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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산시 舟山市 | 딩하이구 定海区 푸퉈구 普陀区 다이산현 岱山县 성쓰현 嵊泗县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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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마크인 푸퉈산 (보타산) 해수관음상
중국 4대 불교 성지 중 하나인 푸퉈산의 보탑강사 (宝陀讲寺) & 불긍거관음원 옆의 신라초 (新羅礁) |
본섬 딩하이구의 시가지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의 지급시 | |||||
[ruby(舟山, ruby=Zhōushān)][ruby(市, ruby=Shì)] | [ruby(舟山, ruby=Tseuse)](T1)[ruby(市, ruby=Zr)](T3) 저우산시 | Zhoushan City | |||||
시정부 소재지 | 저장성 저우산시 딩하이구 하이톈다다오681호 浙江省舟山市定海区海天大道681号 | ||||
지역 | 화둥 | ||||
면적 | 1,378km² | ||||
하위 행정구역 | 2구 2현 | ||||
시간대 | UTC+8 | ||||
인문 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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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밀도 | 840명/km² | ||||
민족 구성 | 한족 98.98% | 묘족 0.28% 토가족 0.26% | 회족 0.10% | ||||
HDI | 0.795(2016) | ||||
서기 | 허중웨이(何中伟) | ||||
시장 | 쉬런뱌오(徐仁标) | ||||
GRDP | 전체 | $237억 8,825만 (2020) | |||
1인당 | $20,545 (2020) | ||||
상징 | 시화 | 수선화 | |||
시목 | 참식나무 | ||||
차량번호 | 浙L | ||||
행정구역 약칭 | 舟 | ||||
행정구역코드 | 330900 | ||||
지역전화번호 | 0580 | ||||
우편번호 | 312000 | ||||
ISO 3166-2 | CN-ZJ-09 | }}}}}}}}} | |||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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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저장성 동부의 지급시. 상하이에서 동남쪽으로 120km, 닝보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진 저우산 (주산) 열도에 위치한다. 관할 인구 115만명 중 주섬이자 도심인 저우산섬 (舟山岛)[1]에 80만이 거주한다. 중국에서 섬 만으로 이루어진 유일한 지급시이다. 양산심수항 일대는 수심이 깊고 해안선이 복잡하여 배를 정박하기에 좋다.따라서 고대부터 항저우를 중심으로 한 첸탕강 하구 지역의 무역 거점이었다. 특히 산둥 반도와 함께 한반도와의 교역이 활발했기에 신라초와 신라촌 등의 흔적이 있다. 현재도 한국의 인천광역시와 자매도시이며, 푸퉈구는 강화군 및 곡성군과 우호 교류 협정을 맺었다. 중국 최대의 어업 도시이고, 조선업 역시 발달하였다. 2006년에 닝보항과 합쳐진 닝보-저우산항 (寧波舟山港)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컨테이너 항이다. 신라인 상인이 봉안한 보타산 (푸퉈산) 불긍거관음원과 남해관음상 (南海觀音像), 해양박물관 등이 주요 관광지이다.
2. 역사
916년에 창건된 관음 사찰 보제사 (普济禅寺)
고대에는 닝보 (영파)에서 바다와 합류하는 용강 (甬江) 하구 동쪽에 있다 하여 용동 (甬東), 혹은 바다 한 가운데에 있다 하여 해중주 (海中洲)라 불렸다. 진한 대에부터는 닝보에 설치된 회계군 구장현 (句章縣)에 속하였다. 동진 시기 손은의 반란 시에 그 거점 중 하나였다. 당나라 대인 738년에 처음으로 경내 옹산에서 비롯된 옹산현 (翁山縣)을 설치하였다. 명주 (明州)에 속하였고, 5리의 성벽이 세워졌다. 다만 771년 보승 (寶勝) 연호와 함께 칭제한 원조 (袁晁)의 반란으로 폐현되었고, 다시 구장현 관할이 되었다. 당대에 주산 군도는 관음 신앙의 중심이 되었고, 출항을 앞둔 선원들이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였다. 9세기 중반 일본 임제종의 창시자인 승려 혜악 (慧鍔)이 신라초에서 배가 걸리자 관음 보살께 기도를 올려 구조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송나라 시기 해상 실크로드가 활성화되며 거점으로써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왕안석의 건의로 재차 현을 두며 '국가를 번창하게 한다'는 뜻인 창국현 (昌國縣)이라 명명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류황도 (六橫島) 태평묘에는 왕안석 조각상이 있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 역시 주산 군도를 거쳐 한반도로 향하였다. 원대인 1278년에는 원나라의 일본 원정의 준비를 위해 조선소가 설치되며 창국주 (昌國州)로 승격되었다. 2년 후 현으로 돌아갔으나 1290년 재차 창국주가 되었다. 1319년 원 조정의 허가 하에 강소 지방을 유람한 고려 충선왕이 이제현을 대동하고 이곳의 보타산을 찾아 글을 지었다. 이때 중국의 화공 진감여 (陳鑑如)가 그린 이제현의 초상은 국보 110호이다.
명나라 수립 후 1369년 다시 창국현으로 격하되었고 1379년 성벽을 복구하였다. 다만 1386년 왜구에 대응한 해금정책의 일환으로 현이 폐지되어 일창국향 (一昌國鄉)으로 격하되어 영파의 정해현 (定海縣)에 속했다. 1387년에는 공도정책으로 섬 주민들을 내륙으로 소개시켰다. 빈 섬은 절강 상인들과 포르투갈 인들의 상관이 세워졌다. 그러던 1548년 절강순무 주환 (朱紈)이 병력을 파견해 불도섬 (佛渡岛) 상서항 (双屿港)의 포르투갈 성채를 공격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돌과 나무로 항구를 막고 성을 불태우자 수백의 포르투갈 인들은 모두 죽거나 해상 도피하였다. 1554년 왜구가 성을 점령하고 약탈하며 재차 쇠퇴하였다. 1651년 청나라 군대가 섬을 점령, 성벽을 허물었다.
강희제의 친필인 정해산 현판
청대에도 이어지던 해금 정책은 1683년 강희제가 동녕 왕국을 멸하고 대만을 정복한 후 풀렸다. 이로써 주산 군도의 인구는 증가하였고, 1687년 6월 재차 현이 설치되었다. 청조는 본래 영파에 있던 정해현 (定海縣)이라 명명하였고, 기존 정해현은 전해현으로 개칭되었다. 18세기 들어 영국이 홍모관 (紅毛館)이란 상관을 세워 무역 거점으로 삼기도 하였다. 다만 1760년 청조가 모든 대외 무역을 광저우의 공행으로 일원화시키자 철수하였고, 그후 청나라의 군사 기지가 되었다. 1793년 매카트니 사절단의 요구 사항 중 하나는 저우산의 요새화되지 않은 섬에 유럽인의 왕래와 거주, 정박, 창고 설립을 허가해달라는 것이었다. 홍콩이 한적한 어촌일 무렵 저우산은 이미 16세기부터 열강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2.1. 외세의 침탈 (아편전쟁)
1841년 제1차 아편전쟁 당시 영국군에게 점령당한 저우산
요구가 거절됨으로써 촉발된 1840-42년 제1차 아편전쟁 시에는 포격전 끝에 영국군이 청나라 측의 포대를 파괴하고 정해현을 두 차례 점령, 아문관 (衙門管)을 두어 다스렸다. 난징 조약에 따라 영국군은 1846년 'Chusan'으로 일컫던 정해현에서 철수하였다. 영국 정부는 이미 중요한 항구였던 저우산을 두고 '집 한채 없는 황량한 섬'인 홍콩을 할양받은 것에 격분했다. 그후 청조는 정해직예청 (定海直隸厅)을 설치하여 해안 수비를 강화하였고, 흠차대신 유겸 (裕謙)의 주청에 따라 정해도두 (定海道頭)라 불리는 토성을 쌓고 포대를 설치하였다. 그럼에도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당시 영국군에게 다시 점령당하였다. 1862년 2월에는 태평천국의 장수 왕의균이 섬을 점령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전사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군이 섬을 장악, 현으로 복귀하였다. 중일전쟁 당시 일대는 일본군에게 우선적으로 점령되었다.
2.2. 현대
1963년의 저우산 항구
1942년 10월 영국인 포로를 운반하던 일본 선박 리스본 마루를 미국 잠수함 (USS Grouper)이 어뢰로 공격하여 저우산 군도의 동부인 칭방 섬(青浜岛)에서 격침시켰다. 승선 인원 대부분이 익사하였고, 주변 어부들이 384명의 영국인 포로를 구출하였다. 중화민국기인 1946년 북쪽의 성쓰열도(嵊泗列岛)가 따로 장쑤성의 열도직할구로 분리되었고, 1949년 현이 되었다. 같은해 딩하이현에서 웡저우현(翁洲县)이 분리되었다.
현대 저우산 시가지
한편 국공내전에서 수도 난징이 함락되고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이후에도 저우산은 여전히 제해권을 장악한 국민당군 수중에 있었다. 대륙 회복의 주요 거점으로서 저우산 군도를 고평가한 장제스는 1949년 10월 저우산을 친히 방문하여 주둔군을 9만으로 증강, 장강 하류 일대를 봉쇄하였고 1950년 초 다이산섬(垈山島)에 공군 비행장이 완공되자 저우산에서 이륙한 국민당군 공군기들이 난징, 상하이, 항저우 일대를 폭격, 특히 상하이의 산업시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인민해방군은 눈엣가시와도 같은 저우산 점령을 결의하고 1949년 10월 초 저우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서 다셰섬(大榭島), 진탕섬(金塘島), 타오화섬(桃花島), 류헝섬(六橫島) 등 여러 섬을 점령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11월 초 저우산 본섬 공략에 필요한 거점인 덩부섬(登步島) 점령에 실패하여 저우산의 완전 점령까지는 나아가지 못 했다.
그러나 타이완 다음으로 국민당의 가장 큰 거점이던 하이난이 함락되고 인민해방군이 당시 최신형 제트전투기인 MiG-15까지 도입하면서 국민당군이 저우산을 방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인 장강 하류 일대의 제해권과 제공권이 위협받자 타이완 우선 정책의 일환으로 장제스는 1950년 5월 저우산의 주둔군 철수를 지시하였다. 5월 13일부터 16일까지 저우산에 주둔하던 12만 명의 국민당군과 2만 명의 주민들은 야음을 틈타 인민해방군의 눈을 피해 타이완으로 철수했고 5월 17일 인민해방군은 드디어 저우산을 접수하였다. 이후 닝보시에 소속되었던 군도는 1953년 저우산 전구로 편성되었다. 1960년 닝보에 이어 상하이의 관할에 놓였지만 1962년 다시 전구가 되었고, 1967년 지구로 편성되었다. 1987년 지급시로 승격되었고, 개혁개방의 일환으로 개방 도시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경제 특구로 지정되어 발전하였다.
3. 교통
철도는 상하이 동남쪽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에서 저우산(舟山)을 잇는 고속철도 전용 철도 구간에 중국 최초로 고속철용 해저터널을 건설할 예정으로 2019년에 착공을 시작해 2025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또한 도로-철도를 합친 병렬교량을 건설할 예정이며 2023년 7월 충칭-닝보·저우산 정기화물열차가 개통되었다.또한, 경전철노선도 구축할 예정이다.
도로는 2009년 12월 25일부터 닝보시와 여러 과해교량으로 구성된 G9211 융저우고속공로(甬舟高速公路)로 이어져 있으며#, 상하이항의 유일한 심해항인 양산심수항이 있는 성쓰현 양산진의 치취열도(崎岖列岛)지역은 상하이시 푸둥신구와 둥하이 대교로 연결된 상태다. 성쓰현은 저우산 섬보다 상하이와 더 가깝고 1962년까지는 실제로 저우산 군도가 상하이 소속이었으므로 사실상 상하이의 부속도서나 다름없으며 흔적으로 상하이 우편번호를 사용한다.
공항은 다리로 연결된 동남쪽의 주자젠도에 저우산 공항이 있다.
4. 군사
동해함대 사령부가 있는 닝보에서 가까운 섬인 관계로 구축함 3지대와 6지대를 포함한 동부전구해군의 주력부대가 저우산시에서 주둔한다.5. 갤러리
중국 푸지사 (보제신사 普济禅寺)
보탑강사 전경
해수관음상
[1] 중국에서 3번째로 큰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