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23 17:29:54

후세인 바이카라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000000 0%, #000000 25%, #000000 80%, #000000); color: #CA0000"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티무르 피르 무함마드 할릴 술탄 샤 루흐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울루그 베그 압둘라티프 미르자 압둘라 미르자 아부 사이드 미르자
사마르칸트 정권 헤라트 정권
- - 제9대 제10대
술탄 아흐메드 미르자 술탄 마흐무드 미르자 야드가르 무함마드 미르자 술탄 후사인 바이카라
- - 제11대
술탄 바이순쿠르 미르자 술탄 알리 바디 알자만 미르자
}}}}}}}}}}}}
파일:후세인 바이카라.jpg
후대에 모사한 당시의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실패와 방랑2.2. 집권2.3. 내치2.4. 치세 후반기2.5. 사망과 이후

1. 개요

페르시아어 حسین بایقرا
우즈베크어 Husayn Boyqaro / Хусейн Байкара
영어 Sultan Husayn Bayqara Mirza

생몰 1438년 6월 ~ 1506년 5월 4일
재위 1469년 2월 ~ 1506년 5월 4일

티무르 제국의 8대 군주. 아부 사이드 미르자백양 왕조에 패한 후 혼란을 수습하고 호라산을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하지만 16세기 들어 고조되던 우즈벡 칸국의 위협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다가, 말년에서야 출정하다가 사망하였다. 이후 티무르 제국은 2년 내로 빠르게 붕괴하였다. 따라서 후세인 바이카라는 실질적으로 티무르 조의 마지막 군주로 평가되며, 9촌 바부르 역시 그를 존경하였다.

2. 생애

샤루흐의 치세인 1438년 여름에 우마르 샤이크의 아들 기야스 앗딘 만수르 미르자와 타이치우트 공주 피루자 술탄 베굼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술탄 후세인으로, 외조부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것이다. 후일 후세인은 양친이 모두 물려받은 티무르칭기즈칸 혈통은 물론 11세기 헤라트의 수피 성인 카와자 압둘라 안사리의 후손임을 주장하여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다만 7-8세 무렵 부친을 여읜 후 외조부 이름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겨 파르스 총독을 지내다 샤루흐에 반란을 일으켰던 숙부 바이카라 미르자의 이름을 따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가 되었다.

2.1. 실패와 방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아부 사이드 미르자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샤루흐와 울루그 베그 사후 혼란기인 1452년, 후세인은 당시 헤라트를 지배하던 7촌 당숙 아불 카심 바부르의 휘하에 들어갔다. 다만 이내 그가 명군이 아니라 여긴 후세인은 사마르칸트의 아부 사이드 미르자에 귀부하였다. 아부 사이드 역시 7촌 조카를 환영했으나, 1454년 후세인의 사촌인 우와이스 미르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대비책으로 그를 체포하였다. 다만 이듬해 피루자 베굼의 청원으로 풀려난 후세인은 재차 아불 카심 바부르에 의탁했는데, 1457년 그가 사망하며 도래한 혼란 속에서 후세인은 용병 생활을 하다 메르브의 산자르 미르자에 의탁하였다.[1] 산자르는 후세인에게 딸 베카 술탄 베굼을 결혼시켜 사위로 삼았고, 둘 사이에서는 바디 올 자만 미르자가 태어났다.

1457년 6월 산자르는 메르브를 비우며 사위 후세인에게 도시를 맡겼는데, 고관 하산 아를라트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믿은 후세인은 정변을 일으켜 메르브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산자르에 충성하는 아미르들이 봉기하자 후세인은 불과 5기의 기병과 탈출하였는데, 성밖에서 대상 행렬과 마주하였다. 그 인도자인 하산 차르카스는 2백의 기병과 함께 후세인에 합류하였고, 후세인은 그의 딸 아파크 베굼과 결혼하였다. 이후 산자르의 추격을 피해 카라쿰 사막을 건너 호라즘까지 도주한 그들은 용병대 생활을 하며 기회를 노렸다. 1천 병력을 모은 후세인은 1458년 10월, 아부 사이드와 흑양 조의 협상을 틈타 후자로부터 고르간을 점령하였다.

협상을 끝낸 아부 사이드가 이듬해 진격해오자 후세인은 고르간을 버리고 호라즘으로 도주하였다. 다만 아부 사이드가 아들 술탄 마흐무드 미르자를 고르간 총독에 봉한 후 무함마드 주키 미르자의 반란을 진압하러 떠나자 1461년 5월 마흐무드를 자우지 왈리 전투에서 격파하고 고르간을 재점령, 압둘라흐만 아르군을 총독에 봉하였다. 그해 8월 후세인은 내침 김에 헤라트까지 포위했지만 아부 사이드가 구원에 나서자 재차 호라즘으로 도주하였다. 1464년 들어 후세인은 호라산 변경을 습격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고, 이에 아부 사이드의 적수인 우즈벡 칸국의 아불하이르 칸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1468년 그가 사망하며 무산되었다. 이후 후세인은 이곳 저곳을 떠돌며 방랑하였다.

2.2. 집권

파일:후세인 바이카라 1 (3).jpg
후세인 바이카라의 대관식

1469년 2월, 아부 사이드가 카라바그 전투에서 백양 조의 우준 하산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후 우준 하산 진영에 있던 샤루흐의 증손 야드가르 무함마드 미르자는 아부 사이드를 처형하였다. 아부 사이드 사후 티무르 제국은 재차 분열되었다. 아부 사이드의 아들들은 각자의 영지에서 자립하였다. 장남 술탄 아흐마드는 사마르칸트, 차남 술탄 마흐무드는 바다흐샨 및 히사르, 삼남 울루그 베그 2세는 카불 및 가즈니, 막내 우마르 샤이크 2세는 페르가나 순이었다. 다만 수도 헤라트가 빈 틈을 타 후세인은 빠르게 진격하여 도시를 포위, 3월 24일에 점령하였다. 이로써 떠돌이 용병대장 후세인은 단번에 호라산의 주인이 되었다. 한편 우준 하산은 야드가르를 술탄으로 추대하여 호라산으로 파견하였다. 그해 9월 첸나란 전투에서 후세인은 흑양 조의 술탄 유수프와 함께 야드가르를 격파하였다.

이에 우준 하산은 두 아들과 정예병을 파견하였고, 우선 술탄 유수프를 사로잡아 처형한 후 후세인에게 헤라트로 피신한 흑양조 잔당을 넘기라 요구하였다. 후세인이 거절하자 야드가르와 백양 군대는 헤라트로 진군하였고, 후세인은 맞서려 하였으나 휘하 병력이 대거 이탈하자 도주하였다. 따라서 1470년 7월 야드가르는 헤라트를 무혈 점령하고 집권하였다. 하지만 세력을 재정비한 후세인은 8월 말엽 재차 헤라트를 점령, 야드가르를 사로잡아 처형하였고 혼란을 틈타 남하한 사마르칸트의 술탄 아흐마드 역시 격퇴하였다. 다만 후세인은 아부 사이드와 달리 이란의 고토를 요구하지 않고 백양 조와 루트 사막을 경계로 사실상의 휴전을 맺었다. 우준 하산 역시 서쪽의 오스만 제국에 맞서야 했기에 양측은 더이상 충돌하지 않았다. 트란스옥시아나의 8촌들이 서로 경쟁하는 동안에도 후세인은 제국 통일이나 영토 확장에 나서기보다 내치에 힘썼다.

2.3. 내치

다른 시대의 경우 샤리아와 이슬람 사회의 원칙들이 이단자들의 수중에 있기도 했지만.. 이제는 성스러운 율법과 선지자의 법이 굳건하니..

ㅡ 후세인 바이카라, 자신의 도덕 정치를 자신하며

후세인은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좋은 군주로 묘사되었고, 헤라트에 여러 마드라사를 세웠다. 이슬람에 진심이었던 그는 교리에 따라 포도주와 면도를 금지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티무르와 울루그 베그가 저지했던 샤리아는 샤루흐, 아부 사이드를 거쳐 후세인 바이카라 대에 호라산 지역에 완전히 정착하였다. 따라서 2세기 간의 몽골-튀르크 지배에도 중앙아시아는 이슬람 문명권으로 남을 수 있었다.

능숙한 행정가로서, 후세인 바이카라는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학문의 후원자로 명성을 날렸다. 특히 시인들을 후원하여 헤라트 궁정에는 페르시아 고전시의 마지막 대가로 손꼽히는 자미와 차가타이 튀르크 문예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알리시르 나바비 등의 시인들이 상주하였다. 따라서 30여년간 이어진 그의 치세는 페르시아와 튀르크 문화의 혼합이 절정에 달하여 2차 티무르 르네상스로도 불린다.[2]

2.4. 치세 후반기

파일:후세인 바이카라 2.jpg
1495년경 히사르의 술탄 마수드 미르자와의 전투

20년 이상 중풍을 앓으며 자주 아팠던 말년의 후세인은 여러 반란과 침공에 대처해야 했다. 1490년 후세인의 조카 이브라힘 후세인의 후견인 다르비쉬 알리가 히사르의 술탄 마흐무드와 함께 호라산을 침공하였다. 둘은 이브라힘의 영지인 발흐를 공격하였고, 후세인은 이를 격퇴한 후 장남 바디 올 자만을 아스타라바드에서 발흐 총독으로 이관시켰다. 하지만 바디 올 자만은 자신의 아들 무함마드 무민이 후임 아스타라바드 총독으로 선임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후세인은 장남과 장손을 모두 패배시키며 반란을 진압하였고, 비록 후자를 처형했지만 바디 올 자만과는 화해하였다. 하지만 바디 올 자만이 1499년 재차 헤라트를 포위하는 등 휴전은 제대로 엄수되지 못하였다.

2.5. 사망과 이후

1494년 약 25년간의 통치 끝에 사마르칸트의 술탄 아흐마드, 페르가나의 우마르 샤이크가 연이어 사망하며 트란스옥시아나는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이 이끄는 우즈벡 칸국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그럼에도 아부 사이드의 후손들은 골육상쟁을 멈추지 않았고, 1501년 샤이바니 칸은 바부르로부터 사마르칸트를 빼앗았다. 우즈벡 칸국이 호라산과 접경하게 되며 적과 마주하게 된 후세인은 연로한 탓에 바부르의 설득에도 한동안 출정하지 않았다. 다만 우즈벡 족이 습격을 지속하자 마침내 결심하여 1506년 5월, 군대를 모아 출정하였다.

하지만 출정 직후 바바 일라히에서 사망하였고, 사후 두 아들 바디 올 자만과 무자파르 후세인이 헤라트의 지배권을 다투었다. 후세인을 돕기 위해 출정했던 바부르는 적을 앞에 두고도 형제끼리 내전을 벌이는 것을 보고 지켜낼 가망이 없다 여겨 철수하였다. 그리고 1507년 샤이바니 칸은 헤라트를 점령하였고, 형제는 도주하였다. 무자파르 후세인은 객사하였고, 사파비 제국에 의탁한 바디 올 자만은 1510년 이스마일 1세의 호라산 원정에 동참하여 샤이바니 칸에 대한 복수를 이룬 후 오스만 제국에 잡혀[3] 1514년 코스탄티니예에서 눈을 감았다.

[1] 당시 아스트라바드 ~ 산자르는 자한샤, 발흐는 아부 사이드, 아비바르드는 알라 앗 다울라, 헤라트는 이브라힘, 투스와 이마드 성채는 샤 마흐무드 미르자, 메르브는 술탄 산자르 미르자, 시스탄-파라흐-이스피자르는 말리크 카심 빈 아미르 이스칸데르가 다스렸다[2] 비록 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 모두 통용되었지만, 주요 문학어는 역시 페르시아어로 남았다.[3] 셀림 1세타브리즈 점령하자 포로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