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09:49:28

코시모 3세 데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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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91801><colcolor=#FFF>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
코시모 3세
Cosimo III de' Medici, Granduca di Toscana
파일:Cosimo_III_de'_Medici.jpg
출생 1642년 8월 14일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피티 궁전
사망 1723년 10월 31일 (향년 81세)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피티 궁전
재위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
1670년 5월 23일 ~ 1723년 10월 31일
배우자 오를레앙의 마르그리트 루이즈 (1661년 결혼 / 1721년 사망)
자녀 페르디난도, 안나 마리아 루이사, 잔 가스토네
아버지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
어머니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
형제 프란체스코 마리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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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스카나 대공국대공.

토스카나 대공 중 재임기간이 가장 긴 군주이자 최악의 암군이다. 그의 재위 동안 토스카나 대공국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고, 빠르게 몰락했다.

2. 생애

1642년 8월 14일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와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부는 자식의 교육 문제로 충돌했는데, 대공비의 뜻대로 코시모 3세 데 메디치는 신학자 반디넬리 밑에서 종교 중심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침울한 성격을 가진 독실한 가톨릭교도로 성장했다.

1661년에 루이 13세의 조카 오를레앙의 마르그리트 루이즈와 결혼했다. 결혼 생활은 최악이었다.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메디치 가문을 업신여겼으며, 남편에게 자주 모욕적인 언사를 사용했다.[1] 게다가 굉장히 사치스러워 안 그래도 빠듯한 재정을 더욱 거덜냈다. 1670년 토스카나 대공이 사망하고 코시모 3세 데 메디치가 대공위를 잇자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프랑스로 돌아가려 했다. 후계자가 될 자식들은 충분했던 코시모 3세는 아쉬울 게 없었고, 프랑스 왕국의 승인이 떨어지면서 마르그리트 루이즈와 헤어졌다.

코시모 3세 데 메디치가 대공이 되었을 때 토스카나 대공국은 경제적 위기 상황이었다. 전쟁으로 인구는 감소하고 재정난에 시달렸으며, 수시로 전염병이 창궐했다. 그런 와중에 대항해시대로 인해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변한 것을 따라잡지 못하고 무역이 급감해 재정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코시모 3세는 정치와 외교에 관심이 없고 종교적인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정치는 어머니나 관료들에게 맡기고 대여섯 군데의 교회를 돌거나 예배당에 박혀지냈다.

그의 통치 기간은 대대적인 박해의 시기였다. 특히 반유대주의적 법령을 제정하며 가혹할 정도로 유대인을 박해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도와 결혼할 수 없는 등 행동에 수많은 제약이 따랐고, 유대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벌금을 내야 했다. 이를 어기는 사람은 고문을 당했다. 박해의 대상은 유대인만들이 아니었다. 유곽은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며, 창녀에게는 무거운 세금이 매겨졌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단속은 심해져 공적인 장소에서 노래를 부르는 여성은 매질을 당했다. 또한 동성애자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2] 수천명의 사람들이 토스카나에서 동성애로 교수형을 당했다. 종교적 탄압은 거세져 과학자와 철학자, 그리고 몇몇 예술가들이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예술과 학문의 중심지였던 토스카나는 이전의 모습을 잃어갔다.

이런 점들을 보면 코시모 3세 데 메디치는 굉장히 금욕적인 사람이었을 것 같지만 반대였다. 그는 고급술을 비롯한 사치품들을 자주 구입하고 종종 진위 여부가 의심스러운 성유물을 사들였으며, 폭음과 폭식을 즐겼다. 코시모 3세는 재정을 신경쓰지 않고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연회를 즐기곤 했다. 부족한 비용은 국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 충당했다.

말년에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후계자에 집착했다. 그러나 두 아들과 딸, 그리고 남동생도 후사를 보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남 페르디난도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방종한 차남 잔 가스토네에게 대공의 자리를 넘기고 싶지 않았던 코시모 3세는 딸 안나 마리아 루이사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723년 9월 22일, 발작적인 경련을 겪던 코시모 3세 데 메디치는 숨을 거두었다.


[1] 그러나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할머니인 마리 드 메디시스가 메디치 가의 사람이기에 본인 또한 자기가 무시하는 메디치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2] 그런데 정작 코시모 3세 데 메디치의 남동생과 두 아들, 심지어 아버지도 동성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