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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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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람의 옛 영묘들

1. 개요2. 역사
2.1. 중세2.2. 카자흐 칸국2.3. 근현대

1. 개요

카자흐어: Sairam / Сайрам

카자흐스탄 남부의 도시. 심켄트 동쪽 10km 지점의 평원의 (시르다리야의 지류인) 아리스 강변에 위치한다. 현재는 인구 3만 2천에 불과한 심켄트의 위성 도시에 불과하지만, 전근대 시기까지 일대의 중심지였다.

옛 지명은 이스피자브로, 1999년에 도시 창건 3천 주년을 기념할 정도로 유서 깊은 곳이다. 호라산 지역과 가까운 덕에 카자흐스탄 최고의 도시이자, 첫 모스크가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시내에는 중세 영묘와 미나렛 등 여러 유적이 남아있다.

소련 시절 크게 개발된 심켄트와 달리 사이람에는 전통적인 진흙 벽돌 건물들이 주를 이루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우즈베키스탄과 멀지 않고, 역사적으로도 주로 우즈벡 영향권 하에 있었기에 주민 구성도 우즈벡인이 95%로 절대 다수를 이룬다.[1]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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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의 오트라르라 마찬가지로 정주, 유목 문명의 경계에 입지하여 먼 옛날부터 도시가 형성되었다. 20세기의 발굴에서 아프라시압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초기 페르시아 제국 양식의 배관이 발견되었다. 조로아스터교 경전 아베스타에서 언급된 사이리마가 이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2.1.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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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사만 왕조기에 세워진 모스크의 미나렛 유구

중세 시기 이스피자브로 불렸고, 642년 서돌궐 제국의 카간이 내전 기간에 피신한 것으로 역사 기록에 등장했다. 한편 그 시기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이 망명해 정착하였고, 불교도 역시 적지 않았다. 실크로드의 거점으로 번영하던 도시에는 8세기부터 호라산 무슬림들의 선교가 이루어지다 766년 첫 이슬람 군대가 당도했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이스학 (혹은 이삭-바브)과 압둘 아지즈가 이끄는 이슬람 군대가 당도, 현지 네스토리우스파 주교 나히바르에 개종을 권유했다 한다. 하지만 후자는 7대에 걸쳐 내려온 신앙의 정통성을 강조하며 항전 의사를 밝혔고, 3일간 밤낮으로 이어진 전투에서 무슬림 1만 5천과 기독교도 1만이 전사했다 한다. 결국 사이람을 점령한 이스학은 성수로 세정한 초석을 손수 놓아 카자흐스탄의 첫 모스크가 될 금요 사원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 도시는 재차 튀르크 인들에게 넘어갔다가, 840년 사만 왕조의 누흐 빈 아사드가 점령하고 튀르크인들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성벽을 둘렀다. 9-10세기 이스피자브는 사만 조의 국경 요새이자 천산북로의 번성하는 교역 도시로 발전했다.[2]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출신 상인들은 각자의 카라반사라이를 두었고, 호라산과 서역을 잇는 대상들이 오갔다. 한편, 사만 조 하에서 이스피자브는 상당한 자치를 부여받아 현지 튀르크 호족들은 군사력과 공물을 제공하고 주군의 이름을 주화에 새기는 것 외에는 간섭을 받지 않았다. 당시 이스피자브의 시가지는 샤쉬 (타슈켄트) 일대의 주요 도시 바나카트의 1/3 규모였고, 일대의 다른 도시들처럼 코한데즈 (시타델) / 마디나 (도심) / 라바즈 (외곽)로 나뉘었다. 마디나에는 행정 치소인 다르 알-이므라 (총독궁), 금요 사원, 감옥 등이 있었다. 모든 건물은 진흙 벽돌로 지어졌고, 4개의 성문에는 부하라 및 사마르칸트에서 모집된 가지 (전사)들이 배치 성탑들이 있었다 한다. 당대의 지리가 알 마크디시에 의하면 인근 루두의 튀르크 왕공이 공물을 바치는 등 이스피자브는 카자흐 스텝에 대한 영향력을 지녔다고 한다.[3]

이슬람권과 (비무슬림) 튀르크권의 경계에 있던 이스피자브는 980년, 첫 튀르크 무슬림 왕조인 카라한 칸국에게 점령되었다. 카라한 조의 시기의 도시는 오우즈 튀르크와의 국경 요새로 기능하였다.[4] 11세기 카라한 조의 분열 이후에는 동카라한 조에 속하였고, 화폐 주조소가 있었다. 카라한 조와 카라키타이 (서요)의 통치기에 지명은 점차 튀르크계 어원으로 보이는 사이람으로 변하였다. 그러던 1211년, 쿠출룩의 찬탈로 인해 서요의 봉신에서 벗어나 트란스옥시아나를 석권한 호라즘 제국의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는 쿠출룩 정권과의 완충지 설정을 위해 오트라르 (파라브) 너머의 땅들을 초토화시켰다. 이로써 교역로가 차단되어 어려움을 겪던 사이람은 1219년, 칭기즈칸의 딸 알라가이에게 점령되었다.

군중의 칭기즈칸의 초청을 받은 도교 법사 구처기 (장춘진인)인 1220년 초엽 산동에서 출발해 쿨자, 제트수, 탈라스를 거처[5] 1221년 11월 사이람에 당도했다. 후일 귀국 후 그의 제자들이 집필한 여행기인 '장춘진인서유기'에서 사이람은 상세히 묘사되었다. 1223년에는 호라즘 원정을 마친 칭기즈칸이 사이람에 주둔하며 아들들의 합류를 기다렸다. 몽골 제국의 역참제로 정비된 교역로는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20세기 초반보다도 여건이 좋았고, 사이람은 다시 실크로드 무역으로 번영했다. 집사로 유명한 14세기의 학자 라시드 앗 딘 시난은 사이람이 '카리 사일람' (오래된 사이람)으로도 불리며, 성문만 40개에 달하여 시가지를 지나는 것만 하루가 걸리는 대도시로 묘사하였다.

티무르 제국기에도 사이람은 중요한 국경 도시였고, 아미르 티무르는 손자 울루그 베그를 그 총독으로 봉하였다. 1404-05년의 겨울, 티무르의 명나라 원정군 중 우익이 사이람 & 타슈켄트 & 바나카트에 주둔하였다. 다만 원정군은 1405년 초 오트라르에서 티무르가 사망하자 회군하였다. 티무르 사후 동쪽의 모굴리스탄 칸국은 사이람을 노려 1410년에 포위했으나 격퇴되었다. 한편 명나라의 영락제는 1414년, 1416년, 1420년 세 차례에 걸쳐 진성 (陳誠)을 필두로 하는 사절단을 사마르칸트의 티무르 궁정으로 파견했다. 그가 집필한 서유번국지 (西域番國志)에서도 사이람은 큰 도시로 묘사되었다.

2.2. 카자흐 칸국

다만 15세기 후반 티무르 제국의 쇠퇴와 함께 모굴리스탄 칸국의 아미르 미르 학크 베르디 베키체크의 습격에 시달렸고, 결국 15세기 말에 점령되었다. 1496년, 모굴리스탄의 유누스 칸은 자신의 아들에게 사이람을 영지로 주었다. 그리고 1503년 우즈벡 칸국의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이 일대를 점령했다. 이후로도 카자흐, 칼미크 부족 등이 침공해오다가 1512년, 주민들은 카자흐 칸국의 카심 칸이 당도하자 그에게 도시를 넘겼다.[6] 이후 카자흐 부족들은 사이람을 근거지로 하여 남쪽의 페르가나를 약탈했고, 이에 1522년 만수르 칸의 우즈벡 군대가 사이람을 공략했으나 격퇴되었다. 이로써 사이람은 카자흐 칸국령으로 확장되었다.

한동안 이어지던 평화는 17세기 후반, 오이라트를 통합한 준가르의 갈단 보슉투 칸의 침공으로 인해 깨졌다. 1681년 등 수차례 시도한 끝에 1683년, 쩨왕 랍탄이 이끄는 준가르 군은 사이람을 함락하고 대대적으로 파괴하였다. 카자크 칸국이 수복한 후, 사이람은 칸과 상인들의 후원으로 서서히 재건되었다. 18세기 초엽, 도시는 재차 준가르가 침공하자 카자크 칸국이 물러난 후 오이라트의 일원인 칼미크 부족령이 되었다. 사이람, 튀르키스탄, 타슈켄트을 통치하던 칼미크 부족은 1758년 청나라의 공격으로 준가르가 와해되자 축출되었다. 그리고 1810년, 우즈벡계 코칸트 칸국이 사이람을 점령했다. 1820-21년, 현지 카자크 인들은 정주민들과 함께 봉기했으나 진압되었다.

2.3. 근현대

이후 쇠퇴한 사이람은 1864년 러시아 제국령이 되었을 시기에 이미 서쪽의 심켄트에 밀려나 있었다. 비록 정치, 경제적으로는 밀렸지만 여전히 사이람에서는 곡물 및 마시장이 열렸다. 소련 시기 인근에 몇몇 새 마을이 들어섰으나 큰 변화는 없었다. 1920년대 투르키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했다가,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거쳐 현 카자흐스탄에 이른다.


[1] 카자흐인은 3%, 러시아인이 1%를 이룬다[2] 알 마크디시에 의하면 사만 조가 유목민들을 막기 위해 만든 성채 (리바트)는 이스피자브를 포함해 1700개가 넘었다 한다.[3] 혹은 그저 사만 조에 보내는 공물을 이스피자브로 보낸 것일 수도..[4] 출처: 알 이스타크리. 카를룩과 오우즈의 경계[5] 추강은 목재 다리, 탈라스 강은 석재 다리로 건넜다고.[6] 바부르는 카심 칸이 30만을 거느리고 존경 받는 인물이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