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3:28:25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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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6E5C3><colcolor=#000000> 스페인 카를로스 4세의 왕비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
Principessa Maria Luisa di Parma
파일:Maria_Luisa_of_Parma.jpg
이름 이탈리아어 루이사 마리아 테레사 안나 디 보르보네파르마
(Luisa Maria Teresa Anna di Borbone-Parma)
스페인어 루이사 마리아 테레사 아나 데 보르본파르마
(Luisa María Teresa Ana de Borbón-Parma)
출생 1751년 12월 9일
파르마 공국 파르마
사망 1819년 1월 2일 (향년 67세)
교황령 로마 바르베리니 궁전
배우자 카를로스 4세 (1765년 결혼)
자녀 카를로타 호아키나,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루이사, 페르난도 7세, 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드로, 마리아 이사벨,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아버지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
어머니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
형제 이사벨라, 페르디난도 1세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아스투리아스 공비2.3. 왕비2.4. 말년
3. 가족관계
3.1. 조상3.2. 자녀
4. 여담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스페인 카를로스 4세의 왕비.

2. 생애

2.1. 어린 시절

파일:1280px-La_famiglia_di_Don_Filippo_di_Borbone_by_Giuseppe_Baldrighi_(C._1757).jpg
파르마에서 가족 초상화

1751년 12월 9일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와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의 차녀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는 스페인의 펠리페 5세, 외할아버지는 프랑스루이 15세로, 아버지는 본래 스페인의 왕자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아버지가 파르마 공작으로 임명되면서 파르마 궁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프랑스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 8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고 그 다음해에 언니 이사벨라오스트리아로 시집을 가면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성장하면서 마리아 루이사는 빼어난 미인으로 유명했던 언니에는 못 미치지만 꽤나 매력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2.2. 아스투리아스 공비

1765년 12월 9일 14살의 나이에 사촌인 아스투리아스 공 카를로스와 결혼했다.[1] 시어머니가 될 스페인 왕비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는 5년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마리아 루이사는 궁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여성이 되었다. 카를로스는 아내보다 3살 연상이었지만 유약하고 순한 성격이었다. 기가 센 마리아 루이사는 결혼 초기 때부터 남편을 휘어잡았다.

시아버지 카를로스 3세는 처음에는 똑똑하고 활기찬 며느리를 좋아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정치에 나서려는 모습을 보이자 경계하기 시작했고, 행동에 제한을 두면서 마리아 루이사를 길들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후 후계자 생산이 계속 실패로 돌아가자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마리아 루이사는 결혼 생활 동안 20번이 넘게 임신했지만 그중 반은 유산했으며, 유아기에 요절한 아이들도 많았다.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아이는 7명 뿐이었다. 그나마 생존한 아이들도 하나같이 작고 허약해서 궁중에서는 왕비의 행실이 불순해 저주에 걸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수차례 임신과 출산, 유산을 반복하면서 마리아 루이사의 미모는 점점 쇠퇴했다. 그리고 건강을 해치게 되어 마흔이 되기도 전에 대부분의 이빨이 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야심찬 마리아 루이사는 늘 열정적이었으며, 국정에 큰 관심을 두었다.

2.3. 왕비

1788년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면서 스페인 왕비가 되었다. 마리아 루이사는 남편 카를로스 4세의 첫 정치 회의에 참석하며 국정에 관여하려 했다. 정작 카를로스 4세는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고 취미 생활에 열중했다. 부부 사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자연히 점점 멀어졌다. 정치는 서서히 왕비의 근위병 출신인 총리대신 마누엘 고도이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다. 마리아 루이사의 연인이라고 소문난 마누엘 고도이는 왕을 대신해 정권을 잡고 전횡을 일삼았다.
파일:Manuel_de_Godoy,_por_Francisco_Bayeu.jpg
마누엘 고도이, 프란시스코 바이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ancisco_de_Goya_y_Lucientes_054.jpg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가족, 프란시스코 데 고야 作, 1800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왕이 아닌 왕비가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왕비가 왕 대신 왕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전체적으로 왕족들이 아둔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마누엘 고도이는 왕세자인 아스투리아스 공 페르난도를 미워했는데, 그 영향으로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국왕 부부는 페르난도를 싫어했다. 마리아 루이사는 페르난도를 두고 "내 아들은 매우 사악한 마음을 갖고 있고 그의 본성은 피에 굶주려 있으며, 자기 아버지나 나에게 어떤 애정도 보여준 적이 없다."라고 묘사했다. 스페인의 국민들은 정권을 농단하는 마누엘 고도이와 마리아 루이사를 증오하고 왕세자를 동정했다.

2.4. 말년

파일:Augustin_Estève_(copia_da_Francisco_Goya)_-_Ritratto_di_Maria_Luisa_di_Parma_1819.jpg
스페인의 왕대비 마리아 루이사, 1819년

1808년 아란후에스에서 발생한 민중봉기로 인해 카를로스 4세는 왕위에서 내쫓기고 페르난도 7세가 즉위했다. 나폴레옹은 중재를 빙자해 카를로스 4세 부부와 마누엘 고도이, 페르난도 7세를 꼬드겨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 그들을 가둔 뒤 자신의 형을 스페인 국왕 호세 1세로 즉위시켰다. 퐁텐블로 성에 감금된 마리아 루이사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며 겁에 질렸다.

카를로스 부부는 프랑스로 망명해 콩피에뉴와 마르세유에서 살았다. 1812년에 딸 마리아 루이사가 있는 교황령 로마로 이주했다.

1813년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호세 1세가 폐위되고 페르난도 7세가 복위했다. 그러나 카를로스 부부는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1819년 1월 2일, 로마 바르베리니 궁전에서 가족들과 마누엘 고도이가 지켜보는 아래 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18일 뒤 남편 카를로스 4세도 뒤따라 사망했다. 부부의 유해는 페르난도 7세의 명령으로 옮겨져 엘 에스코리알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Maria Luisa of Parma)
<colbgcolor=#fff3e4,#331c00> 파르마 공작 필리포
(Philip, Duke of Parma)
<colbgcolor=#ffffe4,#323300> 펠리페 5세
(Philip V)
프랑스의 도팽 루이[2]
(Louis, Dauphin of France)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
(Maria Anna Victoria of Bavaria)
엘리사베타 파르네세
(Elisabeth Farnese)
파르마의 공세자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Odoardo Farnese, Hereditary Prince of Parma)
노이부르크의 도로테아 조피
(Dorothea Sophie of Neuburg)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
(Louise Élisabeth of France)
루이 15세
(Louis XV)
부르고뉴 공작 루이[3]
(Louis, Duke of Burgundy)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4]
(Marie Adélaïde of Savoy)
마리아 레슈친스카
(Marie Leszczyńska)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
(Stanisław I Leszczyński)
카타지나 오팔린스카
(Katarzyna Opalińska)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스페인의 인판타
카를로타 호아키나|포르투갈의 왕비 카를로타 조아키나]]
(Carlota Joaquina, Queen of Portugal)
1775년 4월 25일 1830년 1월 7일 주앙 6세
슬하 3남 6녀[5]
2녀 스페인의 안토니오 파스콸 왕자비 마리아 아말리아
(María Amalia, Infanta Antonio Pascual of Spain)
1779년 1월 9일 1798년 7월 22일 스페인의 안토니오 파스콸
3녀 에르투리아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
(María Luisa, Queen of Etruria)
1782년 7월 6일 1824년 3월 13일 루도비코 1세
슬하 1남 1녀[6]
1남 페르난도 7세
(Ferdinand VII)
1784년 10월 14일 1833년 9월 29일 나폴리시칠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포르투갈의 마리아 이자벨
슬하 1녀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아말리아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슬하 2녀[7]
2남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
(Infante Carlos, Count of Molina)
1788년 3월 29일 1855년 3월 10일 포르투갈의 마리아 프란시스카
슬하 3남
포르투갈의 마리아 테레자 공주[8]
4녀 양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이사벨라
(María Isabel, Queen of the Two Sicilies)
1789년 7월 6일 1848년 9월 13일 프란체스코 1세
슬하 6남 6녀[9]
3남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
(Infante Francisco de Paula)
1794년 3월 10일 1865년 8월 13일 양시칠리아의 루이사 카를로타
슬하 5남 6녀[10]
테레사 아레돈도 이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11]
슬하 1남

4. 여담

  • 결혼 후 수차례 스캔들에 휘말렸지만 실질적인 증거는 없었다고 한다. 그중 카를로스 4세 시기의 총리대신 마누엘 고도이와 연인 사이라는 소문이 가장 유명하다. 마지막으로 낳은 아이들 몇명은 마누엘 고도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의심받기도 했다.
  • 장남 페르난도 7세의 첫 아내인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있다. 마리아 안토니아는 반프랑스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 마누엘 고도이와 대립했고, 마리아 루이사와도 사이가 안 좋았다. 21살의 이른 나이에 마리아 안토니아가 갑자기 병사하자 마누엘 고도이와 왕비가 짜고 그녀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궁중에 퍼졌지만 증거는 없었다.
  • 아랫동서인 포르투갈의 마리아나 비토리아를 매우 싫어했다. 마리아 루이사가 건강한 아들을 낳지 못하자 시아버지 카를로스 3세는 만일을 대비해 카를로스 4세의 동생인 가브리엘 왕자를 포르투갈의 공주 마리아나 비토리아와 결혼시켰다. 마리아나 비토리아는 결혼하자마자 잘생기고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 그녀를 시기한 마리아 루이사는 지독하게 시집살이를 시켰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리아나 비토리아는 결혼하고 3년만에 병에 걸려 향년 19살로 요절했다.

5. 대중매체에서

1999년 페넬로페 크루즈 주연의 역사 영화 《네이키드 마야》에서 스테파니아 산드렐리가 연기했다.

2006년 스페인 영화 《고야의 유령》에서 블랑카 포르티요가 연기했다.


[1] 여담으로 부친 필리포 1세는 마리아 루이사를 시집보내기 위해 딸과 함께 스페인으로 가던 도중 사망했다.[2] 루이 14세의 장남이자 펠리페 4세의 외손자이다.[3] 루이 14세의 손자이다.[4]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장녀이다.[5]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이사벨, 페드루 1세, 미겔 1세[6] 파르마 공작 카를로 2세[7] 이사벨 2세, 몽팡시에 공작부인 루이사 페르난다 공주[8] 마리아 프란시스카의 언니이다. 자신의 제부와 결혼한 것.[9]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 페르디난도 2세, 브라질의 황후 테레사 크리스티나[10]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 등.[11] 귀천상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