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패수(浿水) 또는 패강(浿江), 패하(浿河)는 한국사의 문헌 기록에 등장하는 강의 이름이다. 패서 지방이나 패강진 등은 여기서 파생된 지명이다.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조선전(朝鮮傳)에 기록된 고유명사로 '열수(列水)'와 아울러 일찍이 중국에 그 이름이 알려진 강이다.그 위치에 대하여는 학설이 다양하며, 패수를 어디로 비정하느냐에 따라 여러 고대 국가들의 강역이 달라질 수 있어 중요하다. 또한 패수라는 이름은 시기별로 그 지칭 대상이 다르다. 시대를 막론하고 대략적으로 한반도 서북지역의 강으로 비정되나, 고조선 대에는 주로 압록강 또는 청천강, 삼국시대 이후로는 대동강, 예성강 등이 후보로 꼽힌다. 아예 '패'라는 명칭이 보통명사였고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다는 설도 있다.
현존하는 연·진 장성 유적은 랴오닝성 북쪽에 남아 있고, 끝으로 보이는 양평은 요하의 동쪽인 요양으로 위치가 추정되고 있기에 고조선 때의 패수는 요하유역으로 볼 수 없고 청천강이나 압록강으로 봐야한다는게 일반적이다.[1]
2. 고조선 시대의 패수
고조선 시대의 패수는 한나라와의 경계였다. 이때의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 학계에서 논란이 아주 많다. 대표적인 설로 청천강설, 압록강설, 혼하설, 대릉하설, 난하설이 있다. 학계 주류에서는 청천강설, 압록강설, 혼하설 3가지가 주로 언급된다.2.1. 청천강설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패수를 청천강에 비정했으며, 이를 사학자 이병도가 고고학적으로 고증했다. 중국 계통 유물(명도전이나 철기 등)과 조선 계통 유물(세형동검 등)의 출토지가 청천강을 경계로 뚜렷이 구분되고 있다. 청천강 이남으로 제한된 세형 동검의 출토 범위와 한반도 북부까지 진출한 연의 흔적(연화보 - 세죽리 문화권)과도 대강 합치한다.청천강설을 주장한 국내 학자로 이병도, 송호정[2]이 있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청천강설이 통설이다.
2.2. 압록강설
노태돈 교수에 따르면 연진장성의 동단이 요하 이동까지 미쳤으므로 패수를 요하 이서에서 찾을 수는 없고 요하 동쪽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명도전을 비롯한 중국계 유물의 분포가 청천강을 경계로 하므로 청천강이 진나라와의 경계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중국은 진나라 이후 한나라 때 경계를 후퇴하여 패수를 경계로 했는데 이때 패수로 비정할 수 있는 강은 압록강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한다.압록강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노태돈, 이종욱, 오강원 등이 있다. 현재 남한 학계의 다수설이다.
2.3. 혼하설
혼하는 요하 바로 동쪽에 있는 강으로, 소요하라고도 불린다. 혼하설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조선 후기의 문신 성해응(1760~1839)이다. 그는 『연경재전집』 권 15 패수변에서 고조선의 패수는 혼하라는 것을 논증했다.근현대에 들어서 남한에서는 서영수가 혼하설을 최초로 주장했다. 이후 박준형은 『전한기』의 기록을 근거로 혼하설을 주장하였다. 2010년대부터 혼하설이 학계의 대세로 떠올랐다.
혼하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서영수, 박준형, 오현수, 조원진 등이 있다.
2.4. 대릉하설
리지린을 포함한 여러 북한학자가 주장한 설이다. 북한 학계에서는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도 대릉하설이 주류 학설이다. 남한에서는 신용하가 이 설을 지지한다.2.5. 난하설
국내의 윤내현이 주장한 설이다. 그에 따르면 난하가 고대의 요수이며, 패수라고 한다. 이 설을 이덕일, 복기대, 김종서 등이 지지하고 있는데, 보면 알겠지만 하나같이 유사역사학과 관련된 인물들 뿐이다. 이덕일은 조백하설을 덤으로 넣기도 한다.3. 삼국시대 및 남북국시대의 패수
삼국시대의 패수는 대동강 혹은 예성강이다. 낙랑군이 있던 시절에는 낙랑군 북부에 흘렀던 청천강을 패수라고 불렀지만,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축출된 이후로는 대동강을 패수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게 되었다.고구려의 수도 부근에 흘렀던 패수는 대동강으로 비정된다. 또한 735년(성덕왕 34)에 당나라가 정식으로 신라의 영유권을 공인[3]한 이른바 '패강 이남의 땅'의 패강도 지금의 대동강을 지칭한다.[4]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원전 6년(온조왕 13)경 백제의 북쪽 경계선으로 기술되어 있는 패하(浿河)는 예성강을 가리킨다.
통일신라 후기에 설치한 군진인 패강진은 대략 지금의 황해도 일대, 혹은 평양 일대까지 포함한 행정구역으로 여러 해석이 있는데 그 이름은 역시 패수의 다른 이름인 패강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통일신라 후기에 옛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고구려 계승의식을 가진 호족들의 본거지였던 패서 지방은 패수의 서쪽 지방이란 의미인데 이 경우는 예성강 서쪽으로 간주한 것이다.
4. 보통명사설
위와 같이 시대별로 지칭하는 강이 달라지는 듯한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아예 패수라는 명칭 자체가 국경을 이루는 강을 뜻하는 고대 서북한의 보통명사라는 설도 있다.우선, 강(江)이라는 한자는 원래 장강을 의미하는 고유명사였으며, 하(河)는 황하를 일컫는 고유명사였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흔히 '강(river)'이라고 부르는 민물에 대해서는 과거엔 '수(水)'를 붙여서 불렀다. 따라서 '패수'라는 단어는 바꿔서 표현하자면 이름이 '패'인 강이란 뜻이다.
헌데 '패'가 한민족이 쓰던 보통명사이고 이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라면 다른 언어권인 중국에서는 그냥 이걸 고유명사로 보고 '패수'라고 불렀을 수도 있다는 것. 실제로 특정 언어권의 보통명사가 다른 언어권에선 고유명사처럼 취급되는 경우는 흔하다. 영국의 지명인 토르펜하우 언덕은 4중 동어반복으로 유명하고, 이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몽블랑 산[5], 사하라 사막[6], 동티모르[7]처럼 사례를 찾아보면 꽤 빈번히 발견된다.
따라서 '패'가 원래 나라 끝에 위치한, 다시 말해 국경선을 이루는 강을 지칭하는 한민족의 보통명사인데 이걸 중국쪽 기록에서는 고유명사로 받아들여 '패수'라고 고유명사처럼 기록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설도 있다. 浿水에서 '浿'는 '水'를 수식하는 형용사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浿가 물이 가진 성격을 뜻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강의 이름이 패수라는 것은, 한반도 북서쪽 인근에 살던 사람들이 이 강을 부르던 말을 중국 측에서 '패'라는 발음으로 알아들었다는 뜻인데, 그 당시 浿의 발음은 정장상방(鄭張尙芳)의 상고음 재구 내용에 따르면 '*pʰaːds' 또는 '*pʰreːds'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그 사람들이 흐르는 강물을 가리켜 '푸르다'고 한 것을 당시 중국에서 '*pʰaːds' 또는 '*pʰreːds'정도의 발음으로 알아들어 그와 비슷한 음을 지닌 貝를 포함하고 물의 뜻을 지닌 한자인 '浿'를 만들어 이와 같은 이름을 붙였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이 설을 따르면 '浿'는 고대 한국어로 푸르다의 어근인 '푸르-'를 음차한 글자가 되는 것이다. 푸르다는 중세 한국어로 '프르다'였는데, '프르다'의 어근 '프르'의 발음을 IPA로 표기하면 /pʰɨɾɨ/가 되고 위 재구된 상고음과 매우 유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 패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2] 인터넷이나 일부 논문을 보면 송호정 교수가 대동강설이나 압록강설을 주장한다고 적혀진 부분이 종종 보인다. 하지만 송호정 교수는 대동강설도, 압록강설도 주장한 적이 없다. 패수가 대동강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구려의 패수가 대동강이라는 것이지 고조선의 패수가 대동강이라는 것이 아니다. 고구려의 패수와 고조선의 패수는 다른 강이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혼동하면 안 된다. 그리고 송호정 교수가 압록강설을 주장했다는 것은 송 교수의 글을 오해한 것이다. 송호정 교수는 고조선의 패수가 될 수 있는 후보지가 압록강과 청천강 두 가지라고 했을 뿐이다. 그는 압록강설을 계속 비판하고 있으며, 20년 넘게 청천강설을 고수하고 있다.[3] 732년 발해가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자 당 현종이 발해의 남부를 공격해달라는 요청을 신라가 받아들인 계기로 인정한 것이다. 발해 공격이 폭설로 실패하기는 했지만.[4] 패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5] 몽(Mount)이 프랑스어로 '산'이라는 뜻이다. 직역하자면 '흰 산'.[6] '사하라'가 아랍어로 사막이라는 뜻이다.[7] 마인어로 동쪽을 뜻하는 '티무르'가 살짝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