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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콩과 오키나와의 관계를 서술한 문서. 관련 논문2. 역사적 관계
2.1. 아편전쟁 이전
자세한 내용은 청-류큐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중국-오키나와현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
명나라와 청나라 시절에 류큐와 다양한 교류가 있었으나 그건 중국과 류큐의 교류였지, 홍콩과 류큐의 교류는 아니었다. 홍콩과 류큐의 본격적인 교류는 영국령 홍콩부터 시작된다.
2.2. 영국령 홍콩
청나라와 영국 간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해 1841년 광저우 남쪽의 작은 어촌이던 홍콩 섬이 영국 해군에 의해 함락당했다.당시 영국 해병대가 현재의 홍콩 섬 북단에 상륙, 이렇다 할 방어병력도 주민도 없던 무주지인 이 섬을 처음 점령한 후 빅토리아 시티(Victoria City)[1]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현재의 센트럴이 그 곳이다.
이후 1842년에 체결된 난징 조약에서 아편전쟁의 전리품으로 정식으로 영국에 양도된다.
그렇게 중국이 아닌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된 홍콩은 류큐와 딱히 교류는 없었으나, 지리적으로 주목을 꽤 받았다.
2.3. 일치시기
그러나 영국령 홍콩 수립 후 별로 지나지 않아 류큐 왕국은 일본 제국의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어 교류는 다 사라졌다. 그런데…홍콩마저도 2차세계대전 중 일본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물론 일본의 패전으로 얼마 후 홍콩은 다시 영국령, 오키나와는 승전국인 미국령이 되었다.
2.4. 21세기
이후 홍콩과 오키나와 모두 중국과 일본에게 반환을 당했으며, 딱히 이렇다 할 교류는 없는 상태다. 단지 홍콩의 민간인이 오키나와의 독립을 지지하고, 오키나와의 민간인이 홍콩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정도.3. 반일감정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이 홍콩에 저질렀던 만행 때문에 홍콩인과 오키나와인 모두 일본과 감정이 좋지 않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4. 지리적 관계
사실 역사적 관계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홍콩과 오키나와의 관계가 주목받는 이유가 있으니… 바로 지리적 관계.4.1. 공통점
우선 홍콩과 류큐는 모두 흑조 문명 지대 내에 있다.[2] 그 당시, 카사바와 얌과 같은 작물은 필리핀에서 대만, 류큐에서 규슈로 이어지는 쿠로시오 해류와 함께 북쪽으로 항해했고, 동남아시아 북부의 기장과 같은 작물은 남해를 통해 대만으로 항해했으며 중국의 양쯔강 남쪽에서 한국을 거쳐 규슈로 가는 쌀 경로와 함께,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에서 두 개의 중요한 해상 문화 교류 경로였다.그러나, 3세기까지, 양쯔 남쪽에서 일본 중부로 가는 직항 노선과 중국 북서부의 장안에서 중앙 아시아까지의 실크로드, 그리고 광저우에서 인도로 가는 운송 노선이 앞서 언급한 노선을 대체했다. 그 결과, 홍콩과 류큐 제도는 약 천 년 동안 국제 무대에서 고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