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19 12:56:50

해수구제사업

害獸驅除事業
실제로 전 한반도서 해방후 멧돼지나 고라니정도를 제외하고는 호랑이 표범 곰 사슴 등은 희소하다기보다는 거의 절멸에 가까운 상태이며 남한에서는 호랑이와 사슴이 절멸된 것이 분명하다.
일제는 해수구제란 명분으로 포유동물에 대해서는 이나마의 기록을 남겼지만 그들의 총구는 전혀 피해의 대상이 아닌 조류에게도 무자비한 불을 뿜었다.
일일이 다들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겨울에 들과 강에 수천 수만마리의 때로 날아와 살던 두루미 황새 고니 등등에게도 이때에 이미 절멸의 그늘이 드리워졌던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1]왜인들은 풍류랍시고 두루미의 다리를 잘라 이른바 학슬장(鶴膝杖)이라는 것을 만들어 짚었고 박제를 장식하여 거드름을 피웠던 것이다.
풍요로웠던 야생의 왕국을 불과 반세기동안에 이다지도 짓밟힌 것은 통탄스럽기 그지없지만 그로부터 반세기동안에 우리 스스로는 또한 어떠했는가. 각설하고 이제나마 중요한 것은 우리의 반성과 각성일 것이다.
자연이란 한번 파괴하기는 쉬워도 그 회복은 쉽지도 않을 뿐더러 영영회복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생태계가 허물어지고 그 숨소리가 끊긴 강산은 더 이상은 금수강산이 아니다.
-『韓國動物園八十年史 昌慶苑編』, p. 198
우리는 일제 시대나 그 당시에 빚어진 민족적 비극을 원료나 노동력의 수탈 또는 민족적 자존심의 훼손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미 그 당시에 엄청난 생태계의 파괴가 이뤄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만 그것이 그 당시로서는 가시적이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끔찍스럽고 치명적인 착취였던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야생동물지』 p. 7
1. 개요2. 일제강점기 이전 한반도의 동물상과 자연 환경 변동
2.1. 호랑이와 표범
2.1.1. 조선시대의 포호정책2.1.2. 가죽을 통한 개체수 추정
2.2. 백두산사슴과 대륙사슴
3. 엔도 키미오의 기록 수집4. 수렵규칙과 수렵면장5. 조선인·일본인의 총기 소지 비율6. 실질적 시행 이유7. 관련 일화
7.1. 야마모토 타다사부로의 원정사냥 『정호기』7.2. 대덕산 호랑이
8. 당대 학자·관련자들의 우려9. 구제의 부산물10. 호랑이와 표범의 포획 두수11. 집계된 수해(獸害)와 포획된 야생동물 개체 수 관련 표
11.1. 총독부 발행 『조선휘보』 1918년 8월호 『조선에서 맹수피해 및 그 예방구제』(1915년~1916년)11.2. 월간지 『조선』 1926년 1월호 『호랑이와 조선』(요시다 유지로(吉田雄次郎))(1919년~1924년)
11.2.1. 조선에서 호랑이, 표범에 의한 피해 통계11.2.2. 조선에서 호랑이, 표범의 지방별 포획수
11.3.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쇼와 17년(1942)(1933년~1942년)
11.3.1. 해수피해11.3.2. 해수구제
11.4. 『한국동물원80년사 창경원편』 수록. 호랑이와 조선-조선총독부 통계연보 비교 표
11.4.1. 호·표에 의한 인명피해상황11.4.2. 호·표 포획(구제) 상황
12. 참고 문헌

1. 개요

해수구제사업 내지는 해수구제 정책은 일제강점기 시기 조선총독부가 "사람과 재산에 위해를 끼치는 해수(害獸)를 구제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한반도 내 야생동물에 대한 체계적인 보전 정책 없이 야생동물들의 퇴치와 포획을 주도 및 장려한 것을 이르는 표현으로, 시베리아호랑이, 아무르표범 등의 한반도 개체군과 같은 한반도 내 대형 포식 동물 멸종의 주요한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2. 일제강점기 이전 한반도의 동물상과 자연 환경 변동

일제강점기 이전인 조선 시대에서부터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발생한 습지, 삼림의 농경지로의 변화로 인해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과 늘어난 인구 사이의 충돌은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그로인해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한반도의 야생동물상과 자연 환경은 크게 변동되었다.

2.1. 호랑이와 표범

2.1.1. 조선시대의 포호정책

정도전鄭道傳(1342~1398)에 따르면 백성은 하늘이었고,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은 먹을거리였다. 하늘이 하늘로 여기는 것이 식량이었기에 조선은 식량을 가장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경제체제를 지향했다. 조선에서는 이를 농사와 가축 사육이라는 생산 경제 체제를 통해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중농정책을 추진한 이유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논의 면적과 소의 마릿수를 늘리는 일이었다.
곡물의 생산량을 늘리려면 농경지를 더 늘려야 했으며, 더 많은 소를 기르려면 꼴을 베는 땅을 더 많이 확보해야 했다. 청동기시대 이래로 사람들은 언제나 황무지 혹은 산림전택이라 불리던 야생의 공간을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꿈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 왔다.
가용공간을 확장하는 농지개간은 야생의 공간에 생성되어 있던 야생 생태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므로, 한반도 야생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인 범과 표범에 맞서야 했다. 범과 표범은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서식 영역을 지키려 했고, 사람들은 소를 이끌고 야생의 공간에서 농경지를 마련해야 했다. 이로 인해 사람과 소가 호랑이에 물려 죽는 일이 빈번해졌는데, 이를 호환虎患이라 했다. 호환은 경작지를 넓히려는 사람과 서식지를 지키려는 범과 표범이 충돌한 결과였다.
-조선의 생태환경사 p. 31

백성을 하늘로 삼는 민본주의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식량 생산을 위한 농지 개간으로 인해 서식지를 잃은 한반도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인 시베리아호랑이아무르표범이 사람과 충돌하여 인명과 재산에 피해가 발생하는 일이 잦아지자 민본주의를 우선한 조선은 그 초기부터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하는 포호 정책을 강력히 시행해 호랑이와 표범의 숫자를 줄여 나갔는데, 국왕 호위를 담당하는 고급 병종인 갑사 중에서도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하는 것을 전담하는 착호갑사(捉虎甲士)를 양성한 것이 대표적이다.[2]

착호갑사는 태종 16년인 1416년에 그 존재가 처음으로 확인되며 이를 제도화 한 것은 세종 3년인 1421년으로, 초기에는 당번과 하번을 각각 20명 씩으로 나누어 운영하는 정도였으나 갑사의 정원이 늘며 착호갑사의 수도 증가해 성종 16년인 1485년에 이르러 그 수가 440명이 되었고 착호갑사 체제가 완비된 이후에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새로히 생성된 겸사복(兼司僕), 내금위(內禁衛), 우림위(羽林衛) 등 왕의 친위병인 금군도 도성에 나타난 호랑이의 사냥에 앞장설 정도였는데, 특히 세조는 착호대장, 착호위장, 착호장 등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장수를 임명하여 수렵대회를 겸한 군사 훈련인 강무(講武)에서의 사냥을 지휘하게 할 정도였다.[3]

조선은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조직을 설치하여 운영했다. 조직이 마련되기 전에는 지방에서 호환이 발생할 시 군 지휘관이나 고을의 수령이 미리 강무를 통해 호랑이 사냥법을 전수받아 호랑이 사냥에 나서야 했으나 호랑이 사냥법에 따라 운영 방식이 달라져야 했기 때문에 성종은 1472년에 "범을 잡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착호인(捉虎人)을 뽑아 지방 군현에 착호인을 배치하고 함정과 장비를 관리하는 함정감고와 도감고를 설치했으며, 16세기에 들어서는 강무에서 참여한 지방군에게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하는 법과 사냥도구를 만들어 설치하는 법을 가르치는가 하면 국왕이 지방 거주자 중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하는 특이한 사냥법이나 재능을 지닌 이를 수시로 도성에 불러들여 그 방법을 파악하고 지방에 전파시켰다.[4]

착호인의 배치는 주와 부에는 50인. 군에는 30인. 현에는 20인으로 두었는데, 성종 때 제작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군현의 크기에 따라 계산할 시 착호인의 숫자로 경기도에 1,440명. 충청도에 1,350명. 함경도에 1,080명으로 총 9,900여명이 계산되며 한반도의 면적에 맞추어 계산하게 되면 한명의 착호인이 22km2, 사방 5km 정도의 범위를 두고 호랑이와 표범을 쫓는 체제를 갖추게 된 것으로 계산된다.[5]

조선의 포호정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임진왜란 중에 삼수병으로 편성된 1,000여명의 훈련도감 군사 중 조총을 사용하는 병사들을 호랑이 사냥에 투입시키기도 할 정도였으며 숙종 25년인 1699년에는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삼군문에 의해 경기 지역에 호랑이가 출몰할 시 사냥을 담당하도록 하는 사냥 담당 지역을 설정하여 호랑이가 나타난 지역에 따라 투입되는 부대를 달리하는 착호분수제(捉虎分授制)가 시행되었는데, 착호분수제에 의해 파견되는 국왕 파견 포수들이 사냥을 주도함에 따라 호랑이 사냥의 성공률이 매우 높아졌다.[6]

또한 17세기에 들어서 지방의 호랑이 사냥을 위한 조직이 더욱 세밀하게 나눠져 각 면마다는 호랑이 사냥을 주도하는 착호장(捉虎將)을 두고 리마다는 겨울철에 호랑이의 발자국을 쫓는 것을 담당하는 심종장(尋踵將)을 두었다. 문종 즉위년인 1450년에서 영조 41년인 1765년까지 면이 36개, 리가 266개 늘어난 만큼 착호장과 심종장의 숫자도 늘어난 것은 물론, 각 지방의 병영에서도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산포수(山砲手)라 불리는 호랑이 사냥꾼들의 숫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7]

현종 15년인 1674년에 5,000명이던 착호군은 숙종 22년인 1696년에는 1만 1,000여명으로 크게 늘었고, 함경도에서는 18세기까지 7, 000여명의 산포수가 착호군으로 활동했는데 이들은 흥선대원군이 군사력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남병영의 중심 군사가 되어 그 수가 3만여명으로 확대되었으며 이들 산포수는 거주지의 포연대(捕捐隊)에 편성되어 평시에는 호랑이 사냥을 하다 유사시에는 병영의 군사로 동원되었다.[8]

2.1.2. 가죽을 통한 개체수 추정

조선에서는 국초부터 포호 정책의 성과를 확인하고 호랑이와 표범 사냥을 강제하기위해 호피와 표피를 바치도록 했다. 호피와 표피는 범을 잡았다는 명백한 증거로 활용되는 동시에 비싸게 거래되는 상품이었는데, 표범의 가죽인 표피는 무늬가 아름답고 부드러워 시장에서 인기있는 상품이었지만 호랑이의 가죽인 호피는 두껍고 거칠어 깔개나 덮게 정도로나 사용될 뿐. 실질적인 쓰임새가 없어 시장을 통해 유통시키기 어려운 탓에 포호정책의 시행 이유인 호랑이를 사냥하도록 하는데 불리하게 작용하였으나 정부에서는 호피를 바치지 못한 책임자에게 호피값을 시장 가격보다 훨씬 높게 책정하여 거둬들이는 식으로 호피의 인위적인 수요를 만들었다.[9]

인조 11년인 1633년에 전라도 무안현감이던 신즙(申楫)이 국왕에게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모든 고을에 매년 3장의 호피와 표피를 할당해 바치게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계산할 시 조선의 군현은 대략 330여 개였으며 여러마리의 가죽을 이어 붙이거나 한번 제출한 가죽을 연이어 제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호피와 표피가 머리부터 꼬리까지가 완전한지를 확인하고 특정 부위에 도장을 찍어 같은 호피와 표피를 연이어 바칠 수 없게 만드는 제도를 마련하였기에 매년 포획되어야 하는 호랑이와 표범의 수는 약 1,000마리였다.[10]

조선이 건국된지 200여년이 지난 1633년까지 매년 1,000여 마리의 호랑이와 표범을 포획하고도 각 고을에서 연간 3마리의 호랑이와 표범을 포획할 수 있었으며, 16세기 말에 일부 지역에서 숲의 개간과 호랑이 사냥의 어려움으로 인해 호피와 표피의 진상을 감해 달라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17세기 까지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호피와 표피를 마련해 진상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가정하여 호랑이와 표범의 번식을 통한 증식률과 습성, 새끼의 생존률 등을 감안해 매년 1,000마리가 포획되어도 200여년 간 개체수를 비슷하게 유지할 수 있는 개체수를 계산할 시. 대략 4,000~6,000마리 가량의 호랑이와 표범이 조선시대의 한반도에 서식했다는 결론이 나오며, 일제 강점기에 포획된 호랑이와 표범의 비율인 1 : 6.4에서 표범보다 큰 호랑이가 먼저 포획되어 그 수가 줄어들었을 것으로 가정하면 15세기 무렵 호랑이와 표범의 비율은 1 : 4 정도로 추정된다.[11]

그러나 17세기 후반에는 그동안 관행적으로 시행되어 왔던 가죽을 바치지 못하는 고을에 한해 가죽 값에 상응하는 세금을 거워들이는 호속목 제도의 시행을 공인했고, 18세기 후반부터는 호랑이와는 경쟁적 배제 관계에 있던 늑대에 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하여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한반도 내 호랑이와 표범의 개체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12]

2.2. 백두산사슴과 대륙사슴

그렇다면 한반도에 어떤 종류의 사슴이 얼마나 많이 살았을까? 한반도에 살았던 사슴은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에 '대록大鹿'이라고 기록된 순록류와[13] '록鹿'이라고 기록된 꽃사슴류가 있다.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의 〈수렵도〉에서 말 탄 무사가 쫓는 두 사슴은 대록 암수 한 마리 씩이다. 말과 비슷한 크기의 사슴인 대록은 여러 마리가 아닌 암수 한쌍이 짝을 이룬 모습으로 그려졌다. 큰 규모로 무리를 이루는 꽃사슴과는 다른 대록의 생태적 특성이 벽화에 반영된 것이다.
물론 오늘날처럼 종을 분류할 수 있는 학문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라 많은 수의 노루와 고라니들이 사슴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루와 고라니는 떼를 짓지 않고 크기가 사슴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등 생태적 측면에서 어느정도 구분 되었다.
-조선의 생태환경사 p. 51~52

조선 시대 시기까지도 한반도에는 오늘날 서식하고 있는 고라니, 노루와는 다른 사슴이 서식했다. 사슴은 숲과 개활지를 오가는 습성 때문에 많은 농민들에게 목격되고 문인들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했으며, 나라에서는 공물로 사슴가죽과 고기를 요구했다.[14]

군사훈련인 강무에서도 몰이 사냥으로 사슴을 사냥하여 훈련으로 사냥된 사슴의 수가 한 번에 1,000여 마리였고, 100마리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사슴이 서식했으며 강무를 진행하는 장소인 강무장에서는 노루와 사슴을 해치기 때문에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될 정도로 군사훈련을 위해 사슴을 보호하기도 했으나,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강무장 내 사슴의 서식밀도는 현저히 낮아졌다.[15]

다른 사슴류보다 큰 크기로 인해 대록(大鹿)이라고 불린 백두산사슴(Cervus canadensis xanthopygus)은 태종 8년인 1408년에 전라도 해변의 봉수를 지키던 군사들이 틈틈히 해안에 서식하던 개체들을 사냥해 가죽을 진상하고, 세종 4년인 1422년에는 국가의 제사와 시호를 도맡던 관청인 봉상시(奉常寺)에서 경기도 일대에 서식하던 개체 9마리를 사냥해 육장(肉醬)을 만들어 진상했을 정도로 한반도 곳곳에서 서식했다. [16]

그러나 16세기 무렵 백두산사슴의 서식지는 만주를 접하고 있는 삼수갑산(三水甲山)과 개마고원정도로 줄었고, 각 도에서 올라온 대록을 진상하기 어렵다는 하소연을 받아들여 5년간 대록의 진상을 면제하는가 하면 16세기 중후반에는 대록의 가죽 등 진상품을 삼수갑산 등에서 값을 주고 사서 바치게 되자 명종 12년인 1557년 단양군수 황준량(黃俊良)은 대록과 관련된 진상물을 값으로 대신 내는 대가(代價)를 통해 마련하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이후 17세기와 18세기는 백두산사슴이 서식할 수 있는 평지가 농경지와 소들의 사육장으로 개간되는데 이어 17세기 후반 소의 전염병인 우역(牛疫)이 전국을 휩쓴 후 백두산사슴은 거의 절멸에 가까울 정도로 한반도에서 희소해졌다.[17]

동아시아에 서식하는 꽃사슴의 아종으로서 (鹿)으로 불린 대륙사슴(Cervus nippon mantchuricus)의 사정도 비슷하여, 17세기~18세기에는 국가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녹도(鹿島)로 불리는 섬에 사슴을 사육하는 국영 목장을 운영하고 지방의 관아와 개인도 사냥으로 충당할 수 없어진 사슴을 충당하기 위해 직접 사슴을 길러 내기도 했으나 17세기 이후로 빈번히 유행한 우역으로 인해 사슴은 끝내 개체수를 회복하지 못하고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를 거친 이후에는 한반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18]

3. 엔도 키미오의 기록 수집

한국의 호랑이가 절멸한데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1980년서 부터 1985년까지 무려 6년간을 한국에 드나들며 고문헌, 문서동 자료를 지방현지까지 두루 답사한 동물작가 엔도(遠藤公男)의 논픽션 "韓国の虎はなぜ消えたか-한국의 호랑이는 왜 사라졌나"는 한국의 동물상(動物相)을 망쳐버린 일제의 만행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韓國動物園八十年史 昌慶苑編 p.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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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키미오. 서울 가나인사아트센터의 호랑이 민화 앞에서.

일제강점기 시기에 시행되었던 조선총독부의 해수구제정책과 관련된 기록을 수집·발굴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해낸 인물은 일본의 동물문학 집필가 엔도 키미오(遠藤公男)이다.

엔도 키미오는 한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이와테 현에 거주하던 자신의 지인에게서 한국 여행 중 관광버스 가이드가 "얼마 전 야생 호랑이의 사진을 찍은 사람이 나타났다"고 말해줬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을 계기로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한국의 조류학자 원병오(元炳旿) 교수에게서 일전에 멸종되었다고 들었던 한국의 호랑이가 아직 한국에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한국의 호랑이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1980년 2월 초 한국을 방문했으나, 한국을 방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원병오 교수의 형인 원병휘(元炳徽) 교수로부터 호랑이를 촬영했다는 사건이 조작된 사진으로 벌어진 해프닝이라는 진상[19]을 듣고 낙담했지만 "소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호랑이 사냥에 관한 내용을 본 적이 있었다"라는 원병휘 교수의 이야기를 계기로 1980년~85년까지 약 6년간 한국을 방문해 일제강점기 당시의 호랑이에 대한 기록을 수집·조사했다.

그리고 기록 수집 과정의 일화들과 수집된 기록으로 집필되어 1986년에 출간된 서적이 바로 논픽션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로, 이 서적을 통해 해수구제사업의 계기와 포획된 동물의 수에 대한 기록 등이 공개되어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의 한반도 야생동물에 대한 체계적인 사냥이 있었음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한국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는 이후 2009년 한국범보전기금에 의해 번역되어 국내에 출간되었다.

엔도 키미오는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집필 이후 1962년 합천군 오도산에서 포획되어 창경원에서 사육된 수컷 아무르표범 한표가 포획되었던 합천군의 가야마을을 방문하는 등 1960~70년대까지의 한반도 아무르표범에 대한 일화를 수집하여 해방 이후 한반도 표범들의 일화를 다룬 논픽션 『한국의 마지막 표범』을 집필. 출간하였으며, 이 역시 한국범보전기금에 의해 국내에 번역·출간되었다.
한국어 번역판 발간에 즈음한 저자의 서문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가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이항 교수님 덕분에 번역되어 무사히 한국에서 출판된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와 동시에, 출판을 위해 힘을 써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경의를 표한다. 나는 운 좋게도 한국의 호랑이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묻힌 수많은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랑이의 멸종 뒤편에 일제의 무서운 폭력과 무자비함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를 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 호랑이와 표범 등 야생동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파괴는 멈출줄을 모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 적어도 그들의 기록만이라도 후세에 남기고 싶은 마음으로 나는 이 일을 지금까지 해 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일제 치하에 있었을 때, 함경북도의 주을온천에 러시아에서 망명해 온 러시아인 얀코프스키가 살고 있었다. 그는 호랑이 사냥의 명인으로서 유명했으며, 『호랑이 사냥의 반세기』라는 책을 1944년에 하얼빈에서 출판했다. 3마리의 거대한 호랑이를 거꾸로 매달아 찍은 사진이 이 책속에 실려 있어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의 아들이 모스크바 근처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그를 만나러 러시아로 갔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한 후, 얀코프스키 일족이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그곳에서 대부분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0]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나는 『얀코프스키가(家)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써서 2007년에 출간했다. 이것도 한국의 모든 분들이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호랑이의 형제와도 같은 표범은 가야산 국립공원 근처에서 1962년에 마지막으로 생포되었다. 그 당시 서울 창경원으로 옮겨져 11년간 사육사들에 의해 귀중히 사육되었다. 나는 그 표범을 포획한 농가에 머물면서 『한국의 마지막 표범』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다. 한국의 깊은 산속 마을에서 논픽션으로 이 책을 마무리하였다.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있는 소재였으나 아직 일본에서 출판은 하지 않고 있다.

동물작가로서 아직도 매우 부족한 점이 많은 나는 젋었을 때부터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깊은 애절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고통받은 삶을 그려 나가는 것이 적어도 그들을 위한 진혼곡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환경보전과 인류의 미래를 위해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2009년 12월
엔도 키미오(遠藤公男)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5~6

4. 수렵규칙과 수렵면장

1911년, 조선총독부는 야생의 조수는 본래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누구라도 포획할 수 있다는 것을 원칙으로 한 수렵 규칙을 공포하였다. 이후 법정 사냥도구로 사냥을 하는 것은 수렵 기간에 수렵 면허를 받은 인물에 한정하도록 하고 수렵 금지 구역과 일출 전, 일몰 후의 총기 사용금지. 폭발물, 독극물, 총, 함정의 금지 등을 정하였다. 수렵을 금지하는 야생동물 또한 지정하여 독수리, 수염수리, 원앙, 원앙사촌, 호랑지빠귀, 검은지빠귀, 검은담비, 암컷 대륙사슴과 두루미 등의 수렵을 금지했으나, 새끼의 포획은 자유로웠다.[21]

(전략)
모든 매사냥꾼은 매사냥을 위해 허가증을 받아야 하며 이를 위해 7엔을 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사냥하는 것은 보통 산토끼 아니면 꿩이다. 한국에서 매로 꿩을 잡는 것은 11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허용된다.
-한국의 야생동물지 p. 149

수렵 면허인 수렵면장은 그물, 올가미, 매의 사용을 허가하는 갑(甲)종과 총기 사용을 허가하는 을(乙)종으로 나뉘어 있으며 조선 총독부의 수렵 담당 관리인 요시다 유지로가 1914년에 출간한 『조선 수렵 해설』(朝鮮狩獵解設)에 따르면 기본적인 기간은 9월 15일부터 다음해 4월 30일까지, 호랑이, 표범, 곰, 불곰, 삵, 늑대, 멧돼지, 노루를 제외한 동물과 꿩의 포획은 11월 1일부터 다음해 2월 말까지, 수사슴의 포획은 2월 1일부터 4월 말까지로 허가되어 있었으며 갑종의 면장 수수료는 7원, 을종은 20원이었다.[22]

녹용, 곰과 멧돼지의 담낭 등 동물을 사냥해 얻는 약용 재료를 채취하는 것을 허가받는 도지사의 특별 면장도 존재하였는데, 특별 면장의 기간은 1년에 요금은 70원이었다.[23]

5. 조선인·일본인의 총기 소지 비율

메이지 43년 말
(1910)
일본인6,371다이쇼 9년말
(1920)
일본인20,025
조선인39조선인1,627
외국인117외국인305
6,52721,957
다이쇼 원년 말
(1911)
일본인9,431다이쇼 11년말
(1922)
일본인23,084
조선인24조선인2,327
외국인194외국인246
9,64925,657
다이쇼 3년 말
(1914)
일본인14,264다이쇼 12년말
(1923)
일본인25,569
조선인415조선인3,074
외국인229외국인269
14,90828,912
다이쇼 5년 말
(1916)
일본인15,970다이쇼 14년말
(1925)
일본인25,732
조선인805조선인4,097
외국인322외국인271
17,09730,100
다이쇼 7년 말
(1918)
일본인17,167쇼와 원년말
(1926)
일본인25,732
조선인1,734조선인4,547
외국인385외국인289
19,28630,627
민간 소유 총기수(엽총)의 추이 (조선총독부 간행 [통계연보]
쇼와 원년 〈昭和元年(1926)〉에서 - 주요 연도의 수치를 적음.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210

표와 같이 총기를 소유한 일본인과 조선인의 비율은 경술국치가 있었던 1910년에는 163 : 1의 극단적인 수치였고 1년 뒤인 1911년에는 393 : 1로 그 비율이 더욱 극단적으로 변했으나, 15년 뒤 쇼와 원년인 1926년에는 6 : 1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기록된 모든 년도에서 총기를 소지한 일본인의 수는 조선인보다 많았고, 특히 대덕산에서 호랑이가 사살된 1921년에는 그 비율이 10 : 1에 가까웠던 것과 덫보다 능동적인 포획 도구인 총이 야생동물 포획에 더 유리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엔도 키미오는 조선인보다 일본인들이 한반도의 야생동물 개체 수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파악했다.
호랑이와 표범, 곰과 늑대가 군림하고, 꿩과 기러기, 오리가 풍부한 환경이었는데, 일본과 강제로 합병되어 약 15년 만에 그 수가 격감한 이유는 무엇일까?
총을 사용하는 을종에 주의해서 보면, 다이쇼 원년(1912년), 일본인이 7,397명인 것에 대해 조선인은 극단적으로 적은 59명이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뒤, 조금씩 증가하고 있으나, 대덕산의 호랑이가 총에 맞은 다이쇼 10년(1921년)에는 일본인 12,532명에 비해 조선인은 1,203명이었다. 딱 10분의 1 수준이다. 호랑이가 멸종할 무렵, 엽총을 휘두른 것은 일본인이 아니었던가!
엽총이 야생동물에게 미치는 영향은 덫과는 비교가 안되기 때문에 한반도의 조수를 걱정할 만한 상태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일본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표를 보고 있자, 한국에서의 일들이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덕산의 호랑이는 재쳐 두고라도, 목포의 호랑이를 조금 더 알았으면 하고 한숨이 나왔다.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211

6. 실질적 시행 이유

일본으로 돌아와 동경에서 니시하라 에츠오(西原悅男) 씨를 찾아가, 한 번 더, 『조선 수렵해설(朝鮮狩獵解設)』을 보았다. '해수구제(害獸驅除)에 관한 건이라는 다이쇼 2년(1913년) 9월의 총독부의 통지가 있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해수구제를 실시하는 경우는 헌병, 경찰관이 지도·감독할 때, 조선인에게 총기와 탄약을 빌려줄 때는 그 인물의 신원이 확실히 확인되는 경우에 한함, 분실과 도난 예방을 위해서 구제를 수료할 때는 헌병 경찰서에서 보관할 것. 피해가 많은 지방에서는 마을 주민들에게 함정, 덫 등을 만들게 해서 구제를 돕게 할 것" 등 자세한 규칙이 나와 있었다.
이것을 보자, 일단 압수한 소총을 조선인 사냥꾼에게 돌려주어 구제 작전에 참가하게 했다. 그 지역의 지리에 익숙한 사냥꾼을 동원해서 일본의 헌병과 경찰관이 뒤에서 감시를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해(獸害)가 많은 지방에서는 사람과 가축에 대한 피해 예방상, 각자가 충분히 경계와 주의를 할 것, 단 해수(害獸)가 나타난다고 해서 장난으로 피해를 과대 포장해 소문을 내어, 여행과 생활하기에 위험이 많다는 풍설이 퍼지지 않도록 유의할 것."이라는 규칙이 있었다. 국경 지대까지 일본인을 보내기 위해서는 조선총독부에 호랑이는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호랑이 뿐만이 아니었다. 표범, 늑대, 곰, 스라소니 등 이 나라의 자연에 서식해 오던 육식동물들도 한꺼번에 해수로서 구제되어 버렸다. 이 동물들이 생태계에서 담당해온 복잡한 역할과 위치 등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대일본제국의 신민(臣民)이 정착하기 위해서 방해가 되는 것을 정리한 것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자리잡은 일본인들은 광복 전까지 90만 명이 있었다. 한반도 구석구석까지 침입을 해 내지인(內地人)이라고 칭하며 이 나라 사람들에게 견디기 힘든 괴로움을 준 일본인이 많았다고 한다. 교활, 뻔뻔스러움(無恥), 탐욕으로 때로는 광폭(狂暴)까지.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한 짓에 비하면 호랑이가 훨씬 안전했을지도 모른다.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48~349

이렇듯 해수구제 정책은 명목적으로는 야생동물로 인한 피해를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인 목적은 일본인들이 안정적으로 조선에 정착하게 하기 위함이었으며, 항일 의병 결성을 막기 위해 총기 소지가 금지된 조선인 포수에게 해수구제 동원 시에 한하여 총기를 지급. 사용을 허가하고 현지 주민들을 몰이와 덫 설치에 동원하도록 하였다.

7. 관련 일화

7.1. 야마모토 타다사부로의 원정사냥 『정호기』

파일:external/file1.bobaedream.co.kr/Aw450c1d18036c65.jpg
1917년 야마모토 정호군을 조직해 한반도로 호랑이 사냥을 떠난 일본 제국의 사업가 야마모토 타다사부로(우)와 조선인 포수 최순원(崔順元)(좌). 1917년 12월 1일~2일 경 신창에서 촬영.[24]
사진의 두 호랑이는 각각 함경북도 성진시 인근과[25] 함경남도 단천군 인근에서[26] 사살되었으며, 단천군 인근에서 사살된 호랑이는 사진의 조선인 포수 최순원이 사살했다.

1910년대 1차 세계대전 당시 무역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일본의 사업가인 야마모토 타다사부로(山本唯三郎)는 막대한 금액을 들여 몰이꾼과 사냥꾼을 고용해 정호군(征虎軍)이라 이름 붙여진 자신의 사냥팀을 8개 반으로 나눠 각자 함경남북도, 금강산, 전라남도로 보내어 사냥을 지휘했으며 1917년 11월 10일 도쿄역을 출발하여 한달 뒤인 같은 해 12월 10일 도쿄역에 돌아오기까지의 일정과 일화를 엮어 1918년 6월 10일 도쿄의 다이샨사(大參社)에서 정호기(征虎記)라는 서적으로 출간했는데,[27] 타다사부로의 사냥은 표면적으로는 조선총독부의 해수구제 정책과 같이 해로운 짐승을 퇴치하는 것을 내세우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소영웅심의 발로, 부의 과시, 일본군 사기진작,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확산 등 복합적인 동기를 안고 있었기에 제국주의 확산을 추구하던 당시 일본 정부와 식민지 조선의 사회적 분위기에 맞물려 지배층과 대중의 큰 관심과 지지를 받은 민간 차원의 사냥으로 꼽힌다.[28]

자세한 내용은 야마모토 타다사부로 문서 참조.

7.2. 대덕산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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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경주시 구정동 인근 대덕산 기슭에서 사살된 수컷 시베리아호랑이. 1980년 1월 26일자 한국일보에 게재.[29]
사진의 인물은 사진의 원 소유자인 경주 라이온스 클럽 회장 이상걸(李相杰)의 백부인 이복우(李福雨)로, 이상걸의 증언에 따르면 호랑이를 사살한 인물은 아니다.[30]

대덕산 수호랑이는 1921년 10월 2일[31] 오전 9시~10시 경[32] 대덕산 인근 구정동(九政洞)에서 거주하며 나무를 하러 산에 오른 당시 25세의 마을 주민 김유근(金有根)을 공격해 왼팔에 부상을 입히고 달아난 뒤 경찰서에 보고가 올라오자 구정동 주재 일본인 순사 미야케 요조우(三宅与三)를[33] 위시로 하여 인근 도로 공사 현장의 인부들을 몰이꾼으로 동원하고[34] 소집된 사수들로 구성되어 오후 2시~3시 경에 사냥 준비를 마치고[35] 추격을 시작한 사냥조에 의해 사살되었다.

파일:126207010713_20091230.jpg
대덕산 호랑이의 공격으로 입은 왼팔의 흉터를 내보이는 김유근. 촬영 당시 84세.[36]

그 크기는 몸길이 5척 7촌, 꼬리길이 2척 8촌, 체고 4척, 몸둘레 4척 2촌, 체중 41관으로 경성사범학교 생물학교사 우에다 츠네이치의 논문인 멸종해가는 조선의 호랑이(滅び行く 朝鮮の虎)에 기록되었는데,[37] 일부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당 호랑이는 구정동에서 17~18km 떨어진 경주군 양남면 효동(孝洞)에서 한 사람을 잡아먹었으며 사살되기 전날에는 4km 떨어진 대일리(大日里)라는 마을에서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고 한다.[38]

파일:126587385833_20100212.jpg
대덕산에서의 호랑이 사냥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 두번째가 미야케 순사.[39]

사살된 수호랑이는 해체되어 그 고기는 마을 주민들에게 분배되었고,[40] 사살된지 10일 뒤인 10월 12일. 일본 적십자사 조선본부 제 3회 총회에 출석한 뒤 경주를 방문한 간인노미야 고토히토에게 그 모피가 진상되었으며 간인노미야는 이에 기뻐하며 그 다음날인 13일, 경주 석굴암을 방문하며 미야케 순사를 측근에 두고 당시의 상황을 물었다고 한다.[41]

대덕산 호랑이를 사살한 이에 대해서 문단 상단에 게재된 사진의 원 소유자인 경주 라이온스 클럽 회장 이상걸은 자신의 백부인 이위우(李渭雨)가 사살한 것으로 경주를 방문한 엔도 키미오에게 증언했으나[42]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구정동 마을 주민들은 엔도 키미오에게 미야케 순사가 사살했다고 증언하거나[43] 그에 대해 정확한 발언을 하지 않았고, 이위우의 부인도 호랑이를 사살한 인물이 누구였는지는 듣지 못했다고 증언하여[44] 누가 대덕산 호랑이를 사살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다이쇼 12년(1923년) 9월 발행된 소학교 국어 교과서에서는 이 일화가 왕족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는 내용으로 각색되어 미야케 순사가 호랑이를 사살한 것으로 실렸으며,[45] 이 이야기가 바로 엔도 키미오가 해수구제사업에 대해 조사하게 된 계기인 원병휘 교수가 교과서에서 보았다고 말해준 호랑이 이야기이다.
제7 호랑이 사냥
어느 해, 경성(京城)에서 일본 적십자사 조선본부총회가 열렸습니다. 총재이신 칸인노미야(閑院宮) 전하는 총회에 참석하셔서, 일본으로 돌아가시는 길에 경주를 둘러보시기로 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구정동(九政洞)의 주재소에 "오늘 아침. 대덕산에서 우리 아이가 호랑이 때문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라고 신고를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야케(三宅) 순사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전하가 통과하시는데 일 초라도 빨리 그 위험한 것을 막지 않으면 아니된다."라고 결심했습니다.
여러 가지를 계획, 준비하고 그날 오후 백 여명의 몰이꾼은 대덕산 기슭에서 호랑이를 몰기 시작했습니다. 5명의 사냥꾼들은 산 위에서 숨어서 기다렸습니다. 몰이꾼들이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호랑이는 산을 뛰어올라가, 사냥꾼들 사이를 빠져나가 산의 맞은편으로 빠르게 뛰어 내려갔습니다. 미야케 순사는 총을 다시 거머쥐고 호랑이를 겨냥했으나 호랑이가 너무 빨라서 겨냥하기 어려웠습니다.
호랑이는 골짜기 너머 저편에 있는 작은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기 때문에, 미야케 순사는 이때다고 한 발 쏘았습니다. 금세 호랑이는 앞발이 꺾이더니 머리를 땅에 대면서 쓰러졌습니다. 명중한 것입니다. 총알은 목덜미에서 입안을 통과해 오른쪽 송곳니를 부러뜨렸습니다.
저녁, 호랑이를 주재소까지 옮겼습니다.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들 하나같이 미야케 순사의 활약을 칭찬하자, 순사는. "나는 어디를 어떻게 겨냥해서 언제 방아쇠를 당겼는지 하나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전하가 이곳으로 행차하시는데. 만약 이 호랑이를 쏘지 못했다면 전하께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갔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호랑이 가죽은 전하에게 기념품으로 헌상되었다고 합니다.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42~343

8. 당대 학자·관련자들의 우려

일정때 조선경성사범학교의 일본인 생물학교사였던 우에다(上田常一)는 "사라져가는 조선의 호랑이(滅び行く 朝鮮の虎)란 글을 1936년 과학지식(科学知識)이란 잡지에 싣고 그 머리말에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에는 옛날부터 호랑이가 많아 도처에서 인축에게 참혹한 해를 끼쳤다. 그래서 호랑이를 잡아 백성을 편안케하는 일은 지방관리의 중요한 행정과제였다. 그러나 지금은 퍽 줄어들어 북조선의 훨씬 오지가 아니면 어떠한 심산유곡을 뒤져도 호랑이의 모습이나 소리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이는 위해를 방제하는 외에도 비싼 모피와 뼈를 얻기 위하여 닥치는 대로 총살한 결과다. 이 뼈는 약용으로 쓰이기 때문에 모피와 거의 같은 값이다. 지금 호랑이가 사는 곳은 작년(1935)에는 겨우 5두가 잡혔을 뿐이라고 한다. 이런 추세라면 가까운 장래에 조선의 호랑이는 전멸할 것이 명백하다.

우리나라 호랑이의 생존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은 이에 앞서 1926년 총독부의 엽정(獵政)을 담당했던 기수(技手) 요시다(吉田雄次郎)도 虎と朝鮮.1926 月刊朝鮮에 <근년 호랑이의 값이 뛰어올라 포획이 성행하여 생존수가 줄어들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 韓國動物園八十年史 昌慶苑編 p. 193
니시하라씨의 책장에서 『조선 수렵 해설』을 발견했다. 조선총독부의 수렵계, 요시다 유지로(吉田雄次郎)라는 기술직 공무원이 다이쇼 14년(1925년)에 출판한 작은 책이었다.
머리말에, "야생조수가 다년간 남획되어 그 번식률이 현저히 떨어져 앞길이 심히 걱정될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라고 쓰여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메이지 44년)에 방치해 두었던 수렵을 제한하는 수렵규칙을 공포했는데, 조수의 보호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209
우에다 츠네이치씨의 논문은 마지막으로 "한반도에 극히 최근까지 넓게 서식했던 호랑이는 오늘날에 와서는 함경북도의 오지에서, 오히려 거의 잡히지 않을 정도로 감소하고 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반드시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호랑이는 멸종해 더이상 볼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결론짓고 있었다.
경성사범학교의 학자의 경고였으나 조선총독부가 그 충고에 따라서 호랑이와 표범의 보호에 힘쓴 흔적은 없다. 위정자들이 학자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도 똑같이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그 뒤, 대략 10년이 흘러 일본은 파국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54

이와 같이 당시 경성사범학교 생물학교사 우에다 츠네이치(上田常一), 조선총독부 수렵 담당 관리 요시다 유지로(吉川雄次郞) 등 일부 학자와 관련자들에 의해 남획 대상이 된 야생동물들의 절멸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으나 총독부는 이에 대해 어떠한 정책도 내지 않았다.

9. 구제의 부산물

"제작년이었다. 사이토 총독이 구입한 호랑이 가죽을 감정해달라는 명령으로 관저를 방문한 적이 있으나, 가죽 2장 모두 매우 컸다. 말하자면 그중 한 장은 대단히 커서 7척(2.1m) 정도나 되었다. 털은 그렇게 많지 않고 길지도 않았으나, 복부는 하얗고 누르스름한 정도가 커서 시베리아호랑이라고 말했으나, 도저히 조선의 호랑이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크기가 컸다.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22
당시 조선에 온 일본 관리들 중에는 조선의 훌륭한 호랑이나 표범의 모피를 탐내 어떻게든지 이것을 입수해서 응접실 등에 장식하고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했고 귀국할 때의 기념품으로서 이 이상의 자랑거리는 없었다.
우선 조선의 총독인 사이토(斎藤実)도 1925년에 커다란 호랑이 모피 두 장을 입수하여 부하(요시다)에게 감정을 시키며 자랑한 일이 있다. 지방관료들 중에는 모피를 뇌물로 하여 포상을 받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한동안 남한에서의 마지막 호랑이로 알려졌던 경주 대덕산(大德山)의 수컷 한마리를 잡아(1921) 당시 조선에 왔던 일본왕족 강인노미야(閑院宮)에게 바쳤던 미야께(三宅)라는 순사(순경)는 그로 인해 경부로 승진한 것이 그 예다. 이런 판국이었으니 호랑이는 오히려 남모르게 잡아 매매되는 사례가 더 많았을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실제로 1908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산(佛甲山)에서 잡혀 지금의 목포 유달국민학교에 박제표본으로 보존되고 있는 어린 한마리는 350원에 산 것이다.
1918년 강원도 춘천 가리산(加里山)에서 일인 후지키(藤木鶴山)가 잡은 173kg의 수컷은 331원25전에 팔려 서너사람의 손을 거치다 마지막에는 껍질은 500원, 뼈는 655원(합계 1,155원)에 팔렸다.
우에다에 의하면 1935년 당시 호피 한장의 서울 싯가는 1,000원~1,500원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1,500원이라면 웬만한 관리의 1년 봉급에 맞먹는다.
- 韓國動物園八十年史 昌慶苑編 p. 194

해수구제사업으로 통칭되는 일제강점기 시기 정부 차원의 야생동물 사냥은 명목적으로는 해수구제를 이유로 한 남획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야생동물의 신체가 부산물로 남게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호랑이, 표범의 가죽과 뼈 등은 높은 가격에 매매된 것은 물론. 고위 관료들이 선호하는 사치품으로도 취급되어 정부 주도하의 사냥에서 포획된 노루, 늑대 등의 동물은 잡은 사냥꾼들의 자유에 맡겨졌으나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은 관료의 몫으로 돌려졌다고 한다.[46]

10. 호랑이와 표범의 포획 두수

해수구제정책에 대해 조사한 엔도 키미오도 호랑이를 위주로 정보를 조사했고, 특히나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에서 1919년 부터 1924년까지 포획된 야생동물 두수 기록으로 게재한 월간지 『조선』의 1926년 1월호에 게재된 요시다 유지로의 『호랑이와 조선』에 게재된 표도 호랑이와 표범의 포획 두수만을 기록하고 있어 호랑이, 표범의 포획 두수에 대한 기록이 타 야생동물 보다는 많은 편이다.

이에 따라 1915년에서 1916년 까지의 야생동물 포획 두수를 기록한 『조선휘보』 1918년 8월호『조선에서 맹수피해 및 그 예방구제』(호랑이 24, 표범 136), 1919년에서 1924년 까지의 호랑이와 표범의 포획 두수를 기록한 『호랑이와 조선』(호랑이 65, 표범 385), 1933년부터 1942년까지의 야생동물 포획 두수를 기록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호랑이 8, 표범 103)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1915~1916년, 1919년~1924년, 1933~1942년 사이에 공식적으로 포획된 호랑이와 표범의 두수를 합산할 시 해당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호랑이97마리, 표범624마리가 포획되었다는 결론이 나오며,[47] 누락된 연도와 비공식적으로 사냥된 사례까지 감안할 시 이보다 더 많은 수의 개체가 포획되었다고 볼 수 있다.

11. 집계된 수해(獸害)와 포획된 야생동물 개체 수 관련 표

11.1. 총독부 발행 『조선휘보』 1918년 8월호 『조선에서 맹수피해 및 그 예방구제』(1915년~1916년)[48]

연별호랑이표범늑대멧돼지기타
죽음부상죽음부상죽음부상죽음부상죽음부상죽음부상죽음부상
다이쇼
4년
(1915)
사람일본인 1 113 1 16
조선인822311211350231 112899
가축소, 말1271178161134077 32549107
기타438222843712121,2892318 25952,290307
다이쇼
5년
(1916)
사람일본인11 1312 36
조선인3322 25325522 6354
가축소, 말831348242 3861122 521149
기타4984150180251,398171537389212,389325
증감사람일본인+1 -1-1-3+1+1+1+1 +2
조선인-5+1 -1-3 -10-60-25+3-9 -1-65-45
가축소, 말-44+2-30+8+1-1+46+35+2 -3-2-28+42
기타+60+19+217+43-10-7+109-60+45+7+130+16+551+18
연별구제일수포획된 해수 및 그 마리 수
호랑이표범늑대멧돼지사슴
다이쇼
4년
(1915)
4,22011412611221,162128
다이쇼
5년
(1916)
6,17713951681061,50258
증감+1,957+2+54-93-16+340-70
연별구제일수포획된 해수 및 그 마리 수포획방법종사자수
노루토끼그 외총기덫, 그 외경찰관
및 헌병
공무원사냥꾼몰이꾼,
그외
다이쇼
4년
(1915)
4,2206,1753083292,2186,3193,321852,32091,252
다이쇼
5년
(1916)
6,1772,7723042753,7751,5183,2261073,09744,460
증감+1,957-3,403-4-54+1,557-4,801-95+22+777-46,792

11.2. 월간지 『조선』 1926년 1월호 『호랑이와 조선』(요시다 유지로(吉田雄次郎))(1919년~1924년)

11.2.1. 조선에서 호랑이, 표범에 의한 피해 통계[49]

구분죽음부상
다이쇼 8년
(1919)
호랑이사람123
소, 말29130
그 외의 가축2076213
표범사람-33
소, 말20727
그외의 가축1588166
다이쇼 9년
(1920)
호랑이사람224
소, 말281038
그 외의 가축27127298
표범사람12416
소, 말25833
그외의 가축21062272
다이쇼 10년
(1921)
호랑이사람7-7
소, 말391554
그 외의 가축23322255
표범사람9716
소, 말30737
그외의 가축24436280
다이쇼 11년
(1922)
호랑이사람213
소, 말701282
그 외의 가축48835523
표범사람314
소, 말312354
그외의 가축30067367
다이쇼 12년
(1923)
호랑이사람-88
소, 말31536
그 외의 가축31214326
표범사람224
소, 말561773
그외의 가축445119564
다이쇼 13년
(1924)
호랑이사람235
소, 말361248
그 외의 가축16714181
표범사람268
소, 말462369
그외의 가축32173394
총계
호랑이사람141630
소, 말23355288
그 외의 가축1,6781181,796
표범사람282351
소, 말20885293
그외의 가축1,6783652,043
연 평균
호랑이사람2.32.65.0
소, 말38.89.148.0
그 외의 가축279.619.6299.3
표범사람4.63.88.4
소, 말34.614.148.7
그외의 가축279.660.83340.5

11.2.2. 조선에서 호랑이, 표범의 지방별 포획수[50][51]

다이쇼 8년
(1919)
다이쇼 9년
(1920)
다이쇼 10년
(1921)
다이쇼 11년
(1922)
다이쇼 12년
(1923)
다이쇼 13년
(1924)
호랑이표범호랑이표범호랑이표범호랑이표범호랑이표범호랑이표범호랑이표범
경기도1215413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1113419
전라남도212610616
경상북도1169710
경상남도11617
황해도51781217149
평안남도34155117
평안북도471713137151
강원도213431416213751
함경남도41631631211214774
함경북도373991861810232133388
318546206015741291109665385

11.3.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쇼와 17년(1942)(1933년~1942년)

11.3.1. 해수피해[52]

구분총합호랑이표범늑대기타
총합죽음부상죽음부상죽음부상죽음부상죽음부상죽음부상
(1) 사람
쇼와 8년(1933)7730471111212639-8
쇼와 9년(1934)411823-11442121214
쇼와 10년(1935)341519----2-1313-6
쇼와 11년(1936)632736---12-24261-
쇼와 12년(1937)3682822-2-251616
쇼와 13년(1938)28224---11535-13
쇼와 14년(1939)25817----1-56211
쇼와 15년(1940)3116152---1111925
쇼와 16년(1941)611744-1-22121215314
쇼와 17년(1942)5118331----9141539
(2) 가축
쇼와 8년(1933)2,2291,739497163154463021,4724217025
쇼와 9년(1934)1,8691,5043654-10691-1,383347109
쇼와 10년(1935)2,1351,5935421717518111,4825011821
쇼와 11년(1936)2,2021,74445820865132-1,6284252912
쇼와 12년(1937)1,7981,3114877332223-1,2514211841
쇼와 13년(1938)1,9501,450500241786142421,2404307637
쇼와 14년(1939)1,7551,30345219876223-1,1673963826
쇼와 15년(1940)1,7711,428343224211--1,3453073923
쇼와 16년(1941)2,4451,8845612731463920141,6444754730
쇼와 17년(1942)2,2861,71557019101172924161,4714768439

11.3.2. 해수구제[53]

구분총합두수(頭數)구제종별(驅除種別)
호랑이표범늑대멧돼지노루사슴총기그외
쇼와 8년(1933)4,102214981808292,97183,471218413
쇼와 9년(1934)4,3481141041369733,120-3,488241619
쇼와 10년(1935)3,914-10621169462,77913,288282344
쇼와 11년(1936)4,762-9501171,1763,40373,711327724
쇼와 12년(1937)4,093312581341,1252,761-3,271345477
쇼와 13년(1938)4,30611563781,1502,978213,535335436
쇼와 14년(1939)4,205-2461291,2442,774103,494275436
쇼와 15년(1940)5,294-8361101,6763,451124,863207224
쇼와 16년(1941)6,6441450702,3394,17656,112176356
쇼와 17년(1942)6,443-1543712,9223,380125,870179350

11.4. 『한국동물원80년사 창경원편』 수록. 호랑이와 조선-조선총독부 통계연보 비교 표

11.4.1. 호·표에 의한 인명피해상황

호·표별사·상별1919~24(6년간)1933~1942(9년간)비교비고
사·상수연평균사·상수연평균
호랑이14명2.3명6명0.67명▽1.63명
16명2.6명5명0.56명▽2.04명
표범28명4.6명2명0.22명▽4.38명
23명3.8명11명1.22명▽2.58명
비교요시다 (吉田)
(朝鮮 1926. 1.)
조선총독부 연보
(1942)

11.4.2. 호·표 포획(구제) 상황

동물1919~24(6년간)1933~1942(9년간)비교
(연평균)
비고
포획연평균포획연평균
호랑이65두10.8두8두0.9두▽9.9두
표범385두64.2두103두11.7두▽52.5두
비교요시다 (吉田)
(朝鮮 1926. 1.)
조선총독부 연보
(1942)

12. 참고 문헌

  • 오창영 저. 『韓國動物園八十年史 昌慶苑編』​(한국동물원80년사 창경원편)​, 서울특별시. 1993년 2월.
  • 엔도 키미오(遠藤公男) 저. 이은옥 역.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이담북스. 초판. 2009년 12월 21일.
  • 엔도 키미오 저. 이은옥·정유진 역. 『한국의 마지막 표범』, 이담북스. 초판. 2014년 1월 3일.
  • 야마모토 타다사부로 저. 이은옥 역. 이항·엔도 키미오·이은옥·김동진 해제. 『정호기』, 에이도스. 초판 2쇄. 2015년 11월 25일.
  • 스텐 베리만(Sten bergman) 저. 신복룡·변영우 역주. 『한국의 야생동물지』, 집문당. 1판 2쇄. 2017년 3월 30일.
  • 김동진 저. 『조선의 생태환경사』, 푸른역사. 초판 4쇄. 2017년 10월 17일.

[1] 분명 해를 입히는 맹수의 수를 줄이는 것이 목적이지만 해당 새들은 인간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는다. 황새는 순수 육식성이긴 해도 사람이나 가축을 습격하지 않고 두루미와 고니는 잡식이지만 추수나 농작물 수확이 끝난 겨울에 오기 때문에 가축은 물론 농작물에도 거의 피해를 주지 않는다.[2] 조선의 생태환경사 p. 35[3] 조선의 생태환경사 p. 35~37[4] 조선의 생태환경사 p. 37[5] 조선의 생태환경사 p. 37[6] 조선의 생태환경사 p. 38[7] 조선의 생태환경사 p. 38[8] 조선의 생태환경사 p. 40[9] 조선의 생태환경사 p. 42[10] 조선의 생태환경사 p. 43~45[11] 조선의 생태환경사 p. 45~49[12] 조선의 생태환경사 p. 45~49[13] 본문에서는 대록을 순록의 일종이라고 서술했으나 대록인 백두산사슴은 흔히 엘크라고 불리는 와피티사슴의 아종으로 순록이 속한 순록속(Rangifer)이 아닌 사슴속(Cervus)에 속한다.[14] 조선의 생태환경사 p. 52[15] 조선의 생태환경사 p. 53~54[16] 조선의 생태환경사 p. 56[17] 조선의 생태환경사 p. 56~57[18] 조선의 생태환경사 p. 58[19] 서울 서대문구에 거주하던 박용관(朴龍觀)이라는 인물이 1979년 12월 29일 경주시 대덕산에서 촬영한 호랑이라고 주장한 호랑이의 사진이 여러 언론사에 보도되고 원병오 교수, 오창영, 김정만 창경원 수의관 등 당대 동물 전문가들로부터 호랑이가 확실하다고 인정 받아 환경부에서 호랑이 보호를 위해 경주에 직원을 급파하기까지 했으나 사진 속의 지형과 호랑이의 무늬가 어린이대공원 호랑이사의 지형과 당시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서 사육하던 호랑이의 무늬와 같은 것이 확인되어 해당 호랑이 사진의 실체는 어린이대공원의 호랑이를 촬영한 것으로 밝혀진 사건이다.[20] 1910년대 초에 볼셰비키를 피해 한반도로 건너와 함경북도에서 거주하며 인삼 재배, 휴양지, 사슴농장업을 하는 동시에 미하일 얀코프스키, 유리 얀코프스키, 발레리 얀코프스키 3대에 걸쳐, 특히 유리 얀코프스키와 발레리 얀코프스키 대에 일가가 포수로 활동하면서 조선인들로부터 뛰어난 사격 솜씨로 눈이 앞뒤로 달려있다는 의미 또는 사격할 때는 평소에 쓰던 안경을 올려 이마에 걸치고 사격하던 유리 얀코프스키의 버릇 때문에 눈이 네 개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로 '네눈이'라고 불리다가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반도에 입성한 소련군에 의해 조선에서 일본군의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누명을 쓰고 시베리아에서 유배 생활을 당한 얀코프스키(Янковский) 가문을 의미하며 『호랑이 사냥의 반세기』의 저자는 유리 얀코프스키,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의 저자인 엔도 키미오가 만난 이는 미하일 얀코프스키의 손자이자 유리 얀코프스키의 아들인 발레리 얀코프스키이다. 발레리 얀코프스키는 2007년 조선일보에서 인터뷰한 바가 있으며, 2010년 4월 2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향년 9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1]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209[22]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209~210[23]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210[24] 정호기 p. 95[25] 정호기 p. 177[26] 정호기 p. 179[27] 정호기 p. 15[28] 정호기 p. 18[29]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134[30]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136[31]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52[32]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03[33] 한국의 마지막 표범 p. 19[34]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296[35]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03[36]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149[37]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52[38]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296[39]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53[40]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06[41]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52[42]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153[43]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297[44]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40[45]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42~343[46]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27[47] 한국의 마지막 표범 p. 19[48]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318~319[49]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27[50] 韓國動物園八十年史 昌慶苑編 p. 200[51]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22와 韓國動物園八十年史 昌慶苑編 p. 200에 수록된 같은 내용의 표가 차이를 보이나 대조 시 韓國動物園八十年史 昌慶苑編 p. 200 게재본이 보다 정확한 것으로 파악되어 해당 게재본을 게재함.[52]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32~333[53]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p. 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