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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존 카사베츠 John Cassavetes | |
본명 | 존 니콜라스 카사베츠[1] John Nicholas Cassavetes |
출생 | 1929년 12월 9일 |
뉴욕 주 뉴욕 시 | |
사망 | 1989년 2월 3일 (향년 59세) |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블레어 아카데미 미국극예술아카데미 |
직업 | 배우, 영화감독 |
활동 | 1951년 ~ 1989년 |
부모 | 어머니 캐서린 카사베츠[2] |
배우자 | 제나 로우랜즈(1954년 결혼) |
자녀 | 아들 닉 카사베츠(1959년생) 딸 알렉산드라 카사베츠 딸 조이 카사베츠(1970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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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내이자 뮤즈였던 제나 로우랜즈와 함께. |
미국 국적의[4] 배우, 감독이자 극작가. 미국 독립영화계를 개척한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다. 성의 원발음은 카사베티즈(/ˌkæsəˈvɛtiːz/)에 더 가깝다.
미국 독립영화 역사의 맨 앞에 위치한 1세대 독립영화 감독으로 분류되며, 존 카사베츠로 시작한 미국 독립영화는 현재까지도 명맥이 잘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주로 뉴욕에서 활동하였다. 존 카사베츠는 12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이 가운데 10편의 각본을 직접 쓰기도 했으며, 그 중 몇 편은 자신이 직접 자금을 출자해서 만든 영화다.
2. 생애
카메라를 들고 있는 존 카사베츠. |
존 카사베츠는 뉴욕시에 위치한 미국극예술아카데미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도 연극 활동에 매진한다. 1956년에는 뉴욕 내에 연구회를 만들어서 새로운 연기 방법에 대해 가르치기도 했다. 이때문에 즉흥연기의 선구자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59년 처음으로 자신이 쓴 각본으로 연출한 영화인 <그림자들>(Shadows, 1959)을 만든다. 영화 역사적 측면에서 <그림자들>은 미국 독립영화계에서의 분수령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높이 평가를 받지만, 영화 제작의 측면에서는 고난 그 자체였다. <그림자들> 이전의 상업적 독립영화는 선례가 없다시피 할 정도라, 영화 제작 과정 하나하나가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에 가까웠다.[5][6][7] 제작비를 자신의 지인이나 가족들로부터 빌려서 간신히 충당해야 했고, 촬영 장비는 동료 독립영화 감독인 셜리 클라크에게서 빌려야 했을 정도로 소규모 저예산이었고, 기껏 힘들게 만들었는데도 정작 미국 내에서 배급사를 찾는데 실패하는 등 개봉조차도 어려워서 험난한 길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림자들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수상했고, 이에 힘입어 유럽에서 역수입되는 형태로 미국에서 어렵게 개봉될 수 있었다.
이후 60년대 초반에 카사베츠는 그의 연출력을 눈여겨 본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 픽업되어 두 편의 영화를 감독하기도 하였다.[8] 또한 감독직과는 별개로 50년대부터 TV 드라마 등에 연기자로 출연하며 명성을 서서히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영화들에 배우로 출연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드라마와 영화 등에 출연하며 모아둔 돈을 가지고 캘리포니아로 옮겨가서 영화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때 출연한 영화들 중 유명한 작품은 <악마의 씨> (Rosemary's Baby, 1968), <특공 대작전>(The Dirty Dozen, 1967)[9] 등이 있다. 하지만 존 카사베츠는 남의 작품에서 연기를 하는 것보다는 자기 작품의 연출을 더 원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자신의 영화를 만들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남의 영화에서 배우로 원치 않게 활동해야 했던 상황이었다.[10]
존 카사베츠는 60년대 중반까지도 연기자로 활동하거나 TV시리즈의 몇몇 에피소드를 감독하면서 보내야만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68년에 들어서야 <얼굴들>(Faces, 1968)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독립영화 감독으로서의 행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카사베츠 그 자신이 직접 자금을 출자하고, 연출한 이 영화는 자신의 아내인 제나 로우랜즈를 주연으로 했다. 현대 결혼생활의 붕괴를 묘사한 이 영화는 제작기간이 약 3년이나 될 정도로 길었는데, 이렇게 제작기간이 늘어진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영화를 찍다가 제작비가 떨어지면 그때그때 벌어서 충당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작 여건 상 촬영지는 대부분 카사베츠 본인의 집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게 찍은 <얼굴들>은 아카데미에서는 각본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등에 노미네이트될 정도로 좋게 평가 받았으며 평단의 평가도 호평일색이었다. 이러한 비평적인 성공을 바탕으로 카사베츠는 자신의 영화를 안정적으로 배급하기 위해 'Face International'라는 이름의 배급사를 차린다.
1970년에는 형사 콜롬보로 유명한 배우 피터 포크와 함께 <남편들>(Husbands, 1970)을 만들었고, 이듬해인 1971년에는 아내인 롤랜즈와 <미니와 모스코비츠>(Minnie and Moskowitz, 1971)[11]를 만들었다.[12] 1974년에는 그의 페르소나인 피터 포크와 제나 로우랜즈와 함께 그의 대표작이라 할만한 <영향 아래 있는 여자>(A Woman Under the Influence, 1974)[13]를 만드는데, 이 영화가 비평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게 되어 제나 로우랜즈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골든 글로브에서는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또한 카사베츠는 이 영화로 연출력을 인정받아 아카데미 감독상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1976년에는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In The Killing of a Chinese Bookie, 1976)을, 1977년에는 롤랜즈와 함께 카사베츠도 직접 출연한 <오프닝 나이트>(Opening Night, 1977)를 찍는다. 이 작품을 통해 롤랜즈는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여우주연상 부문을 수상한다. 하지만 존 카사베츠의 작품들은 오락, 상업영화를 선호하는 미국인들의 취향보다는 예술영화도 선호하는 유럽인들의 취향에 더 잘 맞았고, 이로 인해 자국인 미국 내에서 보다 유럽에서 더 많은 사랑과 높은 평가를 받던 감독이었다.[14]
1980년에는 <글로리아>(Gloria, 1980)를 찍게 된다. 처음에 카사베츠는 이 작품을 연출할 생각은 없었기에 각본만 써서 콜럼비아 픽처스에 팔았는데, 차후에 제작사에서 감독 제의를 했을때 아내인 제나 로우랜즈의 권유로 연출까지 함께 했다고 한다. 여기서의 열연으로 롤랜즈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1984년에 그에게 찾아온 간경변 때문에 의사로부터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고, 이때 그의 실질적인 유작으로 평가받는 <사랑의 행로>(Love Streams, 1984)을 만든다. 이 작품도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그 후 저런 영화나 연극을 제작하던 카사베츠는 당초 예상된 6개월을 훌쩍 넘어 1989년까지 살다가 5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을 통해 <그림자들>, <얼굴들>, <영향 아래 있는 여자>,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 <오프닝 나이트>, <사랑의 행로> 등 총 6편의 작품이 출시되어 있다. 2020년 <남편들>도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출시할 것으로 밝혀져 <별난 인연>과 <글로리아> [15], 본인이 흑역사로 취급하는 스튜디오 영화들 빼곤 크라이테리온에서 출시한 상태다.
아들인 닉 카사베츠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감독 겸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16] 97년에는 자신과 아버지와 같이 썼던 각본을 가지고 <더 홀>(She's So Lovely, 1997)를 찍었고, 주연도 생전에 아버지가 고려했던 숀 펜을 기용하기도 했다.[17] 주요 연출작으로는 라이언 고슬링과 레이첼 맥아담스 주연으로 유명한 <노트북>(The Notebook, 2004)이나 카메론 디아즈와 2014년 현재 야구선수 저스틴 벌랜더의 여자친구로 더 유명한 케이트 업튼을 데리고 찍은 <아더 우먼>(The Other Woman, 2014)이 유명하다. 나름 감독으로서 활동은 활발하지만 아버지의 역량에는 못미친다는 평가. 아버지가 예술영화 감독으로서 예술성과 작품성이 돋보인다면, 아들은 흥행 감독으로서 대중성이 돋보이는 편. 그외에 나머지 두 딸 알렉산드라와 조도 각각 다큐멘터리와 영화 감독으로 활동중이다.
3. 평가
비록 연출한 영화의 편수는 많지는 않지만, 50년대 이래 미국 영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미국 독립영화계의 개척자로, 로버트 알트만과 함께 미 독립영화계의 양대 기수로 인정받는다. 알트만이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군상극에 집중했다면, 존 카사베츠는 누벨바그와 궤를 같이 하며 로케이션과 리얼리즘 위주의 드라마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84년 독립영화인들과 그들의 영화를 기리고 신예 독립영화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져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는 Independent Spirit Awards에서는 두 사람을 기려 Robert Altman Award과 John Cassavetes Award를 시상하고 있다. 전자는 많은 배우들로 연출하길 좋아했던 로버트 알트만을 기려, 매해 앙상블 캐스트로 유명한 영화 1편을 뽑아, 영화의 감독, 캐스팅 감독, 배우들에게 시상한다. 후자같은 경우는 50만 달러 이하로 제작된 영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 한편을 뽑아 작가, 감독, 제작자에게 시상한다. 이 상을 받은 작품 중 유명한 영화는 블레어 위치가 있다.좌측부터 존 카사베츠, 카사베츠의 페르소나로 유명한 피터 포크, 제나 로우랜즈, 벤 가자라. |
마틴 스콜세지에게는 멘토와 같은 존재였다.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로 1970년대 초 갓 영화계에 입성한 스콜세지는 전설적인 영화 제작자 로저 코먼 아래서 <바바라 허시의 공황시대>(Boxcar Bertha, 1972)라는 영화를 찍었다. 스콜세지는 빠듯한 예산 속에서도 나름 괜찮은 영화를 찍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카사베츠가 왜 이런 쓰레기에 네 인생을 낭비하냐, 너만의 개인적인 영화를 만들어라 라고 꾸짖었고, 이에 스콜세지는 절치부심해서 비열한 거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스콜세지는 이후 카사베츠의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4. 필모그래피
<rowcolor=#fff> 연도 | 제목 | 원제 | 화면비 |
1959 | 그림자들 | Shadows | 1.37:1 |
1961 | 투 레이트 블루스 | Too Late Blues | 1.78:1 |
1963 | 기다리는 아이 | A Child Is Waiting | 1.66:1 |
1968 | 얼굴들 | Faces | 1.66:1 |
1970 | 남편들 | Husbands | 1.85:1 |
1971 | 별난 인연 | Minnie and Moskowitz | 1.85:1 |
1974 | 영향 아래 있는 여자 | A Woman Under the Influence | 1.85:1 |
1976 |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18] | The Killing of a Chinese Bookie | 1.85:1 |
1977 | 오프닝 나이트 | Opening Night | 1.85:1 |
1980 | 글로리아 | Gloria | 1.85:1 |
1984 | 사랑의 행로 | Love Streams | 1.85:1 |
1986 | 빅 트러블[19] | Big Trouble | 1.85:1 |
5. 외부 링크
[1] 실제 발음은 캐서베티즈다.[2] 1906년~1983년. 배우.[3] The New Yorker, July 1, 2013, p. 17 "On the Horizon: Movies: Wild Man Blues July 6–31"[4] 인종상으로는 그리스계 미국인으로 분류된다. 어렸을때 그리스에서 살았으며, 한동안은 영어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5] 물론 미국 독립영화가 존 카사베츠 이전에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마야 데린으로 대표할 수 있는 아방가르드 예술 독립영화는 카사베츠 이전에도 존재하였다. 하지만 카사베츠의 작업은 이들과는 결을 달리하는데, 기존 예술 독립영화들은 순수예술적인 측면에 방점이 찍힌 예술 작품으로써 제작이 이루어졌던 반면 카사베츠는 (대중에 공개하는 상업적 개봉을 염두에 둔) 작가주의적인 독립영화로 자신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기존의 아방가르드 예술 독립영화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독립영화가 만들어진, 말 그대로 일종의 분수령인 셈이다.[6] 하나의 시작점으로 간주되는 작품이니 만큼 영화에 얽힌 여러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본 작품이 전부 즉흥연기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가 끝나고, 자막으로 "당신이 방금 본 영화는 즉흥연기로 이루어졌다.(the film you have just seen was an improvisation.)"고 선언하기까지도 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사실은 대본이 있긴 있었다.[7] 또한 이 영화엔 찰스 밍거스가 사운드트랙으로 참여했는데, 찰스 밍거스는 이를 즉흥연주로 완성시켰다. 이로 인해 그림자들의 사운드트랙은 영화사의 뉴웨이브와 재즈사의 프리 재즈가 접목된 순간으로 기록되기도 한다.[8] 이 두 편의 영화는 <투 레이트 블루스>(Too Late Blues, 1961)와 <기다리는 아이>(A Child Is Waiting, 1963)이다. <투 레이트 블루스>는 파라마운트에서 제작 및 배급을 했으며, <기다리는 아이>는 유명한 감독이자 제작자인 스탠리 크레이머가 제작하고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 배급했다. 하지만 카사베츠는 이 시기에 그저 고용 감독으로서의 좁은 입지만을 가지고 있었기에 작가적 자유를 누리지 못했으며, 그 때문에 이 시기의 영화들을 흑역사 취급했다.[9] 특공 대작전에서의 반항적인 징집병 연기로 1968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하였다.[10] 카사베츠처럼 자신이 원하는 본업이 있음에도 금전적 이유로 인해 그다지 원치는 않는 연기업을 부업으로 해야 했던 또 다른 케이스로는 극작가 겸 배우였던 샘 셰퍼드가 있다. 셰퍼드는 자신의 희곡 <매장된 아이>(Buried Child, 1978)로 1979년 퓰리쳐상 희곡부문을 수상했으며 그가 각본을 썼던 <파리, 텍사스>(Paris, Texas, 1984)는 1984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까지도 했을 정도로 희곡 및 각본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퍼드 역시 극작가만으로는 먹고살기가 녹록지않았고 여러 영화들에서 연기 활동을 하면서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흥미롭게도 샘 셰퍼드도 카사베츠처럼 스스로는 연기를 본업으로 여기지 않았음에도, 그 연기력을 인정받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샘 셰퍼드가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작품은 필립 카우프만의 1983년작 <필사의 도전>(The Right Stuff, 1983)인데 그는 여기서 척 예거 역을 맡았다.[11] 한국에서는 별난 인연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12] 동시에 콜롬보 시즌 2에 악역인 알렉스 베네딕트 역으로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13] 한국에서는 술취한 여자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14] 미국 배급에서 상당히 고생했던 감독이다. 심지어 <오프닝 나이트>는 기껏 잡은 상영관이 텅텅 비었고, 사망하기까지 재상영되지 않았다는 슬픈 일화가 전해진다.[15] <글로리아>는 컬럼비아 픽처스가 판권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곳에서 블루레이가 나왔다.[16] 배우로의 대표작은 영화 페이스 오프이다.[17] 숀 펜은 이 영화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18] 135분 버전과 108분 버전이 존재한다. 원래는 135분으로 개봉했으나 이 버전의 흥행 성적이 몹시 안 좋았던 데다가 주연 벤 가자라의 건의까지 겹쳐져 카사베츠는 이 영화를 재편집한 뒤 재개봉하였는데 이 역시 흥행에는 실패한다.[19] 한국 개봉 제목 때문에 존 카펜터가 감독한 빅 트러블 (Big Trouble in Little China)랑 헷깔리지만 전혀 다른 영화이다. 둘 다 1986년 개봉작인데 이 영환 카사베츠의 유작이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 작품도 아니었고, 카사베츠 본인도 이 영화를 싫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