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와이흐 왕조 아미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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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 이븐 부야 934~949 | 판나 쿠스라우 949~983 | 아불 파와리스 983~98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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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리자르 마르주반 988~998 | 피루즈 카르샤드 998~1012 | 아부 슈자 1012~10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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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pad> | |||||
| 사산식 주화 양식으로 발행된 판나 쿠스라우의 금화(디나르). | |||||
| 출생 | 936년 9월 24일 | ||||
| 사파르 왕조 이스파한 | |||||
| 사망 | 983년 3월 26일 | ||||
| 부와이흐 왕조(아바스 왕조) 바그다드 | |||||
| 재위 기간 | 파르스의 아미르 | ||||
| 949년 ~ 983년 | |||||
| 케르만의 아미르 | |||||
| 967년 ~ 983년 | |||||
| 이라크 · 자지라의 아미르 | |||||
| 978년 ~ 983년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2F4F4F><colcolor=#fff> 본명 | 판나 쿠스라우 이븐 하산 부야 (Fanā Khusraw ibn Ḥasan Būya)[1] | |||
| 부친 | 하산 이븐 부야 | ||||
| 모친 | (불명) | ||||
| 자녀 | 아들 3명, 딸 2명 | ||||
| 이명 | 라카브 | ||||
| 국가의 기둥 (ʿAḍud al-Dawla) | |||||
| 아미르 중의 아미르(amīr al-umarā) | |||||
| 종교 | 이슬람 (시아파) | ||||
1. 개요
부와이흐 왕조의 제2대 아미르이자 샤한샤.본명인 판나 쿠스라우보다는 아바스 칼리파에게 받은 라카브(칭호)인 아두드 앗 다울라(عضد الدولة, 왕조의 기둥)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창건자 알리 이븐 부야의 사후 공중분해될뻔 했던 제국을 통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오만, 타바리스탄, 고르간, 자지라 등을 추가로 정복하여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의 치세에 부와이흐 왕조는 동쪽으로 페르시아만 연안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만, 예멘을 지나 페르시아와 이라크를 확고히 장악하였으며, 시리아 북부의 함단 왕조를 복속시키는 등 강대국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판나 쿠스라우는 동시대의 파티마 칼리파였던 알 아지즈와 함께 10세기 후반 최강의 군주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판나 쿠스라우는 서기 936년 9월 24일 이란 중부의 조그마한 도시 이스파한에서 태어났다.[2] 그의 부친은 부와이흐 왕조의 창건자인 알리 이븐 부야(이마드 앗 다울라)와 아흐마드 이븐 부야(무이즈 앗 다울라)의 형제이자 이란 중부의 지배자였던 하산 이븐 부야(루크 앗 다울라)였고, 모친은 이란 북부에 위치한 타바리스탄의 군벌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2.2. 파르스의 지배자로 등극하다
그가 12살이 되던 해인 948년, 후계자가 없었던 숙부 이마드 앗 다울라가 그에게 파르스 영지를 물려주었다. 그가 이듬해 12월에 사망하자 쿠스라우는 곧장 파르스의 아미르로 봉해졌으나 그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던 일부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쿠스라우는 부친과 숙부 아흐마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950년 초엽 이들의 개입으로 시라즈를 점령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반란을 진압하고 내부의 반대파를 숙청한 쿠스라우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 알 무티에게 서신을 보내어 '타즈 앗 다울라(국가의 왕관)'이라는 라카브를 요구했다. 하지만 후자는 이 칭호가 부와이흐 왕조의 통치자가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보다 우월함을 나타내는 것이라며 이 요구를 묵살했고, 대신 그에게 '아두드 앗 다울라(왕조의 기둥)'이라는 칭호를 하사하였다. 이에 쿠스라우는 자신이 본래 요청했던 칭호가 아니었음에도 별다른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고 이를 수락하였다.
955년 데일람계 장군 무함마드 이븐 마칸이 부와이흐 왕조로부터 이스파한을 탈취한 이후 독립을 선언했고, 다른 군벌들이었던 루즈바한과 불라카 형제가 각각 이라크 남부와 쉬라즈 인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쿠스라우는 휘하의 아불 파들을 보내어 이들을 모두 제압하였다. 966년에는 숙부 무이즈 앗 다울라와 함게 오만 원정을 시작하여 1년에 걸쳐 그곳을 정복하였으며, 968년에는 지야르 왕조의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여 이들을 우방국으로 끌어들였다.
2.3. 동부 이란으로의 원정
967년, 판나 쿠스라우는 케르만 인근의 토착 왕조였던 일야스 왕조를 정복했다. 이곳은 이미 이전에 숙부 무이즈 앗 다울라가 한 차례 원정했다가 큰 실패를 맛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원정이 성공적으로 끝난 직후, 쿠스라우는 아들 아불 파와리스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섭정으로 휘하의 장군 쿠르키르를 붙여주어 다스리도록 했다. 969~970년에는 일야스 왕조의 왕공이었던 술라이만이 왕국의 재건을 내걸며 쳐들어왔으나 쿠스라우에게 패퇴하였다. 내친 김에 쿠스라우는 호르무즈 해협으로 계속 나아가, 그곳의 호전적인 발루치계 부족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킨 후에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이듬해에 그는 시스탄의 사파르 왕조와 전쟁을 벌였고 후자의 통치자였던 칼라프 1세에게 부와이흐 왕조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강요하였으며, 971년엔 부와이흐 왕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일부 발루치 부족들에 대해 원정 겸 정복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1월에 이를 완료한 쿠스라우는 휘하의 충성스러운 제후 몇명들을 임명하여 이 지역을 확실하게 장악하였다. 이후 부친 루크 앗 다울라와 함께 사만 왕조와의 전쟁을 시작하였으나 전황이 영 지지부진하자 15만 디나르를 지불하여 평화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같은 해에 소하르를 비롯하여 오만 대부분을 정복했으며, 밤을 점령하고 케르만 일대를 계속 넘보던 일야스 왕공들 역시 재차 격파하는 등 나름대로의 성과 역시 있었다.
2.4. 이라크 반란 평정
판나 쿠스라우는 974년 부친으로부터 사촌 이즈 앗 다울라(967~978)를 도우라는 명을 받았다. 당시 이라크의 통치자였던 이즈 앗 다울라는 알자지라의 함단 왕조와 전쟁을 벌이면서도 궁정의 튀르크 군부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지 못해 와시트에 고립되어 있었다. 쿠스라우는 즉시 구원에 나서 이듬해 1월 30일 반란군을 분쇄하였다. 패배한 반란군은 군벌 아프타킨의 지도 아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도망쳤으며, 이로써 이라크의 반란은 막을 내렸다. 975년 3월 즈음에 이즈 앗 다울라와 합류한 쿠스라우는, 전자에게 자신이 도와준 댓가로 이라크의 아미르직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하였으나 그때까지 살아있던 무이즈 앗 다울라가 이를 격렬하게 반대했던 탓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2.5. 이라크 정복
다만 무이즈 앗 다울라가 976년에 사망하자,그해 12월 23일경에 후제스탄에서 북상하여 바그다드에 입성한 쿠스라우는 아바스 칼리파로부터 '아미르 알 우마라(아미르 중의 아미르)'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이외에도 각종 칭호들과 하사품 등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쿠스라우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말을 타고 칼리파의 접견실에 들어갈 수 있고, 칼리파 앞에 엎드렸을 때 동료들이 이를 볼 수 없도록 커튼을 치는 특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알 타이는 너무 과도한 요구라며 이를 거부했지만, 대신 그의 분노를 살 것을 염려하여 고대 이란 의정서에 귀를 기울이는 의식에 몇 가지 세부사항을 추가해, 아두드가 칼리파에 의해 왕관을 쓴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에 만족한 쿠스라우는 칼리파를 자신의 원정에 동행시켜, 978년 5월 사마라에서 자신이 사촌의 남은 군대를 섬멸시키고 이즈 앗 다울라를 처형하는 것을 지켜보도록 했다.
이즈 앗 다울라를 제거한 이후에는 인근의 베두인과 쿠르드 부족들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여 복속시켰으며, 바드르 이븐 하산와이를 꼭두각시 통치자로 임명하여 하산와이 왕조를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었다. 그뒤 쿠스라우는 자지라 지역을 침공한 샤이반 부족을 격퇴하고 이라크 남부의 반항적인 통치자인 하산 이븐 임란까지 물리침으로서 확고하게 이라크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이라크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 당시 수도 바그다드는 시아파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일으킨 폭동과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폐허가 되어있었던 상태였다. 하루빨리 도시의 안정을 회복해야 한다고 여긴 쿠스라우는 폭동과 시위를 금지시켜 치안을 안정화시켰으며, 알 무다피와 같은 시아파 학자들을 초청하여 이라크에서 활동하도록 하였다. 또한 시아파의 성지였던 카르발라 등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들과 시아파 모스크 등을 보수하고 개축하는 등 재건 사업 역시 실시하였다.
2.6. 타바리스탄~고르간 정복
비슷한 시기에 지야르 왕조에서는 왕위 계승을 두고 내전이 발발하였다. 당시 타바리스탄 총독이자 지야르 왕공이었던 두바즈 이븐 바니는 자신의 아들을 지야르 왕조의 차기 군주로 지원했던 반면, 이전 군주인 비수툰의 형제 카부스는 대놓고 부와이흐 왕조에 적대하며 세력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당연히 전자를 지원 세력으로 삼은 쿠스라우는 곧장 내전에 개입, 심란에서 카부스의 군대를 물리치고 그의 아들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뒀다. 이 승리로 쿠스라우는 아바스 칼리파로부터 '숭고함의 태양'이라는 뜻의 샴스 앗 말리(Shams al-Maʿālī) 칭호를 하사받았다.979년 5월, 쿠스라우는 이전에 이즈 앗 다울라와 동맹을 맺고 자신에게 대항하였던 사촌 파크르 앗 다울라의 영지를 침공했다. 후자는 카즈빈을 거쳐 니샤푸르로 후퇴하였고, 그가 소집한 군대 대부분은 쿠스라우에게 항복하였다. 비교적 평화롭게 지발(이란 서부) 지역을 정복한 쿠스라우는 980년 8월, 하마단을 정복한 이후 이곳에 자신의 신하를 남겨두고 케르만으로 회군하였다.
한편 그해 10월에 자신의 동생이었던 무아야드 앗 다울라가 재상을 보내 그에게 복종하는 댓가로 지발 영지를 하사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를 수락한 쿠스라우는 무아야드에게 군대를 주어 추가로 카부스에게서 정복한 타바리스탄과 고르간 역시 하사하였다. 이후 무아야드는 카부스와 파크르 앗 다울라를 재차 물리쳤고 983년까지 그 지역을 통치하였다.
2.7. 제국의 통일과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
980년 당시 판나 쿠스라우는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였다. 함단 왕조, 사파르 왕조, 샤히 왕조, 하산와이 왕조 등 이란의 쟁쟁한 세력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었으며, 부와이흐 왕조의 영향력은 저멀리 페르시아만 연안과 오만, 예멘까지 다다랐다. 자지라의 함단 왕조 역시 그에게 신속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케르만 일대의 호전적인 발루치 부족들마저 그를 두려워해 일시적이지만 복종하였다. 그렇게 980년대 이래로 제국이 안정되며 평화기에 접어들자, 판나 쿠스라우 역시 외치보다는 내치에 더욱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9세기 이래로 많은 전란과 부침을 겪었던 이라크 일대를 재건하였으며, 아바스 왕조의 선례를 보고 튀르크인들의 부상을 경계하여 그들의 지나친 승진을 막았다.그러던 981년, 동로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했던 바르다스 스클리로스가 바그다드로 망명했다. 도망치자마자 그는 판나 쿠스라우에게 서신을 보내어 복종하고, 함께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자고 요청하였다. 이를 수락한 쿠스라우는 포로를 인도하라는 동로마 제국의 요구를 물리치고,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와 그의 가족들을 바그다드에 머물게 하며 융숭한 대우를 해주었다. 다만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가 너무 나빠질 것을 우려하여 그해 말에 평화 협상을 위해 측근 아부 바크르 바킬라니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하였다.[4]
판나 쿠스라우는 이듬해인 982년에 또다른 심복 아부 이샤크 이븐 샤람을 파견해 동로마로 가도록 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3개월의 협상 끝에 동로마 제국과 10년간의 평화 조약을 맺는 성과를 거두었다. 1년 뒤 동로마 사신이 바그다드에 당도했으나 당시 쿠스라우는 중병을 앓고 있었기에 그를 제대로 맞이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평화 조약을 수락한 동로마 제국 측에서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리는 금요 예배에서 아바스 칼리파와 함께 판나 쿠스라우의 이름을 언급하기로 약조하였다.
2.8. 죽음
그렇게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를 이끌어낸 판나 쿠스라우는 그해 초엽인 3월 26일, 바그다드의 궁정에서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사후 장남 사라프 앗 다울라가 파르스와 케르만을, 차남 삼삼 앗 다울라가 이라크와 자지라를 물려받았다. 한편 이란 서부는 무아야드 앗 다울라가 통치하고 있었으나 지지 세력을 끌어모아 돌아온 파크르 앗 다울라가 그를 축출하고 다시 통치자의 자리에 올랐다. 쿠스라우는 명확한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로 사망했고, 후계자들에게 위협이 될만한 세력들 역시 완전히 복속시키지 않았기에 그의 사후에 부와이흐 왕조는 다시금 분열되며 쇠퇴하였다.3. 평가
아두드 앗 다울라는 아랍 군주나 페르시아의 어떤 쿠스라우(왕)들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냈다. 그는 시리아와 이라크 두 지역을 자신의 아래 두었으며, 동로마 제국이나 파티마 왕조와도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였다.
10세기경 부와이흐 왕조의 문인이었던 사히브 이븐 아바드
9세기경 사마라의 혼란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이라크 일대는, 판나 쿠스라우의 치세에 한 차례의 재건과 부흥을 겪었다. 그의 궁정은 공식적으로는 쉬라즈였으나 바그다드에서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이라크 지역에 신경을 더욱 많이 썼다. 판나 쿠스라우는 군재가 뛰어난 장군이었지만 동시에 노련한 정치가이기도 했는데, 실권이 없어진 칼리파를 폐하지 않는다거나 자신들을 비판하던 수니파 학자들을 탄압하지 않고 학문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등의 면모를 보였다.[5] 그의 치세에 이라크에 지어진 대표적인 건물로는 알 아두디 병원이 있다. 여기에서는 당대 최고의 의료 복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가난한 사람이라도 돈만 조금 낸다면 부자들과 거의 동등한 수준의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알리 이븐 알아바스와 이븐 마르주반 등 당대의 저명한 의사들 역시 이곳에서 일하면서 저서를 남겼다. 다만 안타깝게도 13세기 몽골 침공 도중에 파괴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10세기경 부와이흐 왕조의 문인이었던 사히브 이븐 아바드
판나 쿠스라우가 이라크에만 신경을 쓴 것은 아니고, 자신의 본거지였던 이란 고원 일대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특히 각지에 여행객들을 위한 카라반서라이[6]를 건설하고, 각종 수리 시설을 보수 - 재건하고 댐을 건설하여 생산량의 증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수도 쉬라즈에는 자연적인 에어컨 등의 냉방 시설을 갖춘 360개의 방이 있는 궁전이 건설되었다. 그의 치세에 쉬라즈가 너무 번영하여 구 도심으로는 많아진 인구를 완전히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쿠스라우는 인근에 위성 도시를 건설하여 일부 주민들을 이주시켜야 했다. 한편 페르시아 전통 역시 부활하여, 노루즈 등의 축제가 매년 개최되었고 이외에도 각종 기념일들이 계속해서 열렸다. 이러한 모든 내치 사업들은 이란의 경제를 크게 활성화하여, 10세기에 이르러 이란의 세수는 약 3배로 증가하였다.
[1] 페르시아어: فنا خسرو بن حسن بويه[2] 당시의 이스파한은 내륙 산간지역에 위치한 그저 그런 소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이스파한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경 사파비 왕조 이후부터이다.[3] 사실 이는 부와이흐 왕조의 내전을 심화시켜 권력을 확보하려는 알 타이의 수작이었다.[4] 다만 쿠스라우가 동로마 제국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를 보낸 것은 동로마 제국의 내부 사정을 염탐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5] 심지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여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수니파 등 종교를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라면 곧장 채용하였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초기 이슬람 특유의 관용 정신이 살아있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6] 쉽게 말하자면 역참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