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1:37:08

후쿠오카 대학 반더포겔부 불곰 습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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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지면에 실린 사건.[1]
福岡大学ワンダーフォーゲル部ヒグマ事件

1. 개요2. 종주 계획을 세운 대학생3. 과 조우4. 곰의 위협5. 곰의 습격6. 탈출7. 구조대의 도착8. 피해자들의 실수9. 의 최후10. 관련 문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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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어난 홋카이도의 히타카 산맥 분지.
1970년 일본 홋카이도의 히다카(日高) 산맥을 종주하려고 했던 후쿠오카대학반더포겔[2] 학생 5명이 에조 지역 불곰에게 습격당해 그 중 3명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사건 당시를 재현한 다큐멘터리 영상.

2. 종주 계획을 세운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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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카타역에서 촬영된 출발 직전의 사진.

1970년 7월, 후쿠오카대학 반더포겔부 학생 5명은 홋카이도의 히다카 산맥 종주를 목표로 7월 12일 오전 9시경 하카타역을 출발하여 이틀 뒤인 14일 카미카와군 신토쿠정(新得町) 신토쿠역(新得駅)에 도착, 메무로타케(芽室岳)에 입산하여 페테가리다케(ペテガリ岳)[3]로 향하는 종주 계획을 세웠다.

구성원은 리더인 타케스에 카즈토시(竹末一敏, 당시 20세), 서브 리더 타키 슌지(滝俊二, 당시 22세), 코로기 모리오(興梠盛男, 당시 19세), 니시이 요시하루(西井義春, 당시 19세), 카와하라 요시타카(河原吉孝, 당시 18세)이며 그들은 신토쿠의 주재소(한국의 파출소 격)에 등산계획서를 제출하고 이 날 오후 등반을 시작하였다.

3. 과 조우

25일 중간 지점인 카무이에쿠우치카우시산(カムイエクウチカウシ[4]山) 아래 쿠노사와 분지(九ノ沢カール)에 텐트를 친 부원들은 불과 6~7m 앞에 나타난 에조불곰과 마주쳤다.

부원들은 곰이 사냥으로 절멸된 규슈 지방에서[5] 왔고, 에조불곰은 홋카이도에서만 서식하며, 나중에 밝혀진 곰의 모습을 보면 이 곰은 불곰치고 작았기 때문에 이들은 처음엔 겁을 먹지 않고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고 한참동안 관찰하는 여유를 부렸다. 그러나 이윽고 곰이 텐트 밖에 내놓은 등산용 배낭의 음식들을 뒤졌고, 이들은 곰이 흥미를 잃었을 때 재빨리 배낭을 회수한 뒤[6] 불을 피우고 식기를 두들기거나 라디오를 틀어 소리를 내는 방법으로 곰을 쫓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밤 9시경 취침 중에 거친 콧김을 느끼고 깨어난 그들은, 그 무언가가 텐트에 주먹만한 구멍을 뚫어놓고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한다. 이 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들은 2시간씩 교대로 불침번을 서는 방법으로 망을 섰고, 이날은 더이상 곰이 나타나지 않았다.

4. 곰의 위협

26일 오전 3시경, 공포에 휩싸여 단 1명도 잠들지 못한 탓에 이른 새벽에도 깨어나 있었던 부원들은 1시간 반 뒤인 오전 4시 30분 경, 또 다시 나타난 불곰에게 습격을 당했다. 곰이 텐트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려 하자 부원들은 텐트의 지지대를 붙잡고 버텼고, 곰이 5분간 텐트를 집요하게 끌어 당기고, 텐트를 쓰려뜨려 배낭을 마구 뒤지는 사이 이들은 텐트를 빠져 나와 짐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 후 리더인 타케스에는 서브리더인 타키 슌지와 카와하라 요시타카에게 "산림청에 연락해 구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고, 하산하던 두 사람은 다른 대학생 그룹인 홋카이가쿠엔대학의 홋카이악우회(北海岳友会) 일행 18명과 조우한다. 마침 불곰의 습격을 받고 하산하던 도중이었던[7] 홋카이악우회 학생들은 타키와 카와하라에게 "우리와 함께 하산하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남은 동료들과 같이 가겠다"고 이를 사양하며 도움 요청을 요구하고 식료품, 지도, 가솔린 등을 건네받은 뒤 산에 남은 나머지 3명을 구하러 다시 돌아간다.

5. 곰의 습격

다시 돌아간 두 사람은 도중에 돗토리대학과 츄오철도대학원생 그룹과 마주쳤고, 불곰이 나타났다는 등의 정보를 교환한 뒤, 오후 1시경 텐트에 남아있던 3명과 합류. 능선 위가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그곳에서 수리한 텐트를 치고 식사 후 잠을 청하려던 그들에게, 오후 4시 30분 경 어김없이 불곰이 나타났다. 곰은 1시간 가량이나 텐트 옆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이 곳에 계속 있기 위험하다고 판단한 부원들은, 아까 만난 돗토리대학 그룹의 텐트에 합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돗토리대학 그룹도 곰의 습격을 피해 이미 하산한 뒤였고, 어쩔 수 없이 깜깜해진 산길을 계속 내려갔다.

오후 6시경, 능선에서 60~70m 정도 내려가고 있을 무렵, 니시이가 불현듯 뒤를 돌아봤을 때 코앞까지 불곰이 쫓아온 것을 목격한다. 공포에 휩싸인 5명은 미친듯이 달아났고, 곰은 카와하라만을 쫓았다. 도망치던 나머지 부원들은 암흑 속에서 "젠장!"이라고 외치는 카와하라의 목소리를 들었다.

리더인 타케스에가 불곰에게 습격당하고 사투 끝에 다리를 끌며 도망치는 카와하라를 목격했고, 그것이 카와하라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었다. 타케스에, 타키, 니시이 3명은 돗토리대학 그룹에 도움을 요청하려는 생각에 돗토리대학 그룹을 소리쳐 부르고, 모닥불을 피우고 호루라기를 불며 위치를 알렸다. 그러나 돗토리대학 그룹도 캠프를 버리고 하산한 후였고, 3명은 암벽에 올라 그곳에서 밤을 지샜다. 그들은 카와하라가 무사하길 빌었고, 도망치던 와중 일행과 떨어진 코로기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하지만 다른 장소에 숨어 있던 그는 딱 한번 대답했을 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6. 탈출

27일 이른 새벽, 3명의 상황은 산 속의 깊은 안개로 시야가 5m밖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사라진 나머지 2명을 찾거나 불곰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급박했다. 그들은 오전 8시까지 두 사람을 찾았으나 응답이 없어, 일단 하산하는 길을 택한다. 하산 도중 제일 앞에서 걷고있던 타케스에가, 불과 2~3m 아래에 불곰이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곰은 도망치는 타케스에를 쫓았고, 타케스에는 결국 즉사했다. 의도치 않게 미끼 역할이 돼 버린 것.

그사이에 구사일생으로 가까스로 도망친 타키와 니시이는, 고노자와(五ノ沢)의 댐 공사현장에 도착해 지나가는 자동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때가 오후 1시경이었으며, 그 후 나카사츠나이(中札内) 주재소에 도착한 것이 오후 6시가 다 돼 가는 시간이었다.

7. 구조대의 도착

28일 멤버들을 찾으러 나간 구조대는 산에서 겨우 타케스에, 카와하라, 코로기를 찾아냈으나, 세 사람은 결국 시체로 발견되었다. 옷은 다 찢겨져 나가 전라에 허리에 벨트만 감겨져 있는 상태였으며, 얼굴 반쪽은 사라져 있었고, 코와 귀가 전부 뜯겨 있었으며, 복부에서 창자가 튀어 나와 있는 등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뒤였다. 얼굴, 목, 고간 세 부근에 치명상을 입은 3명의 사인은 경추골절경동맥 절단에 의한 과다출혈이었다. 피해자들은 뒤에서부터 둔부를 공격당해 엎어져 쓰러진 자세로 둔부, 항문부가 물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한편, 돗토리대학 그룹이 버리고 하산한 캠프에서는 웬 메모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바로, 현장에서는 동료들과 떨어져 다른 곳에 몸을 숨겼던 코로기가 피신해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남긴 걸로 보이는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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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후 5시.
저녁 식사 후 곰이 나타나 텐트를 탈출하였다. 돗토리대학 WV(반더포겔부)가 있는 곳으로 가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카무이에쿠 아래 분지로 내려갔다.

(17:30) 5시 30분
곰이 쫓아왔다.
카와하라가 당한 것 같다.
내 5m 옆, 위치는 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소나무 숲 옆 20m 지점. 나도 (곰에게) 당할 것 같아 소나무를 옆으로 끌어안았다. (곰은) 절벽 위에 있었기 때문에 절벽 아래 중간 지점에서 숨을 죽이고 있자, 타케스에 선배가 소리치며 돗토리대학 WV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랫쪽의 상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곰이 내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타케스에 선배가 무슨 말인가 큰소리로 말했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 없고, 곰의 위치마저도 파악할 수 없었다.

절벽 아래쪽에 (텐트와) 모닥불이 두세 군데 보였다.
텐트에 숨겨달라고 하려고, 절벽을 5분 정도 내려가서 아래를 보니, 20m 앞에 곰이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 올라오기에 필사적으로 도망쳐 절벽 조금 위쪽으로 올라갔다.

계속 쫓아오기에 30cm 정도의 돌을 던졌다. 빗나갔다. 성큼성큼 올라오기에 15cm 정도의 돌을 코를 겨냥해 던졌다. 맞았다. 그러자 곰이 10cm 정도 물러났으며, 앉아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나는 잡아 먹힐 것 같다고 생각하여 한 번에 쏜살같이 도망치기로 했다.

앞, 뒤, 옆으로 굴러가며, 그래도 돌아보지 않고 앞의 텐트를 향해 겨우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무도 없었다. 침낭이 있기에 바로 하나를 꺼내어 안에 들어가 숨을 돌렸다.
잠시 그러고 있자 왠지 안심이 되어 진정되었다.
그러나 바람 소리, 풀 소리가 신경 쓰여 잠들 수 없다. 돗토리대학 WV가 무사히 보고해서 구조대가 오기를 빌며 잠들다.

27일 (4:00) 오전 4시
눈을 떴다.
밖의 상황이 신경 쓰이지만 무서워서 8시까지 텐트 안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텐트 안을 둘러보니 캼판(코펠)이 있어 안을 들여다 보자 밥이 있었다.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산 위쪽은 안개가 깔려 있어 기분이 조금 나쁘다.

이제 5시 20분이다.
아직 곰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다시 침낭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아아, 빨리 하카타에 돌아가고 싶어...

(7:00)오전 7시
골짜기를 내려가기로 하다.
주먹밥을 만들고 텐트 안에 있던 셔츠와 양말을 빌려 텐트를 나가보니 5m 위에 역시 곰이 있었다.
도저히 나갈 수 없어서 이대로 텐트 안에 머물렀다.

8시 즈음까지・・・・(판독불가)그러나・・・・・(판독불가)을 지나갈 수 없다.
다른 멤버들은 벌써 하산한 걸까.
돗토리대학 반더포겔은 연락해 주었을까. 언제 구하러 오는 걸까. 모든 것이 불안하고 두렵다...
다시 안개가 짙어진다...

이 메모는 26일 오후 5시부터 27일 오전 8시까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것으로 인해 코로기가 겪은 상황을 일부 알 수 있었는데 후반부엔 극심한 공포 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써내려간 듯, 군데군데 도저히 내용을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코로기의 경우 목격자가 없어 다른 희생자 2명과 달리 사망한 시각이 정확히 언제쯤인지 알 수 없으나, 이걸 보면 그 역시 (일행 3명이 계속 나머지 일행을 찾다가 하산을 결정한)27일 오전 8시경까지는 살아있었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혼자가 된 채 텐트 안에 있던 그는 끝내 불곰에게 습격당해 사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8시 즈음 썼던 기록 중 판독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는 걸로 보았을 때, 두려움에 손을 떨며 썼을 정도인 걸 보아 그 무렵 곰이 코로기가 숨어있는 텐트 쪽으로 가까이 접근했으며, 직후 곰한테 들켜서 8시쯤에 살해당한 탓에 더 이상 기록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8]

8. 피해자들의 실수

반더포겔부 일행들이 곰이 나타난 시점에서 실수한 것들이 꽤 있다. 물론 당시엔 대처법은 물론 불곰의 위험성이 널리 퍼지지 않았던 시대였기는 하다. 인터넷이 발달되어 에서 을 만나면 대처해야 하는 방식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현재와는 다르다.

  • 불곰이 손을 댄 짐들을 도로 챙긴 것
    일행들은 식량이 바닥날 것을 우려해 불곰이 뒤지고있던 가방을 도로 빼앗았지만, 집착이 매우 강한 동물이기 때문에 곰의 소유물이 된 물건을 다시 회수한 것은 매우 무모한 짓이었다. 야생에서 다 자란 곰은 먹이를 뺏으면 뺏었지 뺏길 일이 없으며, 먹이의 확보는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한 번 본 먹이를 포기할 줄을 모르는 동물이다. 심지어 숲의 1급 포식자인 대형종 늑대들도 불곰이 오면 자기들이 힘들여 잡아놓은 사냥감을 버리고 36계 줄행랑을 치고 불곰도 다른 짐승이 사냥한 걸 빼앗아 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인간이 불곰과 음식을 놓고 기싸움을 하는 건 어리석기 그지없는 짓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산케베츠 불곰 사건의 경우 습격당한 피해자의 시신[9]을 수습하는 바람에 불곰을 자극하여 마을 전체가 습격받으면서 피해가 더더욱 커지고 만 점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치명적 실수로 작용한 것이다.
  • 불곰과 마주쳤을 때 바로 하산하지 않았던 것.
    결정적인 실수. 곰의 습성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이다. 피해자의 유족들은 "카무이에쿠산은 그들이 이전부터 매우 가고 싶어했던, 꿈이자 목표로 여겼던 산이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정상에 오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하고 있다. 게다가 규슈와 홋카이도는 거의 1000km에 달하는 거리여서 마음만 먹는다고 쉽게 다시 올 수 있는 곳도 아니었기에... 하지만, 일단 목숨부터 부지해야 이나 목표를 이룰 수 있음을 잊지 말았어야 했다. 또한 아래 곰의 박제를 보면 별로 크지 않은 곰인데, 이것 때문에 곰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실제로 생존자들은 이러한 선택을 한 자신들의 행동을 크게 후회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 불곰에게 등을 보이며 도망쳐서는 안 된다.
    불곰은 처럼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것을 쫓아가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곰을 만났을 경우 도망치는 것보다 팔을 크고 둥굴게 만들어 몸을 크게 만들어 보이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또한 인간의 단체 행동을 두려워하는 곰에게 대응하기보다 각자 흩어져 도망친 것도 습격당하는 데 좋은 조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이것들은 약한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불곰이 계속 습격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10]


해당 사건의 다큐멘터리 실험 결과에 따르면,
  • 첫 번째로 사람 모형의 마네킹을 놓고 죽은 척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았을 때, 곰이 죽은 것을 확인하려고 이빨로 뜯고 짓눌러서 마네킹을 두동강냈으며[11]
  • 3번째로 피해자 일행이 했던 것처럼 큰 소리를 내어 쫓아봤으나, 작은 소리에 반응하였지만 큰 소리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피해자들이 최초에 시도했던 방법은 곰을 쫓기에는 전혀 올바른 방법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9. 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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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현장 사진과 유류품. 사건 1년 뒤 하치노자와 분지에서 피해자들이 산에서 찍은 사진과 필름이 발견되기도 했다.

29일, 문제의 불곰이 마침내 곰 사냥꾼 10명에 의해 사살되었다. 3명을 죽인 불곰은 4살 암컷으로 추정되며,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보통 불곰은 2살 때 새끼를 낳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불곰은 교미를 한 흔적이 없었다.[12] 사살 후 곰의 위 안을 살펴봤으나 사람을 먹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곰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일종의 놀이, 또는 적을 쫓는 행위였을 가능성이 크다.사냥 활동이 아닌 다른 이유로 사람들을 먹지 않고 공격해서 죽이고 끝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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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살된 불곰의 박제. 비교적 작아보이는 이 어린 암컷 불곰에게 건장한 성인 남성 3명이 속수무책으로 살해당했다. 박제가 되면 가죽이 10% 가량 수축하므로 생전에 비해 좀 작아지긴 하지만, 이를 감안해도 작은 편이다. 물론 해당 사건은 1970년에 발생한 일이라 이 당시 일본인들 평균키가 작았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곰이라는 맹수의 위험성을 알 수 있는 부분. 사실 곰은 정말 작고 귀여운 새끼 때도, 자기랑 같거나 조금 더 큰 체급의 사람의 아이 정도는 웬만해선 힘으로 누르거나 비등하게 겨룰 정도로 체급 대비 힘이 강한 축에 속한다.

불곰은 곰 사냥꾼들의 관습에 의해 곰고기가 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박제되어 히다카 산맥 산악센터에 보관되어 있다. 훨씬 오래전부터 곰에 의한 습격이 잦았던 히다카 산맥이었으나, 이 사건 이후로 [age(1970-01-01)]년째 곰에 의한 사상 사건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전의 습격은 사살된 동일 개체가 저지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

악천후 탓에 세 사람의 시신을 아래로 옮길 수가 없어 결국 시신은 하치노자와에서 그대로 화장됐고, 유골이 가족에게 전달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하치노자와에는 피해자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졌다.
파일:external/www.kamoshikanagai.jp/kamueku-25.jpg
高山に眠れる御霊
安かれと
挽歌も悲し
―八の沢

昭和四十五年七月二十六日
芽室岳より縦走中
羆に斃れる
竹末一敏君(20才)
興梠盛男(19才)
河原吉孝(18才)
三君ここに眠る

昭和四十六年七月二十七日
福岡大学体育会ワンダーフォーゲル部

平成十六年七月十七日 修復
고산(高山)에 잠든 영혼이
평온하라는 듯
상엿소리도 서글프도다
―하치노자와

1970년 7월 26일
메무로타케에서부터 종주 중
불곰에게 죽임을 당한
타케스에 카즈토시(향년 20세)[13]
코로기 모리오(향년 19세)[14]
카와하라 요시타카(향년 18세)[15]
3인 이곳에 잠들다

1971년 7월 27일
후쿠오카대학 체육회 반더포겔부

2004년 7월 17일 복원

10. 관련 문서



[1] '곰에게 습격당해 3명 행불(위쪽 큰글씨), '히다카 산맥 종주 후쿠오카대 파티(위쪽 작은 글씨)', '텐트 찢고 3일간 쫓아(오른쪽)'[2] 반더포겔(Wandervogel)은 독일어철새라는 뜻. '집단 도보 여행'을 뜻하기도 한다. 일본베이비붐 세대 대학생들에게 유행했던 자연주의 학생 동호회.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독일 문화와 학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독일로 유학갔던 대학생들이 등산 용어를 독일어 그대로 가져와 퍼뜨렸고, 한국도 일본의 영향으로 등산 용어에 독일어를 곧잘 쓴다. 피켈, 륙색 등.[3] 해발 1,736m. 히다카산맥 중부에 위치한 산[4] 아이누어로 가뮈 에 굳-이가 웃(로마자: Kamuy e kut-ika us, 가나(문자): カムィ・エ・クㇳ゠イカ・ウㇱ)이고 직역하면 '불곰(kamuy)이 거기(e) 벼랑(kut)에서 떨어지(ika)는 곳(us)'이다. 참고로 아이누족 사이에서 불곰을 신격화하여 '(산)신'을 뜻하는 '(kim un )kamuy'로 부른다. 따라서 신(=불곰)조차 벼랑에서 굴러 떨어질 정도로 험준한 산이라는 뜻도 있으나, 그만큼 불곰을 자주 만날 수 있는 곳이라는 이다.[5] 규슈 지역에서는 1957년을 끝으로 지금까지 곰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6] 이렇게 자신의 짐을 회수하는 행위는 절대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피해자들의 실수 문단 참고.[7] 이들이 습격받은 것은 24일 중으로, 짐을 몽땅 버리고 바위 위에 올라가 변을 피했다. 버려둔 짐을 다시 회수하러 갔을 때 불곰의 침이 잔뜩 묻은 가방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곰의 크기에 대해 '2m 정도 되는 커다란 곰'이라고 증언하였으나 시간, 장소상 후쿠오카대학 학생들을 습격한 작은 몸집의 불곰과 동일 개체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사건 1달 전 혼자서 종주하던 회사원이 이 부근에서 행방불명된 사건이 있었고, 해당 사건도 동일한 불곰의 소행일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8] 냄새를 맡아서 접근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텐트의 구조상 바깥 상황을 확인하려면 입구 쪽의 지퍼를 열어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오전 7시의 기록처럼 텐트 밖으로 잠깐 나가봤다가 이번에는 운이 나빠 곰한테 들켜서 습격당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9] 사실 이렇게 말하기도 민망한, 그나마 멀쩡하게 남은 신체 일부 파편이라고 하는 게 옳은 상태였다.[10] 사실 피해자들이 곰을 처음 마주쳤을 때 곰을 쫓아 낼 수 있었던 것도, 단체 행동을 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11] 동영상에서 보이듯이 곰은 딱히 흥분하지도 않았고, 호기심에 마네킹에 발을 올려보거나, 뒤집어보려고 하는데 곰의 힘이란 기본적인 동작만으로 매우 무시무시해 그것만으로 마네킹이 으스러졌다.[12] 산케베츠 불곰 사건을 바탕으로 쓴 픽션 소설 <쿠마아라시>를 보면 "사람을 잡아먹는 곰은 거의 암컷이며, 교미나 출산 경험이 없다"라는 언급이 나온다.[13] 1950 ~ 1970[14] 1951 ~ 1970[15] 1952 ~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