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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데 멘도사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과달루페 후작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 멘도사 이 멘도사
Francisco López de Mendoza y Mendo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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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 멘도사 이 멘도사
Francisco López de Mendoza y Mendoza
출생 1547년
스페인 제국 그라나다
사망 1623년 3월 1일
스페인 제국 마드리드
아버지 이니고 로페스 데 멘도사 이 멘도사
어머니 마리아 데 멘도사
형제 루이스 우르타도, 이니고, 베르나르디노, 엔리케, 후안 우르타도, 엘비라, 페드로 곤살레스, 카탈리나
배우자 마리아 루이스 데 리오리 콜론 이 카르도나
자녀 마리아
직위 과달루페 후작, 네덜란드 총독 알브레히트 7세의 부관, 플란데런 주둔 스페인 테르시오 지휘관, 폴란드, 독일, 프라스 대사, 시구엔사 주교.

1. 개요2. 생애

1. 개요

스페인 제국의 후작, 군인. 영국-스페인 전쟁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생애

제3대 몬데하르 후작 이니고 로페스 데 멘도사 이 멘도사와 인판타도 공작 이니고 로페스 데 멘도사 이 피멘텔의 딸 마리아 데 멘도사의 넷째 아들로, 아버지가 그라나다 총독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알함브라 궁전에서 태어났다. 형제로 아래의 8명이 있었다.
  • 루이스 우르타도 데 멘도사(1543~1604): 제4대 몬데하르 후작, 제5대 텐디야 백작. 그라나다 수비대 대장, 알함브라 소장을 역임했다.
  • 이니고 로페스 데 멘도사 이 멘도사(1546-1601):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이자 교회법 교수였으며, 파리와 베네치아 주재 대사였다. 1600년에서 1601년 사이에 아내와 사별한 뒤, 예수회에 입회했다.
  • 베르나르디노 로페스 데 멘도사(?~1580): 톨레도 대성당의 참사 위원이자 수장, 카푸아와 산 페드로 데 아레나의 수도원장.
  • 엔리케 로페스 데 멘도사(1555~1590):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 살라망카 대학교에서 학생으로 재학 중 사망.
  • 후안 우르타도 데 멘도사(1555~1624): 엔리케 로페스의 쌍둥이. 제6대 인판타도 여공작 아나 데 멘도사 이 엔리케스 데 카브레라와 결혼.
  • 엘비라 데 멘도사(1565~?): 제5대 빌라프랑카 델 비에르소 후작 페드로 데 톨레도 오소리오의 부인.
  • 페드로 곤살레스 데 멘도사(1555~1610): 몰타 기사단의 기사, 히베르니아 수도원장.
  • 카탈리나 데 멘도사: 푸에블라 델 마에스트레 백작 알론소 데 카르데나스의 부인.

12살 때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기사로 발탁되었고, 형제들과 함께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교에서 예술을, 살라망카 대학교에서 철학법학을 공부했다. 훗날 코리아 주교가 되는 페드로 가르시아 데 갈라르사의 지도 아래 성경도 공부했다. 1567년 모리스코인들이 알푸하라스 반란을 일으키자, 프란시스코는 아버지 휘하 군대에 들어가 대위를 맡았으며, 2년 후 아버지가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로 교체될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이후 아버지가 로마 대사, 발렌시아 총독(1572~1575), 나폴리 총독(1575~1579)을 역임할 때 동행했으며, 이러한 공로로 칼라트라바 기사단에서 발데페냐스 훈장을 받았다.

1584년, 아라곤 제독이자 과달루페 후작인 산초 데 카르도나와 마리아 콜론의 딸이며 푸엔테스 백작 후안 펠리페 페르난데스 데 에레디아의 미망인인 마리아 루이스 데 리오리 콜론 이 카르도나와 결혼했다. 신부의 아버지는 결혼 조건으로 프란시스코가 카르도나 가문의 성과 문장을 "어떠한 혼합도 없이" 사용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 후 그는 결혼 생활 동안 '프란시스코 데 카르도나'로 알려졌다. 장인과 처남인 크리스토발 데 카르도나가 사망한 후, 그의 아내 마리아가 가문의 상속인이 되었고, 프란시스코는 그때부터 자신을 아라곤 제독이자 과달루페 후작이라고 칭했다. 그는 이러한 직함과 함께 베라과 공국, 자메이카 후작령, 인도 해군성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카르도나 가문과 콜론 가문 사이에 있었던 소송도 넘겨받았다. 수년간 지속된 소송은 그에게 빚을 지게 하는 끊임없는 지출의 원천이었다.

1590년, 알바 공작 안토니오 알바레스 데 톨레도는 초대 알칼라 공작 페르 아판 엔리케스 데 리베라의 딸 카탈리나 데 리베라와 약혼했지만, 프란시스코는 이를 훼방 놓고, 안토니오 알바레스가 자신의 친척인 인판타도 공작 이니고 로페스 데 멘도사의 딸 멘시아 데 멘도사와 결혼하도록 했다. 이에 알칼라 공작 가문이 반발하면서 논란이 확산하자, 펠리페 2세는 이 일에 개입한 모든 사람을 처벌하기로 했다. 알바 공작, 인판타도 공작, 카스티야 제독 루이스 엔리케스 데 카브레라, 파스트라나 공작 루이스 2세 데 실바 이 멘도사, 알렌케르 공작 디에고 데 실바 이 멘도사는 모두 투옥되거나 추방되었다. 프란시스코는 투레가노 성에 감금되었다가, 나중에는 칼라트라바 라 누에바로 이송되었다.

프란시스코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아내가 사망했다. 그들에게는 마리아라는 딸 하나만 있었는데, 그나마도 유아기에 사망했다. 이후 예수회 친구들을 통해 디에고 페르난데스 데 카브레라의 누이인 멘시아 데 라 세르다와 그의 결혼이 계획되었다. 독신 생활과 심각한 재정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프란시스코는 이를 이루려고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신부 집안이 예기치 않게 약혼을 파기하면서 무산되었다.

1592년 감옥에서 풀려난 뒤 2년 후 복권되어 펠리페 2세의 집사로 선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이었던 알브레히트 7세의 수석 집사로 선임되었다. 이후 플란데런 방면 테르시오 부대 지휘관을 맡았고, 1597년 알브레히트 7세와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의 결혼, 펠리페 왕자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여대공의 결혼을 성사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갔으며, 1598년 스페인과 프랑스의 평화 협약인 베르벵 조약 체결을 위해 프랑스로 파견되었으며, 폴란드, 헝가리, 슈타이어마르크,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여러 사절단에 참여했다. 그는 알브레히트 7세의 신뢰를 받는 고문이 되었고, 알브레히트 7세가 결혼식 때문에 자리를 비운 동안 총독부를 책임졌다.

1598년 9월, 프란시스코는 알브레히트 7세의 지시에 따라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라인강 하류의 강둑에 있는 오르소이를 접수한 뒤, 라인강을 건너 9월 24일 알펜에 무혈입성하고 이틀 후엔 브로이히 성을 점령했다. 10월 12일에는 1년 전 1차 라인베르크 공방전에서 상실했던 라인베르크 요새 역시 가볍게 되찾았다. 그 후 프란시스코는 군대를 나누었다. 한 부대는 헬러 지방을 침공했고, 11월 8일에 두팅험 마을을 접수했다. 그 사이에 나머지 부대는 리페강을 건너 10월 30일에 라인강 하류의 도시 리스로 진군해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스페인군은 리스 주변 지역과 뮌스터 주교령에 겨울 숙영지를 마련했다.

1599년 4월, 알브레히트 7세는 헬러로 진군해 마우리츠의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과 대치하면서, 프란시스코에게 스페인인 사이에서 "섬으로 가는 열쇠"라고 불렀던 센켄샨츠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센켄샨츠를 공략한다면, 스페인군은 네덜란드 공화국과 독일 간의 연락망을 끊어서 네덜란드를 고립시킬 수 있었다. 프란시스코는 지시에 따라 보병 17,000명, 기병 2,000명, 그리고 공성무기들을 이끌고 센켄샨츠로 진군했다. 그러나 센켄샨츠 공방전에서 적의 예상치 못한 거센 저항에 고전하다가, 왈롱 출신의 클로드 라 바로트가 이끄는 네덜란드군 5천 명이 미사강 상류에서 비밀리에 출발해 봄멜러바르트의 헤델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란시스코는 900명만 있는 센켄샨츠를 굳이 공략하기보다는 5천 적병을 섬멸하는 쪽이 네덜란드 공화국에 더 큰 타격을 입힐 거라고 판단하고, 센켄샨츠의 포위를 푼 뒤 적병 5,000명을 격파하러 출진했다.

클로드 라 바로트의 군대는 프란시스코의 스페인군이 추격하는 가운데 북쪽의 잘트봄멜로 후퇴했고, 스페인군은 그들을 추격해 5월 15일 케셀과 테렌사이의 뫼즈강을 건너 봄멜러바르트 섬에 있는 잘트봄멜 요새를 포위했다.(잘트봄멜 공방전) 그러나 수비대가 강력하게 저항했고, 마우리츠가 선박 다리를 통해 보급을 꾸준히 공급했기에 막대한 손실만 볼 뿐 공략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6월 13일 플란데런으로 퇴각했다. 잘트봄멜 공략이 실패로 돌아간 후, 스페인군은 거듭된 패배로 군기가 문란해졌고, 급료가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는 현실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대거 탈영하거나 폭동을 일으키면서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스페인 측은 이 상황을 수습하느라 플란데런 방면군의 모든 추가 공세를 보류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스타트허우더 마우리츠는 적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1600년 1월 반격 작전을 감행해 와흐텐동크에 무혈 입성했고, 뒤이어 크레브쿠어 요새를 포위해 급료 미지급에 불만이 많던 수비대에게 상당량의 금화를 지급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스페인군이 잘트봄멜 공방전을 치르는 동안 건설했던 산안드레스 요새를 포위했다. 프란시스코는 이곳마저 네덜란드 공화국을 정복할 원정군의 교두보를 완전히 상실하기에 루이스 데 벨라스코에게 4,000 병력을 맡겨 구원에 착수하게 했지만,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이 포위선을 철저히 요새화한 데다 산안드레스 요새로 접근하는 모든 길이 연합군의 제발 건설로 인해 강물로 침수되면서 좀처럼 접근하지 못하다가 결국 철수했고, 산안드레스 수비대는 구원이 올 가망이 없자 항복했다.

1600년 7월 2일 니우포르트 전투에서 선봉대를 이끌고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을 상대로 분전했지만, 끝내 패전을 면치 못하고 생포되었다. 마우리츠는 그날 저녁 시간을 프란시스코와 함께 보내면서, 그가 4년 동안 군대로 여러 번 시도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홀란트에 발을 들이는 일을 포로가 됨으로써 마침내 달성했다고 조롱했다. 그 후 프란시스코를 돌려보내는 문제를 놓고 협상이 장기간 이어진 끝에,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은 1602년 5월 29일에 프란시스코를 스페인에서 갤리선 노예로 잡혀 있던 네덜란드 선원 400명과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풀려난 프란시스코는 오스텐트 공방전에 참여해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 기병대 지휘관을 맡았으며, 오스텐트를 구하기 위해 진군하는 마우리츠에 맞서 티엔에서 견고한 방어막을 갖췄다. 마우리츠는 적군을 야전에서 물리치려 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다. 이후 마우리츠는 그라브 또는 펜로를 포위 공격하기 위해 북상했고, 이중 그라브를 택했다. 프란시스코는 2차 그라브 공방전을 단행한 마우리츠를 물리치려 했지만, 적의 방비가 워낙 탄탄해 손실만 보다가 펜로로 후퇴했고, 구원의 희망을 잃은 그라브 수비대는 항복했다.

펜로로 이동한 스페인군 중 1,000~1,800명은 급료를 오랫동안 받지 못해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했고, 연이은 패배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 그들은 처음에는 하몽에서 봉기를 일으킨 뒤 브뤼셀의 스페인 총독부에 급료를 제대로 주고 반란에 대한 사면을 요구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가 자기들을 진압하려고 병사 3,700명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은 브레다에서 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후흐스트라텐 성으로 도망쳤다.

그 후 각지에서 반란의 동기에 공감한 장병들이 속속 모이면서 수천 명으로 불어났고, 군인 공화국인 '후흐스트라텐 연합'이 결성되었다.(후흐스트라텐 반란)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에 급료를 받지 못한 스페인군이 반란을 일으키는 일은 흔히 벌어지는 현상이었지만, 이번 반란은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1603년 여름, 프란시스코는 12,000~1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후흐스트라텐으로 진군했다. 반란군은 이에 대응해 마르크 강에 3개의 댐을 건설하여 성 주변 지역을 침수했다. 또한 그들은 마우리츠와 협상을 시작해 자신들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마우리츠는 그들이 네덜란드 공화국의 영토를 침범해 약탈하지 않는 걸 전제로 도와주기로 했다. 또한 방어를 위해 후흐스트라텐 성에 병사 600명을 남기고, 나머지는 브레다로 이주해 네덜란드군에 합류하기로 했으며, 스페인군이 후흐스트라텐 성을 공격하면 마우리츠가 구원하기로 했다.

7월 26일 후흐스트라텐에 도착한 프란시스코는 포위 공격을 시작했지만, 반란군이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한 데다 사방이 침수되어서 성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 이에 성 주위를 포위해 포격을 가하면서 고사시키는 전술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8월 8일 마우리츠가 14,000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워텔에 진영을 구축해 스페인군을 압박했다. 게다가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프란시스코는 이대로 전투를 이어가 봐야 답이 안 나온다고 판단하고 8월 10일 밤에 폭우 속에서 신트레나르츠를 거쳐 퇴각했다.

1603년 펠리페 3세의 명령으로 루이스 데 벨라스코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스페인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마드리드에 도착하기도 전에 오스텐트 공방전에서 실패를 거듭하면서 궁정의 신임을 잃어버린 알브레히트 7세에게 지나치게 충성한다는 이유로 궁정에 접근하지 말라는 통보받았고, 스페인 함대의 아일랜드 원정 실패의 책임을 짊어진 후안 델 아길라와 함께 적에게 이로운 짓을 했다는 반역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밀라노 총독과 아라곤 부왕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두 직책 모두 실제로 맡지는 못했다.

베라과 공국과 자메이카 후작령의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은 계속 진행 중이었는데, 결국 프란시스코에게 불리하고 누뇨 데 포르투갈에게 유리하게 판결되었다. 그는 동시에 진행하던 몬데하르 후작령 소송에서도 패소했는데, 이 후작령은 그의 형 루이스가 사망한 후 조카 이니고 에게 넘어갔다. 그는 두 소송 모두에서 투자했던 돈과 이 영지들이 창출하던 상당한 수입을 모두 잃었다.

1606년, 프란시스코는 비야롱가 백작 페드로 프랑케사를 알현하려 했으나, 문지기가 거절하자 그의 하인 하나가 문지기와 언쟁을 벌이다가 몸싸움으로 이어졌다.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프란시스코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레르마 공작 프란시스코 데 산도발 이 로하스와 그의 부하들인 로드리고 칼데론, 그리고 프랑케사는 이 사건을 구실로 프란시스코를 토레혼 데 벨라스코 성에 감금하고 나중에는 마드리드에서 추방했다. 그의 박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3년 후, 그는 명확한 이유 없이 체포되었는데, 정부를 비판하는 팸플릿 출판에 관여했다는 혐의, 알브레히트 7세에게 플란데런 영토를 스페인 왕실에 반환하지 말라고 권고했다는 혐의, 혹은 단순히 정적들의 시기심 때문이라는 등의 주장이 제기되었다. 프란시스코는 형인 후안 데 인판타도 공작의 구명 운동에도 불구하고, 법적 절차가 전혀 진전되지 않은 채 토레모차 데 산토르 카스 성에 5년간 감금되었다.

1611년 프랑스와 스페인 왕실 간에 체결된 혼인 협정을 기념하고, 그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프란시스코는 토레모차 데 산토르 카스 성에서 나와 산 바르톨로메 데 루피아나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얼마 후 펠리페 3세는 그를 석방하고 압류되었던 그의 재산을 반환하라고 명령했다. 고령인 데다 오랜 투옥 생활로 건강이 악화했고, 빚에 허덕였던 그는 형 후안의 도움으로 과달라하라에서 여생을 보냈다. 1617년 사제로 서품된 그는 1622년 새로 즉위한 펠리페 4세로부터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고 부당한 투옥에 대한 보상으로 시구엔사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종교재판관 안드레스 파체코에 의해 주교로 서품되었지만, 시구엔사에 도착하기 전인 1623년 3월 1일 마드리드에서 병사했다. 그의 유해는 알칼라 예수회 대학의 예배당에 묻혔다가 1632년 교회 내 주 금고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