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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델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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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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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츠 시절
이름 카를로스 후안 델가도 에르난데스
생년월일 1972년 6월 25일
국적 푸에르토 리코 파일:푸에르토리코 기.png
출신지 푸에르토 리코
포지션 1루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88년 자유계약 입단(토론토 블루제이스 입단)
소속팀 토론토 블루제이스(1993~2004)
플로리다 말린스(2005)
뉴욕 메츠(2006~2009)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1993

1. 개요2. 선수 생활3. 사회활동4. 명예의 전당 입성 여부

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1990년대와 2000년대를 풍미한 강타자로 푸에르토 리코 출신 선수로서 가장 많은 홈런과 타점을 기록한 선수다. 아울러 토론토 블루제이스 소속으로 가장 많은 홈런과 타점을 기록한 프랜차이즈 스타. 적극적인 사회 활동과 의사 표현으로 유명한 선수기도 하다. 더불어 스테로이드 시대를 정면으로 통과했지만 약물 문제로 구설수가 없는 타자이기도 하다.

통산 성적은 타율 0.280 출루율 0.383 장타율 0.546 473홈런 1512타점.

2. 선수 생활

2.1. 토론토 블루제이스 시절

푸에르토 리코에서 약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비교적 안락하게 보내면서 기량을 쌓았다. 두각을 나타낸 그를 두고 여러 팀에서 군침을 흘리다가 16살의 나이로 캐나다로 건너가 프로야구 선수의 경력을 쌓게 되었다. 바로 토론토 블루제이스 소속으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 마이너리그에서 꾸준히 커리어를 쌓으면서 1993년 메이저리그 데뷔에 성공하게 되었다. 다만, 1993년부터 1995년까지는 주로 대타 등으로 나오면서 마이너리그와 메이저리그를 오가던 선수였다.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 것은 1996년으로 25홈런 92타점을 기록하면서부터였고 이 때부터 토론토의 주포로서 맹활약하기 시작한다. 1997년 30홈런을 쳐내며 이전 해보다 발전된 활약을 보여주더니, 1998년 38홈런 115타점을 기록하면서 리그 정상급 타자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팀과 장기 계약을 맺은 후, 먹튀화 되지 않고 맹활약했다는 점에서 더욱 뛰어난 선수.

1999년 44홈런 134타점, 2000년 41홈런 137타점, 2001년 39홈런 102타점, 2002년 33홈런 108타점, 2003년 42홈런 145타점, 2004년 32홈런 99타점을 기록하며 토론토의 상징으로 군림했다. 특히 2000년은 196개의 안타를 쳐내며 동시에 123개의 볼넷을 얻어내 출루율 4할 7푼을 기록하기도 했다. 시즌 OPS는 무려 1.134. 그리고 이 해부터 4년연속 100볼넷 이상과 평균 40홈런, OPS 1을 기록하며 리그에서도 손꼽힐만한 방망이 솜씨를 보여줬다. 그래서 별명도 킹 카를로스(King Carlos).[1] 1990년대 초반의 영광이 끝나고 몰락한 토론토를 외롭게 지켜내면서 토론토 타선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다만 토론토의 전력이 워낙 약하고 인기 팀도 아닌지라 주목도가 떨어진데다가, 이 시기가 하필이면 스테로이드 시대의 절정기라서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배리 본즈, 알렉스 로드리게스 등의 괴물들에 비해 임팩트가 부족하다 여겨졌다. 토론토 시절 올스타 선정도 딱 2번뿐이였고, MVP 투표에서도 2003년 2위에 오른 것이 전부였다.

2004년을 끝으로 장기 계약이 끝나자 델가도 자신은 팀에 남기를 원했다. 미국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선수였기 때문에 캐나다에서 계속 거주하기를 희망했던 것. 하지만, 토론토는 잡을 여력이 없었고, 캐나다 달러 역시 약세를 유지하면서 델가도의 몸값을 유지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델가도는 어쩔 수 없이 팀을 떠났고, 그가 선택한 행선지는 고향과 가까운 플로리다 말린스였다.

2.2. 뉴욕 메츠 시절

그런데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계약은 일종의 꼼수였다. 말린스가 부린 꼼수는 4년 5,200만 달러로 계약을 하되, 첫 해에는 400만 달러로 계약을 했다는 것. 2003년 우승을 했던 말린스 입장에서는 델가도를 보강해서 우승에 도전하고, 실패하면 트레이드 카드로 쓸 생각이었다. 말린스에서의 첫 해 아메리칸리그에서 내셔널리그를 옮긴 상황에서도 리그 적응에 훌륭하게 성공하며, 33홈런 115타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말린스의 PO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미뤄놓던 고액의 연봉이 나오자 말린스는 미련없이 유망주 3명을 받는 조건으로 그를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시켰다.

2006년 뉴욕 메츠에서 뛰게 된 델가도는 첫 해 팀의 4번 타자로서 38홈런 114타점을 기록하면서 팀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 해 메츠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위세에 눌렸던 것에서 벗어나 지구 우승에 성공하며 마침내 리그 챔피언십까지 오르게 되었다. 델가도 입장에서는 생애 첫 PO. 디비전 시리즈에서도 LA 다저스 상대로 0.429의 맹타를 휘둘렀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리그 챔피언십에서도 0.304 3홈런 9타점으로 대활약을 했지만, 팀은 7차전 접전 끝에 패하면서 델가도의 PO는 끝났다. 그리고 이게 델가도 야구 경력 유일한 PO이었다.

2007년 부상으로 주춤하며 24홈런 87타점으로 주춤했지만, 2008년 38홈런 115타점을 기록하면서 다시 부활했다. 그러나 부상은 끝내 그의 커리어의 발목을 붙잡으며 2009년 고작 4홈런 23타점에 그치면서 결국 메츠를 떠나게 되었고, 사실상 은퇴하게 되었다.

2010년 보스턴 레드삭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으면서 재기를 시도했지만, 결국 마이너리그에서 성적이 좋지 않자, 마침내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시즌 바로 전 시즌에 38홈런을 기록했고, 마지막 시즌에서도 26경기 .298/393/521 이라는 성적을 기록했기에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 1996년부터 무려 13년 연속 +20홈런을 기록했고, 11번이 30홈런 이상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기량이 추락하던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2~3년 더 뛰며 17루타와 27홈런만 보태도 2루타와 홈런에서 500-500 이라는 대기록을 세울수 있었기에 더욱 아쉬운것. 이는 지금까지 13명밖에 기록하지 못한 대단한 마일스톤이다.

3. 사회활동

델가도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것은 거포로서의 뛰어난 면모도 있지만, 적극적인 사회활동이다. 다른 선수들이 단순히 자선 활동,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활동에 그치는 것과 달리 델가도는 좀 더 적극적인 정치적인 활동에 뛰어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고향인 푸에르트 리코 비에케스 섬 사격장 폐쇄 운동. 비에케스 섬은 미군 해군의 사격 연습장이었는데, 1999년 여기서 오폭으로 인해 주민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울러 온갖 신무기, 특히 우라늄탄의 실험장이라 방사능의 영향도 적지 않았고, 지금도 주민들의 각종 질환으로 고생하는 곳이다. 델가도는 1999년 뉴스를 접한 이후로, 매년 사격장의 철수를 위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결국 사격장은 2003년 폐쇄되었다.

아울러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이른바 '애국주의'가 강화되면서 양키스 스태디엄에서[2] 매번 7회마다 신이여 미국을 보호하소서가 연주되었는데, 델가도는 이에 항의해서 이 노래가 나올 때 클럽하우스로 들어가 버리는 1인 시위를 행했다.[3] 그리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도 강력한 반대 의사를 나타냈고, 전쟁에 반대해서 경기 시작 전의 국가 연주에 대해서도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하는 등, 정치적인 소신을 그대로 드러냈다.[4]

그렇다고 자선 활동에 인색한 선수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고향 푸에르토 리코를 위해 많은 활동을 했고, 그 결과로 2006년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상했다. 참고로 그가 존경하는 인물은 당연하겠지만, 로베르토 클레멘테다. 2006년 WBC에서 21번 배번을 달라는 제의에 대해 그 번호는 클레멘테의 번호라고 거부한 적이 있다.

4. 명예의 전당 입성 여부

분명 한 시대를 풍미한 엘리트 거포였지만, 동시대가 약물을 빤 거포들의 전성시대라서 막상 따낸 타이틀이 거의 없다. 2003년 아메리칸리그 타점왕 타이틀이 전부. 또한 부상으로 인한 다소 빠른 은퇴로 인해 명예의 전당 보증수표라는 500홈런 고지에 끝내 도달하지 못했다. 2루타 500개도 목전에 있었기에 더더욱 아쉬운 부분. 역시 토론토 선배이며, 우수한 거포로 활약했으나 동시기 다른 강타자들에게 가려지고 통산 500홈런을 못 채운 프레드 맥그리프와 비슷한 결격사유를 가진 후보로 평가받는다.

임팩트 부족도 문제인데, 수상 경력을 보면 올스타 선정 2회에 실버슬러거 수상 3회 정도가 전부다. 더구나 그가 전성기를 보내던 시절 토론토는 그야말로 암흑기였기에 우승반지는 고사하고 포스트시즌 경력도 거의 없다.[5] 약물 문제로 인해 은퇴한 선수들에 비해 가려졌다는 것을 기자들이 인식하고 지지하지 않는 한, 명예의 전당 입성이 쉽게 이뤄지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설사 들어가더라도 몇 차례 투표는 거쳐야 할 듯. 그래도 토론토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푸에르토 리코의 최고 거포였다는 점이 임팩트로 작용한다면 또 다를 것으로 보였지만, 첫 투표에서 3.8%만을 득표하면서 탈락했다. 베테랑위원회는 노릴 수 있을까...


[1] 스페인 국왕이던 후안 카를로스 1세에서 따온 별명.[2] 마치 모든 팀이 이렇게 했다는 것 같은 오해를 살 수 있어 확실하게 말하자면 델가도의 시위가 나왔을 2004년 당시 이걸 꾸준히 계속 했던 팀은 양키스 하나였다. 몇몇 다른 팀도 간혹가다 하긴 했지만 계속 했던건 양키스 하나였다. 물론 테러를 직접적으로 당했던 도시이니 이상한 건 아니다.[3] 2004년도 양키스 vs 블루제이스 경기에서 그랬던게 대표적. 마치 누가 매번 그랬던 것처럼 써 봤는데 2003년도에 델가도는 God Bless America 를 틀 때 별 문제 없이 들었다[4] 나중에 비슷한 정치적 의사표현으로 논란이 된 NFL 선수 콜린 캐퍼닉을 지지하는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5] 토론토에서는 단 한 번도 포스트시즌을 구경해보지 못했고, 나중에 메츠로 이적한 뒤에야 첫 PO 무대를 밟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