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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드 번디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2. 어린 시절
미국 버몬트주 벌링턴에서 태어났으며, 유복한 집안 출신은 아니지만 매주 주일 학교에 참석하는 등 평범해 보이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소시지 굽기, 낚시 하기, 크리스마스 휴가 보내는 모습이 담겨 있다. 하지만 실제 성장 환경은 매우 비정상적이었다.사생아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를 누나로 알고 자랐고, 당시 외조부모인 샘과 엘리너 코웰 부부가 그의 부모 역할을 했다. 외조부 샘은 악의에 찬 인종차별주의자였고, 애완동물과 자신의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했다.[1] 누나로 알던 친모가 재혼하면서 외조부모에게서 탈출할 수 있었지만, 계부 또한 사생아인 그를 싫어하였고 친모는 계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챙기느라 그에게 냉담했다. 그는 나중에서야 우연히 누나로 알던 사람이 친모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성장 환경이 이런 상황이니 바르게 자라는 게 신기할 지경일 것이다. 물론 이런 과거의 불우한 환경만으로 어른이 된 후 저지른 끔찍한 행동들을 옹호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의 뒤틀린 내면을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성장 환경을 보면, 어릴 때부터 명백한 정서 불안 증세를 나타냈고, 겨우 3세 때 잠든 이모의 침대 이불 밑에 칼을 밀어 넣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머리도 좋고 성적도 뛰어났지만, 반복해서 사납게 역정을 내는 성질 때문에 교사들은 불안에 떨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그는 이미 상습적 관음증 환자였으며, 좀도둑이 되어있었다.
이 시기 동안 자신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데 그건 자신에게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대표적인 특징인 양심, 타인을 욕망 충족을 위한 대상보다 우위에 두는 마음, 이타심 등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남들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관찰을 통해 그는 정상인들의 행동을 흉내내는 법을 배우는 데 성공했다. 그 때문에 그가 살인죄로 잡히기 전까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조차도 그의 어두운 기질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1965년 고등학교 졸업 후, 퓨젯 사운드 대학교(University of Puget Sound)에서 1년간 공부한 뒤에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워싱턴 대학교로 편입한다. 그는 워싱턴 대학교의 대학생으로 다니면서 정치에 관심을 가져 공화당에 입당, 넬슨 록펠러[2]의 선거 운동을 지원했으며, 1972년 선거에서 워싱턴주 지사 다니엘 J. 에반스의 선거 운동에 참여 및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3. 살인의 시작
3.1. 워싱턴주, 시애틀
그는 대학생으로 지내는 동안 '다이앤 마조리 진 에드워즈(Diane Marjorie Jean Edwards)'라는 여자와 사귀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라고 한다. 문제는 훗날 그의 범행 대상으로 삼은 피해 여성들의 상당수가 이 다이앤과 막연하게 닮았다는 것인데 실연의 상처가 그에게 범행 동기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이유는 다이앤과 헤어지게 된 원인이 순수하게 성격 차이나 갈등의 골이 깊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이앤은 그가 능력적인 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이별을 통보했고, 이는 그가 열등 의식을 갖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여자에 대한 혐오감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몇 년 후, 그는 다이앤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180도 변한 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하고 다이앤은 이를 받아준다. 하지만 그는 몇 년 전에 다이앤이 그랬던 것처럼 연락을 끊어버린다. 복수를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살인이 시작된다.
피해 여성들이 전 여자 친구를 닮은 건 그저 그의 여성 취향에 불과했다. 대학교 졸업 후, 일류 로스쿨을 가려다가 실패하고 퓨젓사운드 로스쿨 야간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다이앤에게 차이게 되고, 이로 인해 그의 자존감이 크게 떨어지게 된다. 여기서 그의 주된 살인 목표가 정해지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사귀었던 다이앤 같이 아름답고 지적인 여대생이었다.[3]
이후로 워싱턴주에 거주하는 동안 엘리자베스 클래퍼라는 싱글맘과 함께 살고 있던 그는 결국 살인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1974년 1월에 18세 여성 카렌 스팍스의 아파트 반지하방에 침입해 살해하려던 살인 미수 사건을 시작으로, 1974년 2월 린다 앤 힐리, 조잰 호킨스, 게일 맨슨, 수잔 랜코트, 로버타 캐슬린 파크스, 브렌다 볼, 스테파니 모리스 등을 여러 달에 걸쳐서 최소 7명을 살해했다.[4] 더하여 동년 7월, 축제 때에 데니스 내스런드와 재니스 오트라는 두 여성을 동시에 살해했으며, 이때 목격자에 의해 테드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경찰의 수사망에 잡히게 된다.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를 시작하고, 급기야 8월 동거했던 여자 친구인 엘리자베스 클레퍼는 수상한 모습을 보였던 그에 대해 경찰에 신고하게 된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고 판단한 경찰은 그를 수사망에서 놓치고 만다.
3.2.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
이후 1974년 9월에는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로 이사, 유타 대학 로스쿨에 등록하는데 여기서도 그의 살인은 그치지 않았다. 이때 캐럴 다론치라는 여성에게도 접근했지만, 구사일생으로 그녀는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녀의 사례는 운이 좋은 경우였다. 그녀를 놓친 후, 분노한 그는 4시간 후, 데비 켄트라는 여성을 납치해서 살해한다.결국 솔트레이크 시티에서도 멜리자 스미스, 낸시 윌콕스, 로라 에이미, 엘리스 잭슨, 베티 록우드 등 젊은 여성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고, 얼마 뒤 토막 난 시신이 협곡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이때 단순히 유타주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콜로라도주까지 진출, 리사 워커, 엘리자베스 마틴, 헬렌 던컨, 미셀 그레이, 마가렛 파커 등 최소 5명이 넘는 희생자들을 살해했다. 1974년 11월에도 켈리 알렌, 레베카 가르시아 등 여성 2명에게도 다가가 살해하려 했으나 두 여성은 간신히 도주했고 몇 시간 뒤, 메리 리 카 다비스라는 23세 여성 역시 살해하려 했으나 이도 살인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1974년 9월과 같이 이에 분노한 그는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발버라 톰슨이라는 여성을 살해한다.
1975년 3월 5일, 워싱턴주, 테일러 산에서 실종됐던 여성들의 시체들이 발견됐다.
4. 두 번의 탈옥과 검거
그의 살해 행각의 전환점이 1975년 8월 16일 밤에 찾아왔다. 그날 밤 유타 고속도로에서 밥 헤이우드 순경은 전조등을 끄고 곡예 운전을 하던 자동차를 세우고, 그 안에서 얼음송곳, 여성 팬티스타킹으로 만든 복면, 수갑 등 의심스러운 물건을 발견했다. 그는 그렇게 첫 번째 체포를 당했다.이때 체포된 29살의 그는 자신이 1년도 더 전에 납치를 시도했던 캐럴 다론치에게 범인 지목을 받고 납치죄가 가중되어 1976년 2월 유죄가 선고되면서 15년형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콜로라도 살인 사건에 대한 추가 징후도 발견되어 1977년 1월에 콜로라도로 이감되며 그의 인생은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4.1. 콜로라도에서 첫 번째 탈옥: 8일간
5개월 뒤인 6월 7일, 그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자료 수집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법원 도서관 출입을 허락받고, 경비원이 담배 피우러 복도에 나간 사이 도서관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탈출했다. 하지만 8일 만에 다시 체포됐다.4.2. 두 번째 탈옥: 2개월간
그러나 같은 해 12월, 11kg를 감량하고 몰래 들여온 쇠톱으로 감방 천장 통풍구에 구멍을 내고 또다시 탈출했다. 그는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해 미국 남부인 플로리다주 탤러해시까지 거처를 옮겼는데 옮기던 도중에도 제시카 그린, 산드라 콕스라는 두 여성을 납치했다가 풀어줬고, 몇 주도 채 지나지 않아 셰릴 화이트라는 여성을 살해하기 직전까지 갔으나 다행히도 셰릴은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탈출에 성공해 미수에 그쳤다. 이후 탤러해시에서도 크리스티나 포드, 줄리 하퍼, 패트리샤 베리, 로살리 클라크 등의 여성이 잇따라 실종됐다. 이때 그가 법정 진술도 거부할만큼 끔찍한 사건들을 수차례 저질렀다. 이때 상당히 많은 미제 사건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4.3. 플로리다에서 세 번째 검거
결국 1978년 2월 15일, 그는 12세 소녀 킴벌리 리치를 살해, 확인 사살까지 한 뒤, 시신을 돼지 우리에 버린 지 1주일 만에 도난 차량을 몰고 다니다 붙잡힌다. 교통 경찰은 그저 교통법 위반으로 그를 잡았을 뿐, 살인범인지는 몰랐다.4.4. 플로리다의 구금자가 그로 확인
1978년 2월 21일, 수감 중이었던 그가 워싱턴의 옛 여자 친구인 엘리자베스에게 수신자 부담 전화를 걸게 되면서, 경찰이 그들이 구금하고 있던 자가 바로 살인 혐의가 있는 탈주범, 테드 번디란 사실을 확신하게 됐고, 결정적으로 4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킴벌리 리치 살인사건의 사체가 발견된다. 이후 탤러해시 여대생 살인사건에서 발견한 치아 자국과 대조해서 증거를 확보한 후, 결국 7월 기소된다.5. 재판
결국 1979년 5월 9일부터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재판이 진행되었고, 이는 미국 전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그는 연쇄 살인[5]으로 재판을 받았고, 변호인과 사법거래(사전 형량 조정 제도)를 하는 쪽으로 전략을 세웠다.하지만, 6월 1일, 돌연 그는 사법거래(사전 형량 조정 제도)를 거부하며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7월 24일, 배심원단의 6시간 30분 동안의 심리 끝에 최종적으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실 그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의 희생자 수가 최소 30명에서 최대 100명까지 추정되는 등 정확하지 않은 점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피해자들을 정확하게 밝혀낼 수 있도록 협조하는 대가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제안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변호했고, 그 결과 그의 정확한 범죄 내역 및 희생자 수, 발견되지 않은 시신의 위치 등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그도 바보는 아니라서 얼마 후 변호인단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이미 어그로를 있는 대로 끈 상황이라 별 효과는 없어 정신 이상 드립만 치다가 사형이 확정됐다. 물론 처음부터 변호인단의 전략대로 갔더라도 아동 살해까지 저지른 그에게 플로리다 재판부 측이 과연 사형을 선고하지 않았을지는 의문. 특히 플로리다 주는 몇몇 지역들과 함께 미국에서 아직까지 아동 살해 혐의로 사형 집행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주 가운데 하나다.
6. 사형 집행 연기 시도
6.1. 독점 기사 출판 시도
1980년, 자신이 누명을 썼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해서 뉴스위크의 신참 기자 스티븐과 그의 옛 상사, 휴 애네스워스와 만나 책을 내려고 시도했다. 이 내용은 2019년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살인을 말하다: 테드 번디 테이프》로 만들어지게 된다.6.2. FBI와의 협력
1984년, 연쇄살인범들의 범죄 유형을 파악하기 위한 FBI의 조사과정에 도움을 준다. 이 과정이 후에 《양들의 침묵》에 영향을 줬다.6.3. 사형 집행 연기 신청
1986년부터 1989년까지 그의 사형 집행을 막으려는 시도가 성공해서 3년간 집형이 연기되었다.6.4. 자백 시도
더 이상 형이 연기되지 않을 것 같자 그는 돌연 5개 주에서 벌인 30여 건의 자신의 범죄 사실들을 FBI에게 자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이러한 시도도 그의 사형 집행을 더 이상 연기시킬 수 없었다.7. 사형 집행
I would like you to give my love to my family and friends.
당신이 제 가족과 친구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하길 원해요.
- 유언
결국 1989년 1월 24일 새벽, 플로리다주 교도소에서 사형 확정 10년 만에 마침내 처형되었다. 마지막 식사를 요청할 권리가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교도소는 전통적으로 사형수들에게 주는 식단인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 해쉬 브라운, 달걀 프라이, 토스트, 버터와 잼, 우유, 오렌지 주스를 지급했지만, 이 역시 먹는 것을 거부했다. 일반적으로 사형 집행이 있는 날은 어지간해서는 사형 집행에 대한 반대 시위가 있기 마련인데 이날 그의 사형집행 때는 워낙 그의 죄질이 나쁘기 때문인지[6] 사형 반대론자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찬성론자들만 들어와 최악의 범죄자의 최후를 축하했다.당신이 제 가족과 친구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하길 원해요.
- 유언
당시 사람들은 그가 처형된다는 소식을 듣고, 교도소 앞에 캠프파이어를 피우고, 바베큐 파티를 열고, 그가 전기의자로 끌려가는 것을 반기는 노래를 부르며 그의 집행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리고 오전 7시 16분, 테그의 사망이 확인되자 교도소 앞에 모인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고, 그의 시신을 실은 차가 교도소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환호했다고 한다.
8. 사후
죽은 뒤 본인의 유언에 따라 화장되었고, 그가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곳이라고 말하던 산에[7] 유해가 뿌려졌다. 강제화장 등은 사실무근한 낭설에 지나지 않는다.참고로 이는 대부분 사형수의 가족이나 담당 변호사가 행하는데[8] 존 웨인 게이시처럼, 일부 사형수는 장례 이후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조차 밝히지 않는 경우도 많다.
[1] 훗날 그의 아내 엘리너는 오랜 세월의 시달림 끝에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했다.[2] 1958년부터 1974년까지 뉴욕주지사로 재직했으며 1974년부터 1977년까지 부통령으로 재직했다.[3] 흑발 머리에 가운데 가르마의 단정한 미모의 여대생을 주로 노렸다. 책에 따라서 검은 머리가 아니라 검은 피부라고 쓰여 있는 경우가 있는데 오역 아니면 오타다. 실제로 그에게 살해당한 피해자들의 사진들을 보면, 대부분이 상당한 미모에 흑발의 긴 생머리를 가진 공통 요소가 확인된다.[4] 그가 성인이 되기 전부터 살인을 저질렀을 것으로 추측하는 수사관도 있다. 실제로 그가 14살 때인 1961년에 그가 이웃에 살던 8살 앤 메리 버를 납치·살해했을 정황 증거가 있다. 다만, 그는 이에 대해 부정했으며, 그의 사후에 실시된 DNA 수사는 DNA 확보 실패로 중단되어 앤 메리 버 실종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5] 정확히는 플로리다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2건으로 재판을 받았는데 하나는 탤러해시의 대학 기숙사에 침입해서 그 안에 있던 애슐리 몬티, 로라 무어, 사라 존슨, 제인 테일포드(영국인) 등 여대생 4명을 무참히 폭행, 애슐리 몬티와 로라 무어(로 추정되는) 2명을 살해하고 사라와 제인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과, 마지막으로 12세 소녀 킴벌리 리치를 살해한 사건.[6] 참고로 미국 연방정부 차원에서 사형 집행이 이뤄진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사건의 범인인 티모시 맥베이의 처형 때조차도 사형 반대 시위가 열렸음을 생각하면, 미국 사회에서 그가 얼마나 최악의 살인마로 받아들여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7] 피해자들의 시신을 주로 유기하던 그 산이기도 하다.[8] 사형 집행 이후 사형수의 시신은 간단한 검사만 하고, 무조건 가족에게 인도해서 장례를 치르도록 되어 있다. 사형당한 것은 아니지만, 자살을 택한 사형수 정남규의 시신도 가족들에게 인도한 뒤, 화장하여 장례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