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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토머스/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프랭크 토머스
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시카고 화이트삭스
3.1. 1990 시즌3.2. 1991 시즌3.3. 1992 시즌3.4. 1993 시즌3.5. 1994 시즌3.6. 1995 시즌3.7. 1996 시즌3.8. 1997 시즌3.9. 1998 시즌3.10. 1999 시즌3.11. 2000 시즌3.12. 2001 시즌3.13. 2002 시즌3.14. 2003 시즌3.15. 2004 시즌3.16. 2005 시즌
4.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4.1. 2006 시즌
5. 토론토 블루제이스
5.1. 2007 시즌5.2. 2008 시즌
6.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2기
6.1. 2008 시즌
7. 연도별 성적

1. 개요

프랭크 토머스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다른 미국의 운동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프랭크 토머스 역시 고등학교 시절 야구와 농구, 미식축구를 병행했다[1]. 그러나 그 중 야구를 가장 좋아했던 토머스는 1986년 드래프트에서 자신을 지명해주는 팀과 무조건 계약하겠다고 결심했지만, 196cm, 125kg라는 야구 선수보다 미식축구 선수에 어울리는 피지컬을 가진 토머스를 지명하는 팀은 없었다.

결국 미식축구로 유명한 오번 대학교에 미식축구 선수 장학금을 받고 진학한 토머스는 미식축구 팀의 타이트엔드를 맡았다. 토마스는 야구를 더 좋아했고, 야구에 더 재능을 보였지만, 풋볼 역시 지속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풋볼 중 두 번의 부상과 결국 자신이 더 잘 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기 위해 야구를 선택하였다 .[2]
이에 학교는 토머스의 장학금을 취소했으나 동시에 야구 팀 최고의 스타를 잃고 싶지 않았기에, 특별 기금을 조성해 토머스에게 새로운 장학금을 주었다. 토머스는 뛰어난 성적으로 이에 화답, 1988년과 1989년[3] SEC 타격 타이틀을 따냈고, 오번 대학 경기 통산 49 홈런을 기록했다[4].

그리고 1989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7순위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지명받게 된다.

3. 시카고 화이트삭스

3.1. 1990 시즌

마이너 리그를 빠르게 졸업하고, 1990년 메이저 리그에 콜업된 토머스는 60경기에 출장해 .330 .454 .529 7홈런 31타점을 기록하면서 빠르게 메이저 리그에 정착했다.
파일:토마스 첫 8년 성적.jpg
토마스의 첫 8년은 그토록 많은 찬양을 받는 마이크 트라웃의 첫 8년을 타격 한정으로는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한다.[5]

3.2. 1991 시즌

이듬 해인 1991년 첫 풀타임 시즌을 맞이한 토머스는 158경기에 출장해 .318 .453 .553 32홈런 109타점이라는 신인답지 않은 성적을 올리면서 그 해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 3위에 올랐다.[6] 이때부터 1997년까지 토머스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한 7년 연속 3할-20홈런-100득점-100타점-100볼넷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3.3. 1992 시즌

1992년 160경기 .323 .439 .536 24홈런 115타점으로 확고한 주전으로 자리잡으며 자신을 예열했다.

3.4. 1993 시즌

1993년 토머스는 153경기에 출장해 .317 .426 .607 41홈런 128타점을 기록하며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했다. 1993 ALCS에서, 처음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토마스는 데뷔전인 1차전에서 5타석 1안타/4볼넷으로 5출루에 성공하는 등 총 27타석/17타수 10BB/5K 6안타 1홈런 3타점 2득점 .353/.593/.529 1.122OPS로 활약하며 단일 챔피언십 시리즈 최다 볼넷 기록을 세웠지만 팀은 탈락했다.

3.5. 1994 시즌

이듬 해인 1994년은 파업으로 인해 어수선했던 시즌이었지만 토머스는 113경기에 출장해 .353 .487 .729 38홈런 101타점을 기록해 아메리칸 리그에서 로저 매리스 이후 처음으로 MVP 2연패에 성공했다. 이때 wRC+ 205를 기록했는데 같은 해 내셔널 리그 MVP 제프 배그웰도 똑같이 wRC+ 205를 기록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생년월일도 같다. 이 시즌의 MVP 수상을 106경기만 출전하고도 .357 .438 .714 36홈런 101타점을 기록한 알버트 벨에 대한 기자들의 안 좋은 인식 덕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는 기자단과 일반인의 지식 차이를 무시한 서술이다. 당시 토머스는 타율에서 폴 오닐을 6리, 홈런에서 켄 그리피 주니어를 2개, 타점에서 커비 퍼켓을 11개 차로 뒤쫓고 있어 1967년 칼 야스트렘스키 이후 첫 번째 트리플 크라운에 도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트리플 크라운은 놓쳤지만, 1957년 윌리엄스(.528) 이후 이후 가장 높은 출루율(.487)과 1957년 윌리엄스(.731) 이후 가장 높은 장타율(.729)을 기록했다. 20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토머스보다 더 높은 출루율을 기록한 아메리칸 리그의 타자는 없고 내셔널 리그에서도 4연속 MVP 시절의 본즈를 제외하면 없다. .487의 출루율은 역대 1루수 단일 시즌 최고 기록이다. 장타율 역시 1996년 마크 맥과이어만이 더 높은 수치(.730)를 기록했다. 또 토머스는 112볼넷/54삼진를 기록했는데, 토머스 이후 100개 이상의 볼넷과 2대1의 볼넷/삼진 비율을 동시에 기록한 선수는 배리본즈(4회)뿐이다. 즉 경기 수가 적은데 홈런과 타점 수치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토머스가 MVP를 수상한 게 벨과 기자들의 안 좋은 관계 덕분이라고 보는 것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1994년 토머스는 몇십 년 만에 한 번 나오는 기록들을 달성하고, 또 달성하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3.6. 1995 시즌

파업의 여파가 이어졌던 1995년에도 145경기 .308 .454 .606 40홈런 111타점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증명했다.

3.7. 1996 시즌

1996년에도 141경기 .349 .459 .626 40홈런 134타점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보여줬던 토머스였지만 어느새 암운이 몰려오게 되는데 바로 알버트 벨의 영입이었다.

3.8. 1997 시즌

1997년 알버트 벨이 5년 $55M의 사상 최고 계약으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입단하면서 하루아침에 2인자가 되어버렸고, 연봉에서도 큰 격차를 느낀 토머스는 팀에 섭섭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해 벨은 자신의 명성에 맞지 않게 조금 부진한 모습이었지만, 토머스는 146경기 .347 .456 .611 35홈런 125타점으로 타격왕과 함께 타율-출루율-OPS에서 리그 1위를 석권하면서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 3위에 올랐다.[7]

3.9. 1998 시즌

1998년을 앞두고 7년 $64.4M의 벨의 계약에 버금갈 만한 재계약을 맺은 토머스였지만, 스프링 캠프를 앞두고 체중이 크게 불어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해 토머스가 160경기 .265 .381 .480 29홈런 109타점으로 크게 부진한 반면에 알버트 벨은 자신의 명성에 걸맞은 성적을 냈고, 시즌이 끝나자 마자 자신의 계약에 삽입되었던 엘리베이터 조항을 발동해 FA가 되어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적했다.[8]

3.10. 1999 시즌

1999년 토머스는 자신의 타석 위치를 뒤로 옮기는 조정을 했지만, 오히려 전년보다 부진한 135경기 .305 .414 .471 15홈런 77타점에 그치면서 끝물에 접어드는 듯 했다.

3.11. 2000 시즌

하지만 2000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건너 온 폴 코너코의 합류로 지명타자로 자리를 옮겼고, 절치부심해 살을 뺀 토머스는 159경기 .328 .436 .625 43홈런 143타점을 기록하면서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 2위에 올랐고[9] 올해의 재기 선수상을 수상했다.

3.12. 2001 시즌

하지만 2001년 토머스는 대형사고를 치고 만다. 당시 메이저 리그에는 알렉스 로드리게스텍사스 레인저스가 맺은 10년 $252M 계약과 데릭 지터뉴욕 양키스 간의 10년 $189M 재계약 등의 초대형 계약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자신의 계약이 이들에 비해 초라함을 불평하던 토머스는 스프링 캠프에서 무단이탈해버리고 만다. 결국 토머스는 계약 규모를 늘리는 대신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계약 재조정을 받아들이겠다는 기량 감퇴 조항(diminished skills)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는 완벽한 오판이었다. 이 과정에서 토머스는 돈을 밝힌다는 좋지 않은 이미지를 얻게 됐으며, 선수단 내에서의 영향력을 일순간에 잃어버렸다. 거기에 그 난리를 피워 팀 분위기를 망쳐놓았더니, 정작 시즌이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며 큰 비판을 받았다.

2001년에는 부상과 부진으로 인해 20경기 .221 .316 .441 4홈런 10타점에 그치며 부진했다.

3.13. 2002 시즌

2002년에는 비교적 건강한 시즌을 보냈지만 148경기 .252 .361 .472 28홈런 92타점에 그쳤다.

3.14. 2003 시즌

2003년에는 로저 클레멘스에게 만루홈런을 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153경기 .267 .390 .562 42홈런 105타점을 기록하며 어느 정도 반등에 성공했다.

3.15. 2004 시즌

2004년에는 74경기 .271 .434 .563 18홈런 49타점으로 그야말로 부상으로 얼룩지며 망해버렸다.

3.16. 2005 시즌

2005년에도 34경기 .219 .315 .590 12홈런 26타점을 기록하며 전년도와 다른 것 없이 크게 부진했고, 결국 계륵이 되어 버린 토머스는 팀이 블랙삭스의 저주를 깨며 우승한 순간에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팀은 내친 김에 토머스에게 은퇴를 종용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그동안 이기적이고 미운 짓만 골라 했어도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과거 엄청난 활약을 한 대선수가 그런 지경까지 몰리자 팬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4.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4.1. 2006 시즌

결국 화이트삭스를 떠난 토머스는 2006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최저 연봉인 $0.5M에 계약하게 되는데, 이게 웬걸 137경기에서 .270 .381 .545 39홈런 114타점을 기록하면서 다시 한 번 올해의 재기 선수상을 수상했고[10]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여기에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그 시즌 사이영 상 수상자인 요한 산타나와 제시 크레인을 상대로 2홈런을 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5. 토론토 블루제이스

5.1. 2007 시즌

이듬 해인 2007년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에 성공한 토머스는 155경기 .277 .377 .480 26홈런 95타점을 기록하면서 전년도의 기세를 제법 이어갔다.

5.2. 2008 시즌

2008년에는 부상과 부진을 거듭해 팀에서 방출된 뒤 다시 오클랜드로 돌아갔다.

6.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2기

6.1. 2008 시즌

오클랜드로 돌아와서도 40경기 .240 .349 .374 8홈런 30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이후 1년간 팀을 찾지 못하며 결국 2010년 2월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

7. 연도별 성적

파일:MLB 로고.svg 프랭크 토머스의 역대 MLB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90 CHW 60 240 63 11 3 7 39 31 0 44 54 .330 .454 .529 .983 2.4 2.3
1991 158 701 178 31 2 32 104 109 1 138 112 .318 .453 .553 1.006 7.2 7.0
1992 160 711 185 46 2 24 108 115 6 122 88 .323 .439 .536 .975 7.1 7.0
1993 153 676 174 36 0 41 106 128 4 112 54 .317 .426 .607 1.033 6.3 6.2
1994 113 517 141 34 1 38 106 101 2 109 61 .353 .487 .729 1.217 7.0 6.4
1995 145 647 152 27 0 40 102 111 3 136 74 .308 .454 .606 1.061 5.4 5.3
1996 141 649 184 26 0 40 110 134 1 109 70 .349 .459 .626 1.085 6.1 5.6
1997 146 649 184 35 0 35 110 125 1 109 69 .347 .456 .611 1.067 7.2 7.3
1998 160 712 109 35 2 29 109 109 7 110 93 .265 .381 .480 .861 3.0 3.5
1999 135 590 148 36 0 15 74 77 3 87 66 .305 .414 .471 .885 2.1 2.3
2000 159 707 191 44 0 43 115 143 1 112 94 .328 .436 .625 1.061 5.9 6.0
2001 20 79 15 3 0 4 8 10 0 10 12 .221 .316 .441 .758 -0.1 0.0
2002 148 628 132 29 1 28 77 92 3 88 115 .252 .361 .472 .834 1.4 1.9
2003 153 662 146 35 0 42 87 105 0 100 115 .267 .390 .562 .952 4.2 4.3
2004 74 311 65 16 0 18 53 49 0 64 57 .271 .434 .563 .997 2.5 2.8
2005 34 124 23 3 0 12 19 26 0 16 31 .219 .315 .590 .905 0.4 0.4
CHW 통산
(16시즌)
1959 8603 2136 447 11 448 1327 1465 32 1466 1165 .307 .427 .568 .995 68.1 68.3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2006 OAK 137 559 126 11 0 39 77 114 0 81 81 .270 .381 .545 .926 2.4 3.2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2007 TOR 155 624 147 30 0 26 63 95 0 81 94 .277 .377 .480 .857 1.8 2.2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2008 TOR/OAK 71 289 59 7 1 8 27 30 0 39 57 .240 .349 .374 .723 -0.3 0.2
MLB 통산
(19시즌)
2322 10075 2468 495 12 521 1494 1704 32 1667 1397 .301 .419 .555 .974 72.1 73.8


[1] 풋볼에서는 타이트엔드 유망주로 이름을 날렸고, 야구에서는 졸업시즌 타율 0.440을 기록했다. 특히 소속 야구팀을 두번이나 주 챔피언으로 이끌었다[2] “I wanted to play baseball and I wanted to play football, but I knew I had to show up and be something special to have the ability to play baseball in the spring.”- 2023년 4월 3일 인터뷰.[3] 시즌 타율 .403[4] 이는 졸업 당시 오번 대학교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5] 물론 시대가 다르다는 점, 트라웃은 수준급 중견 수비를 보여줬고 스피드 툴도 갖췄다는 점, 토머스는 21세 데뷔지만 트라웃은 19세 데뷔라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한다.[6] 1991년 아메리칸 리그 MVP 수상자는 칼 립켄 주니어였고 ,2위는 세실 필더였다.[7] 1997년 아메리칸 리그 MVP 수상자는 켄 그리피 주니어였고, 2위는 티노 마르티네즈였다.[8]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계약을 맺으면서 벨이 얻은 엘리베이터 조항은 다른 선수들의 연봉이 벨의 연봉액을 초과하는 경우 항상 연봉 랭킹에 들어가도록 차액을 추가로 지급하지 않으면 FA가 되어 자유롭게 타 팀과 계약할 수 있는 극단적인 꿀 보장이었다. 설마 화이트삭스도 5년 내에 더 큰 계약이 나타날까 했지만 당시 메이저 리그의 연봉 폭증과 함께 보스턴 레드삭스페드로 마르티네즈와 6년 $75M 재계약을 맺으면서 현실이 되어버렸다.[9] 2000년 아메리칸 리그 MVP는 제이슨 지암비였고, 3위는 알렉스 로드리게스였다.[10] 이 상을 아메리칸 리그에서 두 번 받은 건 토머스가 유일하며, 내셔널 리그에서는 크리스 카펜터가 두 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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