스가 당시 괴팅겐 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포격을 포기했다는 카더라도 있다.[13] 순수 독일인이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도 나치 독일 집권 직후 무심코 상대성 이론을 인용했다가 게슈타포에게 곤욕을 치를 뻔했다.[14] 물론 괴팅겐 대학교 내에서도 에미 뇌터의 교수 임용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존재했었다. 물론 다비트 힐베르트가 "이곳은 대학교지 목욕탕이 아니지 않은가?"라며 반대의 목소리를 씹어먹었다.[15] 이건 단순히 괴팅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독일 학계 전체가 나치로 인하여 겪어야 했던 대가였다.[16] 괴팅겐은 여전히 2차세계 대전 불발탄들이 몇년 주기로 발견되는 곳 이며, 2010년에는 폭탄 해제 과정에서 폭탄이 폭발하여 폭발물해체요원 3명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17] 당연히 그 유명한 괴팅겐 7인 사건에 빗댄 명칭이다.[18] 인구 증가로 시가지가 확장됨에 따라 당시 괴팅겐에 편입된 마을들은 현재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시가지의 연장선상에 위치해있다.[19] 소련령으로 편입된 칼리닌그라드주, 폴란드로 편입된 슐레지엔, 힌터포메른, 동프로이센 남부 등.[20] 그후로도 쥐트슈타트(Südstadt), 노르트슈타트(Nordstadt), 벤데(Weende), 가이스마(Geisma), 그로네(Grone)등으로 교외 주거지역이 꾸준히 확장되었다.[21] 무소속 1인 기민련 3인, 자민당 2인[22] 단 VSN에서 운영하는 광역버스노선인 3자리 숫자 버스노선(가령 180, 160 등)은 일부만 이 버스정기권에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학생회에서 발행하는 팜플렛을 참고하여야 한다.[23] 가령 괴팅겐에서 IKEA 주문을 하면 카셀 IKEA에서 배달할 정도.[24] 실제로 프리틀란트 박물관이 위치한 프리틀란트(Friedland)는 2차세계 대전 이후 중부유럽과 동유럽에서 추방당한 독일인들이 서독 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임시로 체류하던 곳들 중 한 곳이다. 이후에는 탈동독인이나 다른 나라에서 온 난민들을 임시 수용하기도 하였다.[25] 일렉트로닉 뮤직 DJ.[26] 당시에 그랜드 피아노를 약속 받고 초대를 승낙했으나 정작 괴팅겐 극장에 도착하자 업라이트 피아노 밖에 없음을 발견한다. 극장 측에선 운송노조 파업을 이유로 들었지만, 바르바라는 업라이트 피아노로는 관객과 눈을 마주치며 공연을 할 수 없다며 공연을 거부하였으나, 학생관객들이 수소문을 해 한 아주머니가 소유한 그랜드 피아노를 학생들이 직접 가져오는 것을 보고 공연이 성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