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13 11:54:55

칭화대학 백일대무투

칭화대학 백일대무투
清華大學百日大武鬥
문화대혁명 기간 무투의 일부
기간
1968년 4월 23일~7월 27일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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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시 하이뎬구 칭화대학
원인
칭화대학 내 홍위병 간 파벌 분열
교전국 및 교전 세력
파일:적기.svg단파 파일:적기.svg 414파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정부
지휘관
파일:적기.svg 콰이다푸 파일:적기.svg 불명 파일:중국 국기.svg 마오쩌둥
파일:중국 국기.svg 장룽웬
전력
불명 불명 3만 명
결과
정부의 대학 내 홍위병 해산
영향
홍위병의 쇠락
피해규모
18명 사망
1100여명 부상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발단3.2. 격화
3.2.1. 과학관에서의 공성전
3.3. 종결: 7.27 사건
4. 이후5. 관련 문서

1. 개요

칭화대학 백일대무투(清華大學百日大武鬥)는 문화대혁명 시기 1968년 4월 23일부터 7월 27일까지 약 100일간 칭화대학 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2. 배경

1966년 12월 19일 칭화대학에서 조직된 징강산병단은 당시 문화대혁명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하던 홍위병 집단으로 콰이다푸를 중심으로 하였으나 약 4개월 후인 1967년 노선 차이를 이유로 '사십사연련회', 약칭 414파가 독립하여 기존의 징강산병단, 즉 '단파'와 대립하게 된다.

초기에는 양 파벌 간의 토론 또는 대자보를 통한 비판 등 비교적 비폭력적으로 대립했으나 점차 폭력적 행위를 수반하게 된다.

3. 전개

3.1. 발단

분쟁이 격화되던 1968년 4월 22일 단파 학생 100여명이 칭화대 대강당을 점거하여 414파의 무기를 압수하게 된다. 이를 이유로 23일 새벽 414파는 굉맹루를 점거하려 시도하였으나 단파 또한 이곳을 점거하려 시도한다. 이 충돌은 11호 건물과 12호 건물로 번져 16시 즈음에는 단파가 굉맹루 및 11호 건물을, 414파는 12호 건물을 점거한다.

4월 29일에는 414파가 쌀 운반 트럭을 과학관으로 옮기려는 와중 단파와의 석전이 일어났고 돌을 피하기 위해 움직이다 전복된 트럭에 학생 1명이 압사하기까지 한다.

5월 2일 단파는 414파가 점거하고 있던 토목관을 공격하여 빼앗게 된다. 이 사건 이후 양측은 협상을 통해 무력 충돌을 중단하였으며 포로들을 교환하였으나 그러는 와중에도 대규모 무력 충돌을 꾀하고 있었으며 5월 말에는 무력 충돌을 지휘할 조직들을 각자 설립하기까지 한다.

3.2. 격화

5월 29일 양측간 충돌이 발생하자 단파는 각목과 농기구 등을 이용하여 414파의 학생들을 공격하였고 414파 또한 1천여 명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이들과 맞서 싸우게 된다. 이날 승리한 단파는 회의를 개최하여 414파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한다.

다음날 새벽 3시경 단파 학생들이 칭화대 발전소에서 발전기를 차단시키자 단파 인원들은 목욕탕에 있던 414파 학생들을 공격한다. 이때 이들은 활이나 투석기 등 냉병기 뿐 아니라 트랙터를 개조한 탱크와 휘발유를 사용한 소이탄까지 동원하기에 이른다. 목욕탕에서의 충돌에서도 사망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이후 양측은 모두 교내에 있던 무기고로 향해 본격적으로 화기를 탈취했으며 이 외에도 자체적으로 무기를 제조하게 된다. 트럭과 트랙터를 개조한 탱크들이 만들어져 동원되었고 비뢰포 같은 사제 대포를 이용해 포격을 시도하였으며 화학 실험실의 물질들로 화염병은 물론 염소가스 등 화학무기까지 제조하기에 이른다.

각 건물들은 모래주머니 등으로 창문을 막았으며 총안구를 설치하였다. 건물 근처에는 철조망을 설치하고 참호를 구축하였으며 지뢰가 묻히기도 했다. 옥상에는 감시 초소를 두고 저격수를 배치했다. 스피커를 설치하여 혁명가요와 선전 등을 계속해서 틀어대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을 보다 못한 중국공산당국무원 등 중앙에서는 7월 3일 7.3 포고령을 내려 무력 충돌을 중단하기를 요구했지만 단파와 414파 모두 이를 무시한 채 충돌을 지속한다.

3.2.1. 과학관에서의 공성전

한편 캠퍼스를 양분하던 단파와 414파는 각 세력권의 중간에 위치한 칭화대학 과학관을 두고 공성전을 펼친다. 1917년에 지어진 과학관은 3층 규모의 건물로 처음에는 414파가 차지하고 있었으나 단파는 7월 초부터 이 건물을 포위하였다. 이로 인하여 건물 내의 414파 인원들은 보급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7월 4일에는 414파 인원이던 학생 2명이 총살된 적도 있다.

7월 9일에는 단파의 소이탄 공격으로 3층이 전소되기까지 했고 이 외에도 지속적으로 탱크 등을 동원하여 바리케이트 돌파를 시도한다. 이러한 공격에 겹친 보급 부족으로 인해 414파는 포위를 돌파하고자 터널을 구축하였으나 지진계를 사용해 이를 알아챈 단파는 7월 16일 이 터널을 붕괴시켰다.

3.3. 종결: 7.27 사건

결국 마오쩌둥은 칭화대에 개입하기로 결정한다. 7월 27일 비무장한 3만여 명의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선전대가 교내에 도착하였으며 충돌을 멈출 것을 요구한다. 414파는 이를 수용하며 16시경 무기 등을 넘기고 바리케이트와 철조망을 철거했으나 단파는 이에 저항하며 비무장한 노동자들에게 공격을 가하여 7월 28일 자정까지 5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731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7월 30일까지 단파 또한 칭화대학에서 철수하면서 100일 간의 전투는 완전히 종료된다.

4. 이후

마오쩌둥은 28일 새벽 세시 반 베이징 홍위병의 5대 지도자인 콰이다푸, 녜위안쯔, 한아이징, 탄후란, 왕다빈을 불러들여 이들을 비판하였다. 콰이다푸는 모든 자리에서 내려와 1973년경 공장 감독원이 되었다 문혁 이후인 1978년 재판에 회부되었고 이후 1983년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1987년 사면되었다.

이러한 중국 각지의 '무투' 사건으로 인하여 홍위병을 통제하기 어려워진다 생각한 마오쩌둥은 이윽고 혁명을 노동자 중심으로 개편해야 한다며 홍위병 세력을 크게 위축시켰고 이후에는 홍위병들을 시골로 보내버린다.

5.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