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0:22:30

김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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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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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한국갤럽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조사 시리즈를 기획해 2004년부터 5년 주기로 발표하고 있다.
2004년
※ 200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공동 2위 4위 5위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 현철
6위 7위 8위 9위 10위
태진아 신승훈 송대관 김건모 설운도
2009년
※ 2009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장윤정 BIGBANG 태진아 이미자 소녀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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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 조용필 현철 손담비 이승철 송대관 }}}
2014년
※ 201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조용필 이선희 장윤정 아이유 태진아
6위 공동 7위 9위 10위
EXO 이승철 이미자 나훈아 소녀시대
2019년
※ 2019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방탄소년단 장윤정 나훈아 아이유 조용필
6위 공동 7위 9위 공동 10위
이선희 태진아 이미자 이승철 김연자
공동 10위 15위
이문세 홍진영 TWICE 박효신 남진
16위 17위 공동 18위
임창정 송가인 김건모 설운도 진성
21위 공동 22위
성시경 거미 BLACKPINK 잔나비
2024년
※ 202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임영웅 아이유 방탄소년단 나훈아 NewJeans
6위 7위 8위 9위 10위
장윤정 진성 영탁 송가인 BLACKPINK
11위 12위 13위 공동 14위
이찬원 성시경 김연자 김호중 조용필
16위 17위 공동 18위 공동 20위
이효리 전유진 IVE 이문세
공동 20위
이미자 이승철 장민호
같이 보기: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좋아하는 스포츠선수, 좋아하는 소설가, 좋아하는 탤런트, 좋아하는 영화배우,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예능인, 좋아하는 유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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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자 박초롱 윤보미 김남주 오하영
진욱 홍지윤 김소연 황민우 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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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00f><colcolor=#fff> 김연자
金蓮子|Kim Yonja[1] | キム・ヨンジャ
파일:20171128031309_1157346_2456_3680.jpg
출생 1959년 1월 25일 ([age(1959-01-25)]세)
전라남도 광주시 사직동
(現 광주광역시 남구 서동 145-21)[2][3]
거주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54cm, 47kg, O형
학력 광주수창국민학교 (전학)
광주대성국민학교 (졸업)[4]
광주수피아여자중학교 (중퇴 / 명예졸업)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5]
종교 개신교
데뷔 1974년 〈말을 해줘요〉
(데뷔일로부터 [age(1974-01-01)]주년)
가족 어머니 이옥순, 여동생 김수진
소속사 YJKcompany (일본)
초이크리에이티브랩 (국내)
온웨이즈 (유튜브 채널)
SNS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MBTI ISFJ

1. 개요2. 데뷔 전3. 활동4. NHK 홍백가합전 출전 경력5. 전 남편6. 여담7. 수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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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가수.

트로트의 전설로 불리고 있으며 조용필과 함께 원조 한류 스타라고 할 수 있는 거물급 가수이다. 일본에서는 1980~1990년대 엔카의 여왕으로 불리며 큰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일본 내에서도 인지도가 제법 높은 한국인이다. 2010년대 이후는 국내 활동에 주력하고 있으며, 2016년 이후에는 아모르 파티가 국내에서 역주행하며 대히트를 쳐 젊은 세대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 데뷔 전

1959년 1월 25일 전라남도 광주시 사직동[6](現 광주광역시 남구 서동 145-21)에서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7] 큰집과 같이 살았는데, 할머니가 한 집에서 두 명이 태어나면 안 된다며 둘째인 김연자의 엄마에게 밖에서 낳으라고 해서 엄마는 마당에서 김연자를 출산했다. tv조선 마이웨이 83회

아버지가 이발소를 했는데 김연자가 5~6세 때부터 매일 손님 앞에서 노래를 시켰다고 한다. 단골 손님이 오면 아버지는 "연자야 노래 불러라"고 외쳤다고. 아버지는 이발소 영업이 끝난 후에 가게 안에서 1시간 동안 전축으로 이미자 노래를 틀고 김연자에게 연습하라고 한 뒤 나갔다고 한다.

국민학교 3학년 쯤 큰엄마가 내일 광주공원에서 열리는 노래자랑에 나가라며 참가금 2~3백 원을 줬는데, 당시 김연자의 용돈은 10원이었다. '어린 나이에 유행가 부르면 안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동요를 불렀는데, 떨어져서 참가상으로 소주 1병을 받았다고 한다. 참가금으로 큰 돈을 줬는데 상을 못 탔다고 큰엄마에게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국민학교 4학년 때 가요교실 학원[8] 선생에게 돈이 없다고 말하니 무료로 다니게 해줘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5년을 다녔다. 또래 친구들은 동요를 좋아했지만 김연자는 트로트를 불렀다고 한다.

국민학교 5학년 때 광주의 대표적인 노래 대회였던 <벚꽃 노래 자랑>에 친구 정우순과 함께 출전했다. 펄 시스터즈 등이 똑같은 옷을 입고 노래하니까 우리도 똑같은 옷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엄마가 시계를 전당포에 맡긴 돈으로 옷을 맞춰줬고, 인기상을 탔다. <벚꽃 노래 자랑>은 생방송으로 진행됐던 프로그램이라 많은 광주시민들이 시청을 했고, 그 후 수피아여자중학교에 입학하니 노래자랑에 나왔던 김연자를 알아봤던 학우들이 있었다고 한다.

파일:김연자ㄴ 002.png
파일:19 김연자 가족.jpg

중학교 시절에는 오락 부장이었다. 선생들이 자주 교단에 불러내 노래를 시켰다고 한다. 1973년 14세였던 중학교 3학년[9] 2학기 때는 열흘 정도 공연장에 따라다니느라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쇼를 다 보고 학교에 왔더니 수업 미달로 정학을 당했고, 아버지가 차라리 학교를 중퇴하고 서울 가서 가수를 하는게 어떻냐며 열차표를 직접 사줬고 한다. 엄한 아버지를 무서워했기에 거역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김연자는 홀로 상경했다.

서울에 상경한 그녀는 미아리[10]의 작은아버지 집의 작은 방에서 작은아버지 내외, 사촌동생 4명과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허나 광주 바닥에서는 알아주는 가수 유망주였으나, 서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작은 아버지와 오디션을 보러 다녔는데 다 떨어졌다고 한다. 작은아버지가 '쇼에 가서 조카가 노래하니 써주지 않겠냐'고 물어보고 다녔지만 모두 탈락. 나훈아 콘서트에도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문전박대 당했다고 한다.

후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따라서 상경하여 단칸방 사글세 살이를 시작했는데, 옆집에 부유한 수양엄마[11] 집에서 매일 전축을 틀고 노래 연습을 하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계속 낙방하여 답답한 마음에 상경한 어머니를 따라 관악산 어느 절로 올라갔고, 그 절에 있던 스님이 '21세에 꽃가마를 탈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는 김연자가 출세하기 시작한 나이와 비슷하다.

동향 출신의 선배 가수 이영숙의 소개로 청계천에 있던 <오아시스 레코드[12]> 사장에게 오디션을 봤고,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부른 것으로 기억한다는 김연자는 그 자리에서 드디어 합격한다. 하지만 말은 합격인데 가난한 집안에 수입이 없는 김연자의 처지를 안 사장은 데뷔가 아니라 회사 3층 공장에서 월급 2만 원에 카세트 테이프 만드는 일을 시킨다. 일하다가 1시간은 2층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작곡가 김학송에게 노래를 배우며 지냈다.

어느 날, 오아시스레코드에서 한 평론가가 어느 카바레에 신인가수가 필요하다며 오디션을 권했다. 낮엔 일하고, 밤엔 나이를 18세로 속이고 비어홀, 카바레 등 3곳의 밤무대에서 월 6~7만 원을 받으며 노래생활을 시작했다. 손님이 많은 시간엔 유명 가수가 노래하고, 무명인 김연자는 한가할 때 노래를 했다. 당시엔 이미자와 목소리가 비슷해 '제2의 이미자'라고 내세웠다.

아버지가 경제적 지원은 없었고, 딸이 가수가 됐다며 학교를 못 다니게 했다고 한다. 남들은 공부하고 친구들하고 놀 때 자신은 서울에서 노래를 해야해서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했었다고 한다. 너무 빨리 사회인이 되어버려 학생의 청춘이 없었다고. 결국 김연자는 경제적 가장 역할을 하여 두 동생을 대학에 다닐 수 있게 한다. 물론 나중엔 가수가 되게 해준 아버지께 고마워한다고 한다.

3. 활동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연자/활동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NHK 홍백가합전 출전 경력

파일:NHK 홍백가합전 로고.png
연도 출장 횟수 곡명 출연 순서 상대
1989년 / 제40회 아침의 나라에서 07 / 20 알란 탐
1994년 / 제45회 2 川の流れのように
강물의 흐름처럼
23 / 25 타니무라 신지
2001년 / 제52회 3 림진강 22 / 27

5. 전 남편

  • 전 남편은 재일교포 2세 김호식(일본명: 오카 히로시), 지휘자 겸 앨범 프로듀서, 김연자의 매니저이자 소속사 사장, 유명 재즈 오케스트라 '클리어 톤즈'의 악단장. 예총 일본지부장. 김연자와 18세 차이며, ''김연자의 어머니와 2살 차이, 아버지와 7살 차이'다.
  • 김연자가 처음으로 일본에 데뷔했을 때 악단장으로 온 그와 만났고 첫눈에 서로 끌렸다. 김연자가 한국에 돌아온 후 장거리 연애와 일본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혼한다. 결혼 후 일본 갈 비자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음반이 대박나서 일본에 가지 않고 한국에서 활동하게 된다.
  • 남편은 김연자의 일본에서의 성공에 공을 세웠다. 남편은 고교시절부터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해 가요계 지인들이 많았고 남편 때문에 김연자를 도와준 사람들도 많았다. 남편은 김연자의 일본 내 기획사 대표를 맡아 그녀의 모든 스케줄과 수입을 관리했다. "남편은 아버지처럼 인자하고 다정하게 저를 이끌어줬죠. 남편이 없었으면 일본의 김연자도 없었어요. 두 번째로 일본에 갔을 땐 아무런 신경 쓸 일 없이 노래만 부르면 됐어요. 그땐 남편이 제 매니저가 되어주었어요. 남편은 어떻게 하면 가수 김연자를 세계로 통하게 할 수 있을까 연구하는 사람이에요. 어떤 때 보면 남편이 저보다 더 제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같아요. 남편 이 야쿠자라는 등의 소문은 말도 안 돼요. 정말 자상한 사람이에요.” 싸울 때 남편이 김연자에게 "나 없었으면 너 호스티스나 하고 살았을 것"이라 말했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기인한다.
  • 김연자의 남편이 야쿠자라는 소문이 한국에 있었지만, 남편 본인은 그런 소문을 몰랐으며 야쿠자임을 부정했다.
  •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은 없다. 남편은 가수 일이 아이라며 음악만 하길 원했다. 그리고 아이를 가질만한 여유가 생기나 싶으면 가수로서 큰 일이 와서 번번이 임신의 기회를 놓쳤다. 아이에 신경 쓸 시간도 없었고 김연자가 가수라는 본업에 충실하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다. 마흔 네 살이 되자 체념하게 됐다.
    "노래를 하다 보니 자식 가질 기회를 놓쳤어요.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제게는 평생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바로 노래죠."


    김호식: "아내는 가수이다. 가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노래를 잘할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거다. 그래서 그것만 생각하는 편이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가엽기도 하지만 이미 가수의 길을 택했으니 어쩔 수 없다."


    김연자: "남편이 나를 잘 봤다. 왜냐하면 나에게 아이가 있으면 아이에게 집중하지 노래를 못 할 것 같다. 사실 나는 두가지 일을 못한다. 내가 여자로서는 불행하지만 가수니까 그게 좋지 않을까 싶다... 사실 후회는 없는데, (아이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든다."


    “젊었을 때 나는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남편은 들어주지 않았다. 남편이 필요 없다고 하더라. 나한테도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자식까지 키울 여유가 없다는 이유였다. 자식이 없다 보니 서로 할 수 있는 대화가 음악뿐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화가 없어지더라. 우리 부부생활의 중심은 노래로 시작해 노래로 끝났다. 난 아내로서 사랑도 못 받았다. 항상 외로웠다. 노래가 아니었다면 진작 한국으로 돌아왔을 거다. 팬 여러분께 정말 감사한다. 내 동의 없이 일본 활동 중지 편지를 보낸 것이 가장 배신이고 충격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내 팬에게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편지를 두 번이나 보냈다. 내가 노래 하나로 여태 살아왔는데 그 숨을 끊으려고 하다니 정말 원망스럽다. 내 인생이 정말 불쌍하다."
  • 김연자는 2011년 SBS '자기야' 방송에서 결혼 생활을 고백했다.
    "사실 남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몇 천번 한 적이 있다. 일본에선 저한테 남편밖에 없고 오로지 나 혼자다. 힘들어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이혼하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때마다 이혼을 안해줬는데 , 어느 날 갑자기 가라고 하더라.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주던 남편이 어느 날 한국으로 돌아가라며 나를 보내주겠다고 나섰다. 그게 반대로 더 슬프고 버림받는 기분이었다. 쫓겨나는 기분이고 더욱 섭섭하게 느껴졌는데, 그제야 남편이 내게 큰 버팀목이었음을 절실히 알 수 있었다. 그제야 남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 2012년 2월 그는 남편과 이혼 조정을 신청했고, 5월 이혼했다 위자료를 한푼도 받지 못했다는 폭탄 고백을 했다. 이혼 사유는 남편과의 성격 차이로 인한 갈등. 그간의 돈벌이는 남편이 관리했는데, 김연자 말로는, 남편이 돈이 없대서 위자료와 재산 분할을 전혀 못 받았다.
  • 남편이 빼돌려 돈을 숨겼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실제로 회사 관계자도 돈이 없을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회사에 소속된 수십명의 악단과 직원을 먹여살리는 문제와 몇번밖에 안 입고 매번 맞추는 엄청난 고가의 무대 의상 등 비용도 컸을 것이다. 김연자도 동생을 만날 때마다 동생의 월급만큼 용돈을 주는 등 돈을 전혀 못 쓰고 산 것도 아니다.

6. 여담

  • 일본에서 열리는 콘서트나 TV 프로그램에 한복을 입고 나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일본 극우들의 표적이 되어 많은 협박과 핍박을 받았다. 일본 활동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편견을 많이 받았지만, 오로지 실력 하나로 모든 것을 제압한 것이다. 물론, 한복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디너쇼에서 계속 입고 있는데 일본 극우들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한국의 기개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일부러 더 화려하고 큰 자수가 박힌 한복을 입는다고 한다. 참고로, 그녀가 입는 한복은 특수하게 수제 제작되어서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이다. 그래도, 요즘은 예전보다 한류세가 많이 커져서 굳이 본인이 한복을 입으면서 한국을 알리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 김연자는 한국의 수많은 명곡들을 일본에 많이 알려준 가수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 임진강, 노란 샤쓰의 사나이, 내 나이가 어때서, 이별[13], 강원도 아리랑, 고장난 벽시계, 안동역에서 등등... 수많은 한국 노래를 일본어 가사로 번안하여 부르기도 했다.
  • 특유의 블루투스 창법의 경우에는 김연자의 성량이 워낙에 크기에 만들어진 창법으로, 정엽의 맷돌 창법과는 차이가 있다.[14] #
  • 환갑이 넘었음에도 성량이 커서 마이크를 멀리 떼고 불러도 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어느 행사에서 마이크 소리가 너무 컸던지 귀를 막고 있던 관객을 본 뒤로 마이크를 멀리 뒀다가 가까이 뒀다가 자유자재로 다루며 성량을 조절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야외 현장 스피커에선 소리가 적은 걸로 의심되는 정황도 있어 후보정 덕에 소리 크기가 유지되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 쩌렁쩌렁 울리는 매우 큰 성량과 때로 과격하게까지 느껴지는 강한 감정선 등, 일본의 국민 정서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가수였다.[15] 이에 김연자도 자신의 개성을 계속 갈고 닦되 어느 정도는 타협하여 긴 무명이었던 기간을 이겨내고 일본의 국민 가수가 될 수 있었다. [16]
  • 2012년 나는 트로트 가수다에 출연해서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불러서 Staff가 뽑은 1위에 꼽혔다. 다른 가수들이 모두 퓨전적이고 세련된 편곡을 한 것에 반해서 김연자는 그야말로 정통 트로트의 진수를 보여줬다. 김연자 특유의 폭풍 가창력과 뒷부분의 애절한 내레이션까지 최근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나는 가수다의 무대를 관광 보낸다는 평가까지 받았으며, 1위를 기록한 문주란 이상까지 간다는 호평을 얻었다.
  • "향수병에 시달리던 시절이 있었죠(웃음). 한국가수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고 있어요. 한국인임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공연을 할 때 마다 한복 한 벌씩을 입어요. 하지만 향수병은 오래전 이야기죠. 저랑 함께 일하는 스태프만 50명이에요. 외로울 틈도 힘들 틈도 없어요. 지금처럼 엔화가 비쌀 때 일본에서 더 열심히 벌어서 한국에 투자도 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해 야죠. 예쁘게 봐주세요" 일본에서 음반이 잘 되지 않거나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크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얼굴이 된 만큼 끝까지 멋지게 활동을 하고 싶다는 그녀는 기회가 된다면 꼭 한국 무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싶다고 밝혔다.
  • 자선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목포에 있는 고아원인 '공생원'[17]에 '사랑의 음악당'을 건설하기 위해서 자선 콘서트를 한일 양국에서 50회를 열었고, 2011년 대지진 당시에는 도전 1000곡의 우승 상금을 모두 기부했다.
  • 씨름판에서 유명한 "천하장사 만만세~"를 부른 가수다. 곡명은 천하장사로, 1986년에 발표했다.
  • 1988 서울 올림픽 찬가 '아침의 나라에서' 역시도 그녀의 노래인데,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본래 '아침의 나라에서'는 국민 투표를 통해서 서울 올림픽 주제가로 선정되었는데, 그 뒤에 '촌스럽다'라던지 '세계인들이 들을 노래인데 너무 뽕짝스럽다'는 부정적인 여론을 수렴해 뒤늦게 곡 교체를 하게 되었는데,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서 당시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던 탓에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코리아나가 부른 '손에 손 잡고'로 바뀐 것이었다. 김연자의 곡도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좋은 곡이기는 하지만, 올림픽 주제가라는 특정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아침의 나라에서'에서 느낄 수 있는 해당 문제점을 개선한 노래 '손에 손잡고'가 더더욱 넘사벽 수준으로 훌륭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침의 나라에서'는 자연스럽게 묻히게 되었다.
  • 2002년 당시 왕성한 활동으로 일본에서 인지도가 높은 김연자를 브랜드화하여 김치홍보대사로 활용한 「김연자 김치」가 출시되었다. 일본수출용이었지만 국내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 무한도전에 출연해서 유재석의 팬이라서 꼭 만나고 싶었는데 너무 반가웠다고 했으며, 해피투게더에서도 만나서 팬이라고 계속 말했다고 한다. 박명수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방배동 이웃 주민인 인연과 EDM으로 통하는게 있었고 박명수가 엄청 챙겼다고 했다.
  • 2018년 부산대 축제에 참가 소식이 있었을 당시의 반응은 이구동성으로 이게 대학교 축제인지 어르신 축제인지 모르겠다, 학생회장 토토했냐? 등의 혹평이 많았지만, 막상 축제에서 여러분으로 클래스를 제대로 보여줬고, 아모르 파티를 부르니까 난리났다. # 이에 따라서 다른 문제와는 별개로 축제 뒤로부터 섭외 가수에 대한 불만은 일축 되었다. 그리고 2018년 부산대 시월제 축제에 우정 출연으로 다시 방문했다. 직캠 영상.
  • 2001년 방북 때 김정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았으며, 개런티에 대해서 합의 없이 왔기 때문에 그냥 자선 공연인 셈 치려 했다. 하지만 환영 만찬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김정일이 "자선 공연은 절대 하지 마거라. 그게 우리한테는 고마운 일이지만, 다른 외국 가수들도 돈 받고 오는데 왜 자선 공연을 하려 하느냐?"면서 직접 돈이 든 서류봉투를 건넸다고.[18] 한편으로는 김정일과 만난 김에 혈액형이 뭔지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주변의 간부들이 그런 민감한 생체 정보는 기밀 사항이라면서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김정일이 말리고는 "내 혈액형은 A형이다.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본다."는 답변을 흔쾌히 했었다.
    • 그러나 김정일이 김연자를 극진히 환대해줬던 것과 달리 김정은은 김연자를 싫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한류의 상징이라고 여기기 때문으로 보인다. 2024년에 김정은은 김연자를 콕 집어 "김연자 노래는 듣지도 부르지도 말라"고 지시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노래의 유행을 금지하려고 가수의 이름까지 지적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지만 USB, SD카드에 워낙 김연자의 노래가 많이 담겨 있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좋아하여 그 노래의 청취를 금지할 수는 없으리라고 한다. ##
  • 가사를 자주 잊어버린다고 한다.
  • 2020년 8월 7일 히든싱어6에서 1번째 원조 가수로 출연했다.
  • 외가 식구들이 노래는 잘 하는데 박자는 못 맞춘다고 한다. 아버지는 음치.
  • 일본에서 성공한 비결로 `서비스 정신`을 꼽았다. 팬들에게 시간을 많이 내주는 편이다. 함께 식사도 하고 여행도 다닌다.
  • 귀화를 요청하는 일본 팬들도 많았지만 김연자는 원치 않았다.
  • 일본에서 역시 자신의 이름을 상표로 하여 김치를 판매하는 등 한국과 관련된 활동도 많이 하고 있다.
  • 망토를 잡고 도는 동작은 원래 계획된 안무가 아니라 그냥 신나서 하다 보니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고 한다.
  • 2017년 하반기 이후로 단발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데, 숱이 워낙 많다 보니 가발로 추정된다.
  • 이름이 촌스럽다고 생각해서 개명을 여러 번 고려했었다. 작사가가 만든 이름이 "김현아", 일본에 처음 갔을 땐 "매매중" 작명했지만 쓰지 않고 본명만 썼다. 김연자의 일본어 표기는 キム・ヨンジャ 다.
  • 고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1937~2000)는 김씨 공연에 축전을 띄우고 꽃다발을 보내는 열혈팬이었다.
  • “노래는 작곡가나 작사가 등 전문가에게 다 맡긴다. 겸손해지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어릴 땐 자신만만했다. 자신이 잘나서 인기 있는 줄 알았다. 노래도 내가 좋아한 곡을 골랐다. 하지만 히트곡 근처에도 못 갔다. 이러면 안 되겠구나. 우리는 유행을 잘 파악 못한다. 캐치할 수 있는 사람은 여러 변화를 챙기는 안테나를 많이 세운 작곡가나 작사가다.”는 발언을 했다.
  • 김연자는 자신의 성공 비결로 고추장과 와사비의 조합이라는 비유를 쓴다. 일본 가수의 간드러진 목소리와 한국 가수의 힘있는 목소리 등을 다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일본 오리콘 엔카 차트 15곡 1위를 했다.
  • 세계 20개국 공연.
  • 한국 방문의 해 명예홍보 대사.
  • 브라질 명예국민.
  • 1990년대 히트작인 병맛 코믹 만화 이나중 탁구부에서 주인공 일당이 여자 탈의실에 침투할 때 암호로 사용하는 행동개시 신호를 뜬금없이 "김" "연" "자" 라고 한다. 국내 정발본에서는 설운도라고 번역되었다. 1990년대 당시만 해도 김연자가 일본 활동에 주력하느라 젊은층은 김연자를 잘 몰랐기 때문. 역설적으로 당시 일본 내 김연자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 2021년 3월 8일 방영된 '강호동의 밥심'에 출연해 11년째 연애중이면서 2013년부터 8년 가량 동거중인 남자친구에 대해 언급했다. 연인은 현재 소속사 대표로 초등학교 4학년때 음악학원에서 만나 알고 지낸지 50년됐으며 힘들었던 시절 자신의 곁을 지켜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결혼까지 가는 것이 시간이 걸려서 하고는 싶은데 자꾸 미루게 된다. 올해는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결혼을 할까 한다"며 남자친구는 봄에 하자고 하는데 나는 많은 분께 축복을 받고 싶어서 가을쯤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1 #2
  • 2021년 8월 21일 놀면 뭐하니?에 잠시 출연하여 아침의 나라에서를 열창했다.
  • 전참시에서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것이 자주 확인되었다. 모자이크가 되었지만 자세히 보면 꿈의 정원으로 보인다.
  • 드레스룸만 15억이 넘는다고 한다. #
  • 2021년 9월 서울 은평구 홍보대사로 임명되었다.
  • 2022년 4월 30일, 놀면 뭐하니?WSG 워너비에 참가자로 출연하여 임재범너를 위해[19]이승철의 잊었니를 열창해서 대호평을 받았지만, "너무 거장이라 신인 발굴이라는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1차 블라인드 오디션에서 3개의 소속사 중 2개의 탈락을 받아 최종 탈락했다.
  • 말이나 억양에서 본인이 전라도 사람이라는걸 알아채는 일반인들이 많다.[20]
  • 2024년 5월 10일, 경주시 봉황대에서 하는 봉황대 뮤직스퀘어를[21] 방문하여 공연을 했다.
  • 주현미, 장윤정과 더불어 트로트 여제 3인방으로 불린다. 실제로 이 셋은 트롯신이 떴다 시리즈에서 여성 트로트 가수들로 출연해 활약했었다.
  • 전 화순군수 구충곤과 같은 초등학교 출신으로 친분사이가 있다. 지원 유세를 도와준거를 보면 꽤나 친한듯 하다.

7. 수상 기록

  • 광주 <벚꽃 노래 자랑> 인기상
  • 1974년 TBC '가요신인스타' 우승
  • 1977년 TBC 「전국남녀가요신인 콩쿨」 우승
  • KBS 올해의 가수상(1982~1984년)[22]
  • KBS 가요대상 여자가수상 후보 (1982~1985년)
  • MBC 10대 가수 상 (1983~1984년)
  • 1986년 상파울로 명예시민상
  • 1987년 한국 건전가요 대상
  • 1988년 5월 21일 ‘천생연분’으로 TV주제가상
  • 1992년 상파울로시 의회가 사회 공헌한 사람에게만 수여하는 ‘안셰타장’ 한국인 최초 수상
  • 1999년 11월 28일 제32회 일본작사대상에서 <人生海峡> 우수상 작사가 : 吉岡治
  • 2000년 3월29일 제21회 마츠오(松尾)예술상, 가요우수상을 외국 예능인으로서 처음으로 수상
  • 2001년 7월 일본 법무성 대상 수상
  • 2001년 9월 한국 정부의 '한국 방문의 해' 명예홍보대사 위촉
  • 2001년 11월 제 43 회 일본 레코드 대상 기획상 수상
  • 2003년 12월 20일 제36회 일본유선대상 최다 리퀘스트 가수상 수상.TBS-TV (사상 최초로 서울에서 생중계방송)
  • 2003년 12월 31일 제45회 일본레코드대상 TBS-TV계열.
  • 2004년 12월 18일 제37회 일본 유선대상 유선음악 우수상 수상. TBS-TV
  • 2005년 12월 17일 제 38 회 일본 유선 대상 유선 음악 우수상 수상
  • 2006년 2월 14일 싱글?앨범으로 히트상을 더블 수상
  • 2010년 12월 27일 방송 횟수와 시청자 선호도 조사를 토대로 선정된 16명의 트로트 가수 중 한명으로 수상.
  • 2011년 2월 5일 재회(再?) 전곡집 약속(約束) 3곡에 대해서 크라운힛트상 수상.

[1] 공식 사이트 등에서 Yonja라 표기하고 있다.[2] #[3] 도로명 주소로는 광주광역시 남구 서오층석탑2길 4-2 네이버지도[4] 2018년 KBS광주 연말 콘서트 때 언급했다.#[5] 김연자는 중3때 중퇴를 하고 상경하여 가수 활동을 하느라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추후 수피아 측으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6] 1959년 당시 광주에는 구제가 시행되지 않았던 때였다, 1973년에 광주에 구제가 시행되면서 동구와 서구가 각각 신설되었으며 1986년에 직할시로 승격되고 1995년에 광역시 승격과 동시에 남구가 서구에서 분구되었다.[7] 허나 김연자는 2020년 06월 21일, 1박 2일 방송 분에서 방문을 추천하는 지역으로 "제 고향 전남 영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영광에서 살았는지 모르지만 "전남"을 고향이라 말한 것일 수 있다.[8] 김연자의 소속사 대표이자 연인인 홍상기는 어릴 때 광주에서 김연자와 같은 음악 학원을 다니며 노래 연습했는데, 여기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엔 김연자는 홍상기를 몰랐다고 한다. 무료로 배운 김연자와 달리 홍상기는 논밭을 팔아 배워서 김연자를 알고 있었다.[9] 중학교 2학년 때 상경했다는 인터뷰도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상 중학교 3학년 때가 맞는 듯 하다. 또다른 인터뷰 기사에선 1974년 중학교 3학년 때 TBC '가요신인스타'를 우승한 후 가수가 되기 위해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광주에서 서울로 갔다고 하는데 #, 여러 자료를 취합해 보면 먼저 서울로 가서 생활하다가 '가요신인스타'에 출전한 게 맞는 듯 하다.[10] 그녀의 애창곡이 '단장의 미아리 고개'다.[11] 김연자는 2019년 'TV는 사랑을 싣고'를 통해 수양엄마와 재회했다.[12] 1952년 창업한 국내 최장수 음반사. 나훈아, 송대관이 속했었다.[13] 패티 김의 노래다.[14] 원래 수준급 가수들은 세밀한 마이크 컨트롤로 강약을 조절하는 경우가 많다. 정엽도 그런 과정에서 속칭 맷돌 창법으로 불리는 기교가 만들어진 것이다. 김연자는 이선희와도 비슷한 케이스로 보면 되는데, 옛날에는 스피커의 질이 조악해서 너무 큰 음량의 소리가 들어가면 클리핑이라 해서 사운드가 찢어지거나 갈라지는 것을 넘어서 스피커가 아예 고장이 나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선희 역시 옛날에 군부대에서 공연하던중 낡은 앰프가 이선희의 무지막지한 성량에서 나오는 큰 입력 신호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 버린적이 있었다.[15] 계은숙은 이런 면에서 김연자보다 훨씬 더 쉽게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의 관능적인 분위기와 절제된 감정 표현,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음색에 일본인은 유례없이 열광했다.[16] 김연자가 유튜브 채널 허스토리 올라온 동영상에서 한 말이다. 두번째로 일본에 왔을 때 자신의 창법이 너무 공격적이어서 사람들이 다가오기 꺼렸다고 했다. 당시의 김연자는 한국인으로써 일본에서 지기 싫다고 최대한 크고 세게 불렀다고 한다. 당연히 이러한 스타일은 일본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재일교포 2세 출신인 유명 엔카 가수인 미야코 하루미에게 태권도 파워라던지 김치 파워를 자제하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밝혔다. 한편, 미야코 하루미는 김연자가 일본 두번째 진출 당시 아무 곡도 받지 못해서 무작정 찾아가자 암야항로라는 곡을 받을 수 있게 도왔다. 이러한 인연인지 일본의 불후의 명곡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에 나가서 김연자가 미야코 하루미의 노래를 펑펑 울으며 불렀다.[17] 공생원은 일본계 한국인 윤학자 선생이 세운 곳으로 한일 양국에서 활동하는 김연자에게 특히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공생원은 그 밖에도 추성훈의 기부도 있었다.[18] 다만 당시의 매니저였던 전 남편이 돈을 받아가서 처리해서 정확히 얼마였는지는 본인도 모른다.[19] 해당 곡은 트롯신이 떴다에서 이미 한 번 부른 적이 있었다.[20] 일반인이 전라도 출신이라면 알아 챌수 있다.[21] 당시 진해성가수 임수정도 있었다.[22] 존재 유무 불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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