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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발디비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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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후안 움베르토 발디비에소 파디야
(Juan Humberto Valdivieso Padilla)
생년월일 1910년 5월 6일
사망년월일 2007년 5월 2일
국적 페루
출신지 리마
포지션 골키퍼, 포워드 (!)
신체조건 174cm / 70kg
등번호 -[1]
소속팀 알리안사 리마 (1927-1941)
국가대표 10경기 / 0골 (1930-1938)
감독 데포르티보 무니시팔 (?-?)
디펜소르 리마 (?-?)
스포르트 보이스 (?-?)
페루 (1954-1955)

El Mago[2]


1. 생애
1.1. 선수 생활1.2. 은퇴 후
2. 플레이 스타일&평가3. 뒷이야기4. 수상
4.1. 클럽4.2. 국가대표

1. 생애

1.1. 선수 생활

후안 발디비에소는 1910년 5월 6일, 경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절제와 꼼꼼함이 몸에 배었다고 한다.

발디비에소는 커리어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알리안사 리마에서 뛰었는데 그 당시 알리안사 리마에는 호르헤 사르미엔토, 알레한드로 비야누에바 등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있었고 발디비에소 역시 골키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 그들을 페루인들은 검은 롤러라 불렀고 큰 인기를 모았다. 그는 당시 알리안사 리마가 페루를 대표하여 칠레 등지로 투어를 나갔을 때 큰 박수갈채를 받았던 선수 중 하나였다. 그를 상징하는 별명인 마술사는 칠레 팬들이 붙여준 별명. 발디비에소를 눈여겨본 프랑스독일의 축구팀들도 있었지만 그는 평생 알리안사 리마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다.

발디비에소는 20살의 나이로 대표팀에 뽑혀 초대 월드컵에 출전하였고, 루마니아와의 첫 시합에 출전하였다. 페루는 결국 주장 플라시도 갈린도의 퇴장을 극복하지 못하고 3대1로 패배하고 말았고, 다음 경기인 호스트 우루과이전에서는 벤치를 지켰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발디비에소의 주가가 높아졌고, 1933년의 칠레와 페루 연합 투어팀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이 팀은 당시 태평양 연합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아일랜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8개월 간 총 39경기를 치렀다. 발디비에소는 골키퍼로 나서 훌륭한 세이브를 보여주었으며 상술한 독일과 프랑스 팀들의 영입 제의도 이 때 받은 것.

1.1.1. 베를린 올림픽코파 아메리카

발디비에소 커리어의 하이라이트. 베를린 올림픽에서 페루 대표팀은 핀란드를 7대3으로 꺾었고, 8강에서도 연장전 끝에 오스트리아를 4대2로 꺾는 엄청난 성과를 연출하였다. 비록 오스트리아가 분더팀이라 불리던 당시 대표팀을 그대로 끌고 온 것은 아니었다하더라도, 페루 대표팀이 4강까지 진출한 것은 대단한 결과였다. 특히 연장전에서 무려 5골을 폭발시키기도 했는데 이는 심판이 3골을 무효처리했음에도 거둔 성과였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재경기가 선언되었고 페루는 당연히 반발하였다. 이로 인해 페루 선수단은 축구를 포함한 모든 올림픽 종목에서 기권하였고, 콜롬비아도 이에 동참하였다.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멕시코 역시 페루의 처지에 동조하였고, 페루에서는 아예 난리가 났다.[3]
우리는 유럽 선수들이 신념이고 뭐고 없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거래를 찾았다.
마이켈 다소(당시 페루 올림픽 위원회 멤버)

3년 후 페루는 자국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하였고, 여기에서는 아예 우승이라는 대형 사고를 쳐서 올림픽에서의 성과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입증하였다.

1.2. 은퇴 후

2년 후인, 1941년. 발디비에소는 글러브를 벗었고, 여러 팀에서 감독을 맡았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30여 년간 캐비닛을 만들며 살았다. 그는 2007년, 97세 생일을 1주일 앞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2. 플레이 스타일&평가

마술사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페루 축구 초기의 스타. 유럽 축구계 관계자들에게 공을 잡는 기계인형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한 소년이 마법사 후안 발디비에소의 태클을 볼 때 나는 그것을 모방하는 걸 좋아했다.
세르히오 리빙스톤

3. 뒷이야기

  • 마술사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31년과 1933년에 칠레로 투어를 나갔을 때 칠레 팀들은 알리안사 리마를 한 팀도 깨지 못했는데 이 당시 그는 각기 다른 팀 선수들을 상대로 4차례의 페널티 킥을 모두 막아냈고 그를 본 칠레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 그의 막내아들 루이스 발디비에소 몬타로는 현 주미 페루 대사이며 페루의 전직 경제부 장관이다. 또한 손자 중 후안 파블로 발디비에소는 페루 수영 국가대표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적이 있다.
  • 발디비에소는 1933년 알리안사 리마의 스트라이커 알레한드로 비야누에바의 부상으로 대신 스트라이커로 뛴 적이 있다. 그리고 스포르티보 유니온과의 경기에서 무려 7골을 집어넣는 원맨쇼로 8대1로 승리를 챙겼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에르난 크레스포가 골키퍼를 뛴 팀이었는지 클라우디오 브라보가 FW를 뛴 팀이었는지 모르겠다.
  • 발디비에소는 활을 매우 잘 쐈다고 전해진다.

4. 수상[4]

4.1. 클럽

4.2. 국가대표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발디비에소의 별명인 el mago는 영어로 the magician, 마누엘 플레이타스의 별명인 el brujo는 영어로 the wizard이다.[3] 오스트리아 측은 당시 페루 팬들이 구장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렸다고 페루 측을 공격했고, 더 나아가 페루 선수들과 권총을 가진 관중 때문에 제대로 플레이를 하지 못했다고 주장을 했다. 페루 측은 이것을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예정된 대책회의에 참가하려 했지만 독일인들의 퍼레이드 때문에 그것을 못했다고 반박했다. 어찌되었든 페루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국제올림픽위원회FIFA는 페루와 오스트리아에게 재경기를 할 것을 결정하였다. 예정된 재경기는 원래 이틀 후였지만 3일 뒤인 8월 11일로 예정되었다. 여기에 히틀러나치당이 개입되었다는 주장 역시 당연히 따라왔다.[4] 발디비에소는 알리안사 리마 원 클럽 맨이므로 클럽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