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당의 파벌 분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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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와 정책연구회 | |
<colbgcolor=#693041> 형성 | <colbgcolor=#ffffff,#1f2023>1979년 1월 24일 |
해체 | 2024년 1월 19일 |
설립자 | 후쿠다 다케오 |
해체 당시 회장 | 시오노야 류 (상임간사회 회장) |
주요 정치인 | 후쿠다 다케오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마치무라 노부타카 호소다 히로유키 시오노야 류 다카이치 사나에 마쓰노 히로카즈 |
홈페이지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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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이와 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는 일본의 정당인 자유민주당의 파벌이었다. 약칭으로 청화회(清和会)라고도 불렸다. 2024년 완전 해산을 발표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2. 역사
2.1. 후쿠다파 시절
세이와 정책연구회(이하 청화회)는 계보도적으로 보면 원래 기시 노부스케의 '십일회'에서 분파한 후쿠다 다케오를 중심으로 하여 1962년에 결성된 '당풍쇄신연맹'이 기원이었다.후쿠다 다케오는 약 7년 동안 집권한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차기 후계자로서, 사토에게 가장 신뢰를 받고 있던 사람이였으나, 사토 내각에서 여러 주요 요직을 거치며 세를 불려가고 있었던 다나카 가쿠에이 역시 차기 후계자로 거론되며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결국 다나카가 총재 겸 총리로 선출되고 후쿠다가 패배의 쓴맛을 느끼게 되자 이것을 계기로 1970~80년대 일본 정계는 각복전쟁이라는 다나카파와 후쿠다파 간의 정치 전쟁을 벌이게 되지만, 다나카 특유의 수완에 후쿠다가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허나 이것을 개선하다 결국 1976년,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총재 겸 총리에 선출되었으나 2년 후 오히라 마사요시와 다나카의 연합으로 총재선에서 다시 패배하며 재선에 실패했다.
이렇듯 다나카에게 두 번이나 패배한 후쿠다는, 1972년 총재선 직후 파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산회(호리 그룹)와 춘추회(소노다파)를 통합, '팔일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총리직에 오른 이후에는 파벌 정치를 타파하기 위해 팔일회를 해산하였으나, 총리직 퇴진 이후 재결성 여론이 높아져 1979년 1월 24일, '청화회'를 결성했다. 1984년에는 자유혁신동우회(이시하라파)를 흡수했다.
2.2. 아베파·미쓰즈카파 시절
1986년 중·참의원 공동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하여, 후쿠다는 차기 회장으로 아베 신타로를 지명했다.[2]아베는 뉴리더의 구성원 중 한 명으로서 나카소네 야스히로 후임 총리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자신과 같이 뉴리더중 한 명이었던 다케시타 노보루가 총리직을 차지했다. 다케시타 내각에서는 간사장을 역임하며 다케시타의 후계자로 거론되었으나, 리크루트 사건으로 데미지를 입고, 1991년 지병으로 사망하여 자신의 야망도 물거품으로 넘어갔다.
아베의 사망 이후 후계 회장 자리를 놓고 미쓰즈카 히로시와 가토 무쓰키가 대립하고, 한 때 아베파 사천왕이라고 불렸던 모리 요시로가 미쓰즈카를 지지하며 미쓰즈카가 회장직에 취임했다.
같은 해 미쓰즈카는 총재선에 출마했으나 가토가 이에 반해 미야자와 기이치를 지지했다. 이로 인해 가토는 청화회에서 제명되어 독립된 파벌을 결성한 후 자민당에서 이탈했다.
미쓰즈카·가토의 대립 이후에는 이번엔 모리계와 가메이계가 대립하게 된다. 한편 파벌 내에서는 산하 그룹으로 '21세기를 생각하는 모임·신정책연구회'가 결성되었다.
1998년, 모리계의 독자적인 주도로 총재선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출마를 결정하게 되자 이에 가메이계가 반발하였으나 모리가 간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자 가메이계가 청화회를 이탈하고 지수회를 설립하여 모리계가 청화회를 장악하게 되었다.
2.3. 모리파 시절
모리가 미쓰즈카의 후계자로 회장이 된 이후 1998년 말, 파벌 명칭을 세이와 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로 개칭했다. 2000년에는 모리가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되자 후쿠다 다케오 이후 자민당 내의 최대 파벌이 되었다. 모리는 총리직 취임으로 일시적으로 파벌을 탈퇴했기에 모리의 측근인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회장직을 맡았다. 회장 직을 계승한 모리는 과거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향력을 늘려가고 있던 고이즈미와 함께 대립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파벌을 장악했다.모리의 퇴진 이후 고이즈미가 총리 직에 취임하자 모리가 회장 직에 복귀했다. 고이즈미는 최대 파벌이었던 하시모토파를 자신들과 적대세력이라고 명명하고, 하시모토파 의원들을 내각에서 배제시키는 한편, 아오키 미키오가 하시모토파의 협력을 받는다는 핑계로 하시모토파를 견제·분열하여 이러한 효과를 봐 제44회 중원선에서 당 내 최대파벌로 성장했다.
2006년, 고이즈미의 임기 만료에 따른 2006년 총재선에서는 같은 모리파의 유력 후보로 아베 신조와 후쿠다 야스오가 자리에 올랐다. 이 둘의 부친은 한 때 청화회를 이끌던 사람들이었고, 2명이 입후보하면 모리파가 분열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후쿠다가 불출마를 선언하며 아베 신조가 총재 겸 총리로 당선되었다.
2.4. 마치무라파 시절
모리는 파벌 회장에서 퇴임하고, 마치무라 노부타카가 회장 직에 취임했다.2007년, 후쿠다 야스오가 총리직에 취임하고 마치무라가 관방장관에 취임하자, 파벌 회장직을 폐지하고 파벌 간부들이 돌아가며 운영하는 대행체제로 전환했다.
같은 해 제27회 참원선에서 자민당이 참패하였으나, 여전히 중참 양원의 최대 파벌로 유지되었다.
2008년, 총리 총재직 퇴임 이후 무파벌로 지내고 있었던 아베 신조가 '상담역'이라는 직책으로 파벌에 복귀했다. 한편 고이즈미는 무파벌인 상태로 2009년에 정계에서 은퇴했다.
같은 해 9월, 후쿠다 야스오의 총재 퇴임에 따른 총재선에서 마치무라가 유력한 후보자였지만, 같은 파벌이었던 아베와 후쿠다가 2대에 걸쳐 국정운영에 실패했기 때문에 2대 정권을 계속 지지했던 아소 다로를 밀어줘 후보를 옹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소가 총리로 선출된 이후 호소다 히로유키는 간사장으로, 마치무라는 관방장관에서 해임되었으나 대행체제의 변화는 없었다.
2009년, 마치무라가 회장으로 복귀하고 모리가 아베와 함께 상담역으로 활동하는 것이 결정되어, 마치무라파 하의 청화회가 더욱 굳건해졌다.
같은 해 제45회 중원선에서 굉지회에 이어 제2파벌로 추락했으나, 중참의원을 합하면 아직도 청화회가 최대 파벌의 자리를 유지했다. 또 같은 해 고이케 유리코가 "파벌이 아닌 당 전체가 단결해야한다"라고 발언하며 파벌을 탈퇴했다.
다니가키 사다카즈 집행부에서는 마치무라파가 전원 배제되며 창립 이후 처음으로 당 간부에서 배제되었다.
2012년 총재선에서 마치무라가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후 파벌 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아베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베가 거절하고, 자신이 직접 총재선에 출마하며 파벌이 혼란에 빠졌다. 파벌 내에서는 마치무라를 지지하는 의원이 70%에 달했으나, 아베는 다른 파벌이나 무파벌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마치무라에게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결국 아베가 총재에 당선되었다.
2.5. 호소다파·아베파 시절
2014년, 제47회 중원선 후 마치무라가 중의원 의장에 취임하자 호소다 히로유키가 회장 직에 취임했다.2020년 총재선에선 시모무라 하쿠분, 이나다 도모미, 니시무라 야스토시가 입후보에 의욕을 보였으나, 최종적으로 무파벌의 스가 요시히데를 지지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스가가 총리직에 취임한 이후 시모무라가 정무조사회장으로 집행부에 입성했다.
2021년 2월, 하시모토 세이코가 올림픽대신 취임으로 파벌을 이탈했다.
스가의 사임으로 치러진 2021년 총재선에선 시모무라가 또다시 출마 의향을 드러냈으나 선회하였고, 아베가 밀어주는 다카이치 사나에와 호소다가 밀어주는 기시다 후미오 양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10월에 발족된 기시다 내각에서 마쓰노 히로카즈가 관방장관에 취임했다.
11월 10일, 정계를 은퇴한 오시마 다다모리의 후임으로 호소다 히로유키가 중의원 의장에 취임하면서 파벌을 이탈하고 아베가 회장직에 취임했다.
그러나 2022년 7월 8일, 아베가 괴한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 파벌이 혼란에 빠졌다. 처음에는 시오노야 류를 중심으로 하는 7인 권한대행 체제로 운영할 것임이 밝혀졌으나, 파벌 내의 젊은 의원들의 반발로 회장대리인 시오노야와 시모무라가 대행하기로 결정했다.
국장 이후에도 회장을 공석으로 놔두기로 결정했다.#
아베 사망 이후로 파벌 내 구심점이 없는 상황에서 모리 요시로 전 총리가 다시 입지를 강화하면서 때아닌 모리파로의 복귀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2023년 8월, 집단지도체제로 운영하기로 결정했으며, 파벌의 주요 인물들이 참여해 중요 사항을 결정하는 '상임간사회'를 신설하는 방안을 확정했다.# 모리 요시로 전 총리의 요구로 시모무라 하쿠분은 상임간사회 멤버에서 제외되었으며, 청화회의 5인조인 다카기 쓰요시, 마쓰노 히로카즈, 니시무라 야스토시, 하기우다 고이치, 세코 히로시게와 참의원 각료 경험자 등이 간사회에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간사회는 오는 8월 31일에 신설된다.
2.5.1. 비자금 파문과 파벌 해산
2023년 12월, 파벌에 대한 대규모 비자금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 아베파 뿐만 아닌 자민당과 야당들에서 정치자금 논란이 확산되고 있으나, 특히 아베파가 정치자금 논란이 가장 심해 직격을 맞고있다. 결국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12월 14일 아베파 인사 일부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아베파 내각 인사 12명[3]과 당 인사 3명[4]이 교체되었다. 19일 니카이파와 함께 사무소까지 압수수색당하며 파벌의 존립이 위협에 처했다. 다만 현재까지는 파벌 해체까진 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아베파가 무려 20년도 전인 모리 요시로 회장 시절 때부터 정치자금법을 위반했다는 의혹이 터지면서 검찰이 모리 전 총리에게 사실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모리 전 총리는 8월의 상임간사회 간부 선임에도 관여했을 정도로 현재까지도 아베파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중이며, 아베파 논란이 발생했을 때 어떠한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다. 또한 아베 신조 전 총리 역시 생전에 해당 사실을 알고 있어 사망하기 3개월 전에 아베파 간부들과 관련 회담을 했었다고 한다.
2024년 1월 7일, 정치자금 논란에 휩싸인 이케다 요시타카 의원이 검찰에 의해 구속되었다. 다음 날 오노 야스타다와 타니가와 야이치 의원 또한 같은 혐의로 구속되면서 자민당에서 구속된 의원만 4명[5], 그 중 아베파는 무려 3명으로 늘어났다.[6]
1월 18일, 한 아베파 간부가 아베파의 해산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고,# 다음 날 파벌 관계자가 단독 기사를 통해 해산이 결정되었다고 밝혔다.# 비자금 문제로 인해 파벌이 해산되는건 동일 니카이 도시히로 회장에 의해 해산된 지수회 이후 2번째로, 이후 동일 저녁에 시오노야 류 상임간사회 회장이 공식 해산을 선언했다.#
2월 1일, 마지막 총회를 열어 45년 만에 완전 해산을 발표했다. 파벌 해산 후 남은 업무는 새로 설립된 '청산관리위원회'가 맡는다.#
3. 역대 회장 목록
- 굵은 글씨는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인물.
<rowcolor=#fff> 대수 | 이름 | 파벌 호칭 | 임기 |
1 | 후쿠다 다케오 | 후쿠다파 | 1979년 ~ 1986년 |
2 | 아베 신타로 | 아베파 | 1986년 ~ 1991년 |
3 | 미쓰즈카 히로시 | 미쓰즈카파 | 1991년 ~ 1998년 |
4 | 모리 요시로 | 모리파 | 1998년 ~ 2000년 |
5 | 고이즈미 준이치로 | 2000년 ~ 2001년 | |
6 | 모리 요시로 | 2001년 ~ 2006년 | |
7 | 마치무라 노부타카 | 마치무라파 | 2006년 ~ 2007년 |
- | 마치무라 노부타카 나카가와 히데나오 다니가와 시젠 | 2007년 ~ 2009년 | |
8 | 마치무라 노부타카 | 2009년 ~ 2014년 | |
9 | 호소다 히로유키 | 호소다파 | 2014년 ~ 2021년 |
10 | 아베 신조 | 아베파 | 2021년 ~ 2022년 |
공석 (2022년~2023년) | |||
-[7] | 시오노야 류[8] | 아베파 | 2023년 ~ 20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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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 종조부 사토 에이사쿠 · 조부 아베 간 · 아버지 아베 신타로 · 아내 아베 아키에 · 형 아베 히로노부 · 남동생 기시 노부오 · 친조카 기시 노부치요 | |||
역대 선거 | 제40회 중의원 · 제41회 중의원 · 제42회 중의원 · 제43회 중의원 · 제44회 중의원 · 제45회 중의원 · 제46회 중의원 · 제47회 중의원 · 제48회 중의원 · 제49회 중의원 | |||
역대 내각 | 아베 신조 내각 (제1차 내각 (개) · 제2차 내각 (개) · 제3차 내각 (1개, 2개, 3개) · 제4차 내각 (1개, 2개)) | |||
비판 및 논란 | 비판 및 논란 아베 신조 한국 비하 발언 논란 ·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 · 2019년 벚꽃을 보는 모임 논란 · 아베노마스크 | |||
경제 정책 | 아베노믹스 | |||
외교 정책 | 인도-태평양 ·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 · 한국의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와 관련한 WTO 분쟁 · 한일 무역 분쟁 ·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 | |||
소속 | 자유민주당 · 세이와 정책연구회 | |||
보수주의 | }}}}}}}}} |
[1] 현재는 접속 불가.[2] 참고로 아베 신타로는 전 내각총리대신이자 훗날 청화회의 회장을 역임한 아베 신조의 부친이다. 다만 정치/외교적 성향은 아들과 달리 온건했다고 알려져있다.[3] 국무대신 4명(마쓰노 히로카즈 내각관방장관,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산업대신, 미야시타 이치로 농림수산대신, 스즈키 준지 총무대신), 부대신 6명, 정무관 1명(사토 게이 재무대신 정무관), 총리보좌관 1명[4] 세코 히로시게 참의원 간사장, 하기우다 고이치 정무조사회장, 다카기 쓰요시 국회대책위원장[5] 가키자와 미토(다니가키 그룹 / 공직선거법 위반), 이케다 요시타카, 오노 야스타다, 타니가와 야이치(이상 아베파 / 정치자금법 위반)[6] 이들 4명은 12월 14일 가키자와 미토 탈당, 1월 7일 이케다 요시타카 제명, 1월 19일 오노 야스타다, 타니카와 야이치 탈당으로 모두 자민당 소속이 아니게 되었다.[7] 상임간사회[8] 상임간사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