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3 02:22:59

효성헌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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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경황태후 | 崇慶皇太后
파일:효성헌황후.png
출생 1693년 1월 1일
사망 1777년 3월 2일 (향년 84세)
북경 자금성 자녕궁
(現 베이징시 둥청구 징산첸제4호)
능묘 태동릉(泰東陵)
재위기간 청 격격
1704년 ~ 1723년 2월 18일
청 희비
1723년 2월 18일 ~ 1730년
청 희귀비
1730년 ~ 1735년 10월 18일
청 황태후
1735년 10월 18일 ~ 1777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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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86a><colcolor=#FFD700> 성씨 니오후루(鈕祜祿)
부모 부친 니오후루 능주
모친 팽씨
배우자 세종 옹정제
자녀 1남
관저 영수궁(永壽宮) → 경인궁(景仁宮)
→ 수강궁(壽康宮) → 자녕궁(慈寧宮)
민족 만주족 양백기
→ 만주족 양황기
봉작 격격(格格) → 희비(熹妃) → 희귀비(熹貴妃) → 숭경황태후(崇慶皇太后)
시호 효성자선강혜돈화성휘인목경천광성헌황후
(孝聖慈宣康惠敦和誠徽仁穆敬天光聖憲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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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옹정제의 서후(庶后)이자 건륭제의 생모. 만주 양황기 사람으로, 종 4품 사품전의 벼슬에 있던 니오후루 능주(凌柱)의 딸이었다. 고조부는 어이두(額亦都)의 백부인데, 어이두는 청나라 개국공신으로서 누르하치의 최측근 부하이자 매제이자 사돈이었고 홍타이지의 장인이었으며 보정대신 어빌룬(遏必隆)의 아버지이자 강희제의 두번째 황후 효소인황후의 조부였다. 즉 효성헌황후는 효소인황후의 9촌 조카뻘이 된다. 이렇듯 만주족 최고 명문가의 후손이었으나, 부친은 관직도 높지 않고 권력이나 재력 모두 대단치 못했던 듯하다.[1]

아버지의 관직이 높지 못했기 때문에 13세에 옹왕부의 격격으로 들어왔으며 측복진 이씨(훗날의 제비 이씨)의 시녀로 일했다가 옹정제의 눈에 들어 격격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2] 그러던 중 옹정제의 병을 간호하다가 옹정제의 눈에 띄어 임신, 1711년에 훙리를 낳았다. 훙리가 강희제와 옹정제에게 귀여움을 받아 총애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름대로 대우받았다.

옹정제가 즉위했을 때 후궁으로 올라가며 희비 칭호를 받았고 1730년에는 희귀비로 봉해졌다. 효경헌황후 사후에 후궁을 통솔하다가 이후 아들 훙리가 건륭제가 된 덕에 성모황태후로 즉위했고 숭경황태후(崇慶皇太后) 봉호를 받아 거처도 자녕궁으로[3] 옮겼다. 아버지도 일등승은공으로 올랐다.

자신의 유일한 자식인 아들 건륭제를 매우 아꼈으며 건륭제도 생모에게 정말 효성을 다했다. 그런 덕에 모자관계는 각별했고 효성헌황후는 아들로부터 온갖 화려하고 값비싼 귀중품들을 셀 수 없이 선물받았다. 생일에는 건륭제가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답고 즐거운 잔치가 열어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었는데, 그 호화로움을 수많은 사람들이 회자할 정도였다.

또한 아들 건륭제와 함께 전국의 명소를 찾아 효도여행을 수 차례 떠났는데, 이때도 건륭제가 어머니에게 정성을 다하여 대접했다. 효성헌황후가 후일 나이가 들어 건강이 좋지 못해 멀리 여행하기가 힘들어지자, 건륭제는 그가 즐기던 남순까지 중단하며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였던 강소성 소주의 거리를 청의원[4]에 특별히 재현해주었다. 그야말로 청나라에서 가장 복 많은 여인. 아들뿐만 아니라 손자, 손녀들도 아꼈는데 그중에서 효심이 깊었던 손자 가경제 영염을 기특하게 여기며 가장 아꼈다.

이후 편하게 복을 누리며 살다가 1777년에 향년 84세로 생을 마감했다. 청나라의 모든 황후 중 가장 장수한것이며 동시에 성모황태후 중에서 가장 장수한 황태후다.[5] 당시의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매우 장수했다.[6] 효성스러운 아들이었던 건륭제는 어머니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고 어머니의 장례를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루며 생모를 효성헌황후로 추존하고 옹정제의 태릉에 합장했다.

건륭제의 생모가 전씨, 혹은 진씨로 기록도 존재하며 건륭제 황자 시절에는 전씨, 황제 등극 시절에는 니오후루씨로 기록되었다는 설도 존재한다.[7] 다만 사학자들은 이에 대해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상상이 빚어낸 근거없는 야사'라는 입장이다.

여담으로 효성헌황후의 초상화는 그녀가 60세가 되었을때 그린것이다.

2. 미디어 믹스

2.1. 옹정황제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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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황제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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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운명의 사랑:궁

여주인공 능진의 모티브로 보이며 후속작인 궁정계에서는 태후로 등장한다.

2.4. 여의전

<colbgcolor=#18223d><colcolor=#ffffff> 후궁여의전의 등장인물
뉴호록 견환
파일:niuhuliu shi.jpg
캐릭터명 숭경황태후 뉴호록 씨 崇慶皇太后 鈕祜祿 氏
배우 우군매
거주지 영수궁 → 수강궁 → 자녕궁
품계 옹정제 희(熹)비 → 옹정제 희귀비 → 성모황태후
가족 남편 옹정제 애신각라 윤진, 자녀 건륭제 홍력[8], 단숙장공주 항착, 유숙장공주 항제

전작의 견환과는 다른 인물. 뉴호록씨라고만 나오지 이름은 안 나오는데 팬들은 편의상, 그리고 애정상 견환이라고 부르는 듯. 작가는 뉴호록씨와 견환은 같지 않다고 밝혔고 팬들도 둘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소하지만 전작의 견환이 고양이를 두려워하는 것과는 달리, 여의전 태후는 고양이를 안고 쓰다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오라나랍 의수의 존재를 지우고 그 공을 의수의 언니[9]에게 몰아넣어 의수의 자살에 일조하기는 했지만, 전작에서 등장한 친자식들인 6황자 홍염이나 롱월공주, 령서공주, 심복인 근석은 존재하지 않고 몽고로 시집간 단숙장공주와 장친왕이 양육하는 유숙장공주를 두고 있으며 두 딸을 위해서, 그리고 뒷방 늙은이가 되지 않기 위해 후궁에 강력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다. 사실상 최종보스. 딸이 둘인 것은 장친왕의 적장녀이자 옹정제의 양녀인 화석단유공주[10]를 둘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 견환이 극 후반부에 이르러 황제를 증오하게 된 것과 달리, 여의전의 희귀비는 옹정을 사랑했던 것 같다.[11] 실제 역사에서 단유공주는 몽고 과이심의 군왕 박이제길특 제묵특다이제[12]에게 하가했고 건륭 19년에 죽었다.

겉보기에는 역사상 건륭제와 효성헌황후의 관계처럼 사이 좋은 모자로 보이지만, 사실 둘의 관계는 미묘한 편이다. 옹정황제의 여인에서처럼 홍력은 열하 행궁의 궁녀 이금계[13]가 낳은 황자로, 옹정제[14]에 의해 뉴호록 씨의 소생이 되었기 때문. 홍력은 미천한 신분이라 황제의 생모임에도 태후가 되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고, 뉴호록 씨를 진정한 어머니로 여기지 않는다. 이렇듯 미묘한 갈등은 1권에서부터 드러나는 데, 본래 선황이 죽으면 태후는 자녕궁에 거처해야하지만 홍력이 자녕궁으로 옮기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 뉴호록 씨는 태비들이 머무는 수강궁에 살고 있었다. 나중에 여의의 설득으로 자녕궁에 옮기라는 어명이 내려오기는 했지만.

후궁의 세력이 한쪽으로 집중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온갖 공작을 꾸미고, 후궁들 간의 갈등과 분란을 교묘하게 조장한다. 홍력이 자신을 어머니로 여기지 않고 자기 사람들을 불임으로 만드는 줄 다 알았지만 도리어 상대를 속이고 자신의 말로 이용한다. 홍력이 병에 걸렸을 때 '어냥'을 불렀는데, 랑화는 홍력이 친어머니를 찾는 줄 눈치챘지만 태후에게 황어냥을 찾는다고 둘러대었다. 하지만 태후는 제여가 알려주었기에 사실을 알고 있었다. 후궁은 사실상 홍력과 태후의 바둑판이나 다름없다. 태후가 된 후로도 암투를 벌이고 누군가를 이용해야 하는 자신이 독하다는 자각은 있으나 딸들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정당화한다.

여의를 이용하기 위해 도와주는 편이다. 여의를 냉궁에 보낸 것도 사실은 살려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여의가 냉궁에서 목숨을 위협받자 직접 냉궁으로 찾아갔는데, 선제가 살아있을 적에 냉궁으로 쫓아낸 길태빈이 태후를 죽이려다 여의가 태후를 구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여의를 신뢰하게 된 것처럼 보였으나 여전히 여의를 경계한다. 드라마에서는 유숙장공주가 과이심부에 시집 갈까 노심초사하는 상황에서도 여의의 도움은 받지 않으려 했고, 효현황후가 죽자 세 황자녀를 낳은 순귀비 소록균을 황후로 추천했다.[15]

드라마 초반부에서는 오라나랍 황후의 질녀인 여의를 미워하여 복진 간택에서 홍력이 여의를 적복진에, 랑화를 측복진에 천거하자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격노했다.[16]이후 오라나랍 황후가 몰락하고 옹정제가 붕어하자 대놓고 여의를 핍박한다. 태후가 장례 중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는 랑화와 희월의 시중은 받으면서 여의가 권하는 음식은 거부하고, 그로 인해 여의가 뜨거운 그릇을 받쳐들고 있다가 손가락을 데기도 하였다. 그런데 초반부 태후의 모습은 원작 소설과 다소 다르다. 드라마 옹정황제의 여인 후반부의 내용을 상당히 옮겨온 원작 소설과 달리, 드라마 여의전에서는 오라나랍 황후와 희귀비의 갈등이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둘은 서로를 맹렬히 적대하기는 하나 그 원인이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고, 순원황후에 해당하는 옹정제의 초취 오라나랍 씨의 존재도 언급되지 않았다. 물론 실제로 옹정제의 황후는 그가 어린 시절 적복진으로 맞이하고 사이에서 대황자 홍휘를 얻은 효경헌황후 한 사람이다. 그러나 드라마 견환전에서는 옹정제의 황후가 원배 황후 오라나랍 유칙, 즉 순원황후와 계황후인 오라나랍 의수 두 사람이었던 것으로 설정하였다. 이후 죄상이 드러난 의수는 홍력이 황위를 이은 후에도 선제의 정처로서 태후에 추봉되지 못한다. 대신 의수가 황후였던 세월조차 순원황후의 치세로 기록하고, 의수의 공적을 모두 순원의 것으로 기록하는 기록말살형에 처해진다. 여의전 원작 소설에서는 오라나랍 황후가 여의에게 “선제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내 모든 덕행을 선제의 복진이었던 내 언니에게 돌리고, 황후는 그녀 한 사람으로 삼는다고 한다. 나는 죽어서 이름 없는 비빈으로 매장될 거라는군.”이라고 말함으로써 견환전 드라마의 설정을 이었다. 극중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이유로 오라나랍 씨와 뉴호록 씨가 심하게 적대하며, 여의에 대한 뉴호록 씨의 미움도 소설보다 깊다. 소설에서 효경황후, 계황후, 여의(청앵) 세 사람을 구분할 줄 안다고(계황후에 대한 미움을 여의에게 전가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달리 드라마의 뉴호록 태후는 여의에게 고모의 3년상을 치르라며 잠저에서의 입궁을 막고, 처음부터 측복진으로 시집 온 명문가 출신의 여의에게 높은 직위를 내리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는 양첩에 해당하는 여의에게 서첩[17] 격인 귀인의 지위를 내리려고까지 한 나머지 황제와 태후의 중간에서 황후 부찰 랑화가 고생했다.

단숙장공주가 곁에 돌아온 후로는 더 이상 권력욕을 보이지도, 홍력과 대립하지도 않고 행복하게 산다. 드라마에서는 여의가 위연완의 위협으로부터 12황자 영기를 지키고자 태후에게 양육을 맡겼고, 홍력과도 (양모자이긴 하나) 모자지간의 정을 확인하는 장면이 나왔다.

영기가 죽었을 때 “5영기는 이제 가고 없어. 그래도 아직 다른 애들이 있지 않나. 걔들을 돌봐야지”라며 홍력을 위로한다.

홍력이 여의를 폐위시킬려고 할 때 “여의를 후궁으로 들이시는 것도 반대하셨으면서 왜 이제 와서 폐위를 말리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옆에서 “나도 여의가 정말 싫었다. 하지만 그건 여의의 고모인 경인궁 황후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여의를 반대했던 것이 경인궁 황후 때문이었다면 지금은 황제 너 때문에 여의를 폐위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그리고 이건 너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라며 여의의 폐위에 반대한다.

또한 여의가 기녀들을 처벌한 것이 과했다고 홍력이 토로하자 “황후가 한 것이 과하다고 생각하나? 애가가 여의였다면 그 년들을 찢어서 성벽에다 걸어놨을 것이야!”라며 홍력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18]

여의 사후, 연완을 유페시켜 놓았을 때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나이가 들어 흰머리가 된 상태. 태후는 홍력에게 “ 7공주와 9공주도 시집을 가 떠났다. 이제 궁에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 미친 여자는 이제 죽을 때가 됐다.”라며 연완을 죽이라고 종용한다.[19]

2.5. 연희공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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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친이 니오후루씨인 것만 해도 그 황자는 다음 황위 계승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비록 방계에 속했지만, 다른 황자들은 모두 한족 생모 태생이었기 때문에 만주족 출신이라는 것만으로도 큰 이점이었다. 물론 뉴호록씨에 훨씬 가문이 좋았던 온희귀비의 황자 돈군왕 윤아가 있긴 하지만 워낙 멍청해서 태자 후보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2] 사실 왕부의 시녀는 하오기의 포의들로 구성됐기에 당시 만주 양백기 기인이였던 효성헌황후가 시녀로 들어왔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이는 아마 격격 전씨 설이나 열하행궁의 궁녀 이씨 설에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3] 청의 황태후들이 거주하는 궁궐이다.[4] 지금 이화원의 전신.[5] 참고로 모후황태후 중에서는 효혜장황후가 가장 장수했다.[6] 태후로만 40년을 넘게 지냈고, 사실 중국에서 이정도면 태황태후까지 올라가는 일이 허다했지만, 아들인 건륭제가 보통 장수한 그게 아니니..[7] <영헌록>에 '측복진 전씨가 희비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8] 친자가 아닌 양자이며 친자식은 단숙장공주와 유숙장공주 뿐이다. 실제 역사에서 뉴호록 씨의 소생은 건륭제밖에 없지만, 여의전에서 홍력의 생모는 열하 행궁 궁녀 이금계로 설정되었다.[9] 순원인지 아닌지는 정확하지 않다. 원작에서 의수가 '선황의 죽은 복진인 내 언니'라고 언급하기는 하였다.[10] 원래는 옹정제의 심복이자 강희제의 16황자인 장친왕 윤록의 장녀이다. 참고로 옹정제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마저도 일찍 죽어 강희제의 폐태자 이밀친왕 윤잉의 딸인 화석숙신공주, 동생인 이친왕 윤상의 딸인 화석화혜공주, 장친왕 윤록의 딸인 화석단유공주를 양녀로 들였다.[11] 소설에서는 태후가 선제를 그리워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선제에 대한 그리움보다 경쟁 상대였던 오라나랍 황후를 누르고 유일한 황태후가 되는데 주력하며, 계황후로 거론되는 한귀비 오라나랍 여의와의 대담에서 선제에게 진심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속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12] 작위는 자사그 보두얼러거타이 군왕. 보면 알겠지만 태평천국의 난2차 아편전쟁당시 만몽팔기 지휘관인 승격림심의 6촌 할아버지다.[13] 이태빈으로 추존된 듯.[14] 후궁여의전에는 장풍의가 옹정제로 특별출연한다.[15] 청나라의 황후가 되려면 만군기 상삼기여야 했으며 소록균은 한족 출신에 팔기에도 못 드는 민인이였다. 애초에 소록균은 황후로 추천 할 수가 없으며 만주족인 오라나랍 여의, 엽혁나랍 의환만 황후가 될 수 있었다.[16] 다만 원작 소설에서는 청앵을 측복진으로 맞아달라고 한 것이 태후이다.[17] 빈 이상부터 자기 소생을 직접 양육할 수 있고, 자신을 본궁이라 지칭 할 수 있으며 노비들에게 냥냥으로 불릴 수 있고 한 궁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최소 조건이 된다. 빈 미만의 귀인, 상재, 답응, 관여자 등은 가문이 한미하거나 새 황제가 즉위하고 황실이 안정된 후 새로 간택 된 어린 후궁들이 대부분으로, 주인 있는 궁의 편전에서 더부살이하며 ‘소주’로 칭해진다.[18] 태후가 화날 만도 하다. 황제가 일반 여인들도 아닌 천민 기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처벌했다고 황후에게 화를 냈으니(…) 만약 여의가 아닌 랑화나 옥연, 희월, 해란이 황후였다면 그 기녀들은 물론이고 구족이 찢겨 죽을 것이 뻔하다.[19] 어찌 보면 태후가 자신과 여의의 마지막 복수를 한 셈. 태후 역시 연완에 의해 며느리들과 5명의 손주들을 잃었다. (5황자, 10황자, 13황자, 5황녀, 6황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