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12 14:09:06

페테르 데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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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페테르 데얀.jpg
이름 페터르 데얀
(영어: Peter Delyan, 불가리아어: Петър Делян)
출생 미상
사망 1041년
직위 불가리아차르
반란 대상 미하일 4세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반란자. 불가리아 제국의 부활을 꾀하고자 미하일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1년만에 진압당했다.

2. 생애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불가리아 차르 가브릴 라도미르의 아들이자 바실리오스 2세를 상대로 혈전을 벌였던 사무일의 손자라고 한다. 또한 어머니는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1세의 여동생 마르가리타라고 한다. 1015년 부친이 이반 블라디슬라프에게 살해당하고 차르 자리를 찬탈당한 뒤 유폐 생활을 하다가 1018년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당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가 어느 동로마 귀족하인이 되었고, 기회를 틈타 탈출하여 어머니의 나라 헝가리로 돌아간 뒤 다시 불가리아로 잠입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의 주장의 신빙성이 높지 않다고 본다. 이반 블라디슬라프가 사촌 라도미르를 시해하고 차르 직위를 찬탈한 뒤, 라도미르의 자식들을 살려둘 이유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블라디슬라프는 세르비아계 두클랴 대공 요반 블라디미르 역시 라도미르의 사위라는 이유로 죽여버렸다. 학자들은 페터르의 정체는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한 뒤 세르비아 지역에서 조용히 지내던 농민이었을 거라 추정한다.

1040년 당시 불가리아인들은 제국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다. 미하일 4세의 형이자 환관인 요안니스 오르파노르포스는 과도한 세금을 매긴 데서 그치지 않고 바실리오스 2세 이래 현물로 세금을 납부해오던 그들에게 현금 납부를 강요했다. 이로 인해 세금을 마련하기 곤란해진 불가리아인들은 제국의 통치에 반감을 품었다. 그는 이러한 민심을 읽고 베오그라드에서 불가리아의 부활을 선포하고 자신을 차르 페터르 2세로 칭했다. 이후 니시스코페를 공략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억류되어 있던 그의 사촌 알루시안이 탈출한 뒤 반란군에 합류했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불가리아 서부에서 비잔티움 세력을 몰아낸 다음 북부 그리스를 침공했다. 그해 말, 그들은 다라키온을 손에 넣고 아드리아 해로 나가는 길을 확보한 후 곧이어 남쪽의 레판토 만까지 진출한 후 동쪽의 테베를 공략하려 했다.

사태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미하일 4세는 친정을 선포했다. 당시 그는 괴저병으로 두 다리가 끔찍하게 부어올라 거의 마비 상태였고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심했다. 형제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극구 만류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그는 자기 치세에 제국의 영토가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면서 적어도 줄어들게 놔두지는 않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반면 페터르와 알루시안은 서로 분열했다. 페터르는 알루시안에게 테살로니키를 공격할 군대를 주었지만, 알루시안은 동로마군의 반격으로 참패하고 오스트로보로 돌아왔다. 페터르는 크게 실망하여 알루시안을 질책했다. 그러자 알루시안은 페터르가 자신을 숙청할 것을 우려하여 1041년 어느 날 밤 저녁 식사 중 페터르가 술에 취한 틈을 타 부엌칼로 그의 눈을 찌르고 코를 잘랐다.

그 후 알루시안은 봉기가 성공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황제에게 항복할 테니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달라고 제안했다. 이리하여 미하일은 1041년 초에 눈과 코를 잃은 페터르를 비롯한 수많은 포로들을 거느리고 수도에 개선했다. 그는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반란의 수괴로서 처형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