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투 武鬥 Violent Struggle | |
| 문화대혁명의 일부 | |
| 기간 | |
| 1966년 12월~1968년 여름 | |
| 장소 | |
전역 | |
| 원인 | |
| 홍위병의 파벌 경쟁 등 | |
| 결과 | |
| 상산하향 운동 전개 | |
| 피해규모 | |
| 23만 7천여 명 사망 703만 명 이상 부상 |
1. 개요
무투(간체자:武斗, 영어:Violent Struggle)는 과거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 전역에서 홍위병들을 비롯한 다양한 세력들이 일으킨 일련의 무력 충돌들이다.2. 상세
무투가 생긴 기원을 따지노라면 먼 옛날 계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무투는 과거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정치깡패를 동원해 상대방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던 것을 한참 뛰어넘는 단순한 파벌 간 싸움이 아니었다. 초기에는 돌이나 벽돌, 각목과 같은 물건들로 패싸움을 벌이는 수준에 그치던 무투는 이윽고 무기고를 약탈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총과 기관총 같은 소화기는 물론 무반동포나 전차를 동원한 경우까지 있다. 이런 무기들은 무기고에서 약탈한 것에 그치지 않고 점거한 공장 등에서 만들거나 그냥 자작했던 경우도 많았다. 또[1] 염소 가스같은 화학무기까지 사용되었고 심지어는 항공기가 삐라 살포 및 물자 수송 등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3. 전개
1966년 12월 상하이에서 일어난 강평로 사건과 충칭에서 일어난 12.4 사건으로 중국 전역에서의 무투가 촉발되었으나 1967년 6월 6일 중앙에서는 6.6통령(六·六通令)을 내려 이러한 폭력적 행태를 막고자 하였다.그러나 약 1개월 반 이후인 7.20 사건 이후 장칭의 '문공무위'(文攻武卫) 주장 이후 무투는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무투는 1968년 7월 7.3 포고(七·三布告) 및 7.24 포고(七·二四布告)와 같은 포고령들이 거치면서 수그러들었고 7월 28일 마오쩌둥이 홍위병의 지도자 5명을 만나 비판하면서 칭화대학 백일대무투 등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4. 결과
무투로 인해 중국에서는 무려 23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700만 명 이상이 장애를 입었다.[2] 또한 1877만 정 이상의 총기, 1만 5천여 문 이상의 포, 270만 개 이상의 수류탄이 사용되었다.[3]이러한 무투의 발생으로 인해 마오쩌둥은 홍위병들을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하여 상산하향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