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19:50:30

프랭크 산사태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프랭크 산사태.jpg

1. 개요2. 사고 내용3. 사고 이후

1. 개요

Frank Slide

1903년 4월 28일 캐나다 앨버타주 프랭크에서 일어난 산사태.

2. 사고 내용

프랭크 지역은 석탄 광산으로 먹고 사는 지역이었다. 1900년엔 하루에만 400톤에 달하는 석탄을 캐냈다. 광산업이 발달하면서 마을은 점점 더 커졌다. 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폴란드 등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었다. 1900년엔 주민이 300명 정도였으나 3년만에 2배로 늘었다.

해당지역은 과거 아메리카 원주민인 블랙풋(Blackfoot)과 쿠테나이족(Kutenai)에게 "거북이의 등(Turtle's back)이라 불린 곳으로, 산이 움직인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산사태로 악명 높은 지역이었다.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 주변에 정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광산 업체와 광부들은 이를 무시했다. 1903년엔 산에 또 탄광을 뚫으면서 산은 점점 약해져갔다. 광부들 중 몇몇은 산이 움직이는 걸 느끼기까지 했다. 거기다 1903년 사고 지역의 겨울에 유독 춥지 않은 편이었다. 폭설이 내리긴 했으나 금새 녹았고, 녹은 눈은 지하로 흘러 들어가 지하수가 됐다.

새벽, 광부 20명이 야간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17명은 광산 안에, 3명은 광산 밖에서 열차에 석탄을 실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기온은 점점 내려갔고, 지하수가 조금씩 얼으면서 부피가 늘어났다. 밑에서 부피가 늘어나자 땅은 버티지 못하고 오전 4시 10분 경 산이 무너졌다. 1억2,000만톤에 달하는 바위와 흙더미가 쏟아졌다. 광부들은 석탄을 실던 기차에 재빨리 올라 타 도망갔다. 얼마 안가 산사태는 마을을 덮쳤다. 불과 100초만에 마을은 14m 높이의 흙더미로 뒤덮였다. 한 곳은 최대 45m 높이의 흙더미에 뒤덮이기도 했다.

기차를 타고 구조대가 도착해 구조작업이 시작됐다. 또한 부상자들을 안전한 지역으로 이송했다.

광산 내에서 일하던 광부 17명은 입구가 막히는 바람에 갇혀버렸다. 환풍구도 막힌 상황에서 이들은 석탄 벽을 파내 출구를 만든 끝에야 13시간 만에 탈출할 수 있었다.

사고로 최소 90명이 사망했다. 희생자 상당수의 시신은 수습돼지 못했다. 한 시신은 사고 21년 후, 사고 지역에 도로를 공사하던 도중 발견되기도 했다. 이 사고는 캐나다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산사태로 기록됐다.

3. 사고 이후

3주 뒤 철도가 복구됐고, 인근 지역의 의료진이 탑승한 열차가 급히 파견됐다. 몇주가 더 지나 광산도 다시 열려 광부들이 일을 했다. 사고 현장 복구 도중, 광산에서 물건을 옮길 때 썼던 노새 한마리 살아있는 채로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말은 지하수와 나무 기둥을 뜯어 먹으며 간신히 버텨왔다. 안타깝게도 말은 구조 이후 음식을 먹다가 구조대가 음식을 너무 과하게 먹이는 바람에 폐사했다. 광산은 1917년에 폐광됐다.

지질학자의 조사 결과, 산사태가 언제 또 일어날지 모른다는 결과가 나왔다. 1912년, 캐나다 정부는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해 프랭크 마을의 모든 주민들을 타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사고 당시 사람들을 태워다 대피시킨 열차 기관사 스포케인 프라이어(Spokane Flyer)는 소속 회사 CPR(Canada Pacific Railway)로 부터 표창장과 함께 당시 돈 25달러의 수표를 받았다.

지역은 방치되다가 개발되어 도로가 들어섰다. 또 사고 당시를 기리는 추모비와, 사고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안내판 등이 들어와 연간 10만여명의 관광객이 들리는 관광 장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