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4:25:00

조긍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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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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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축구협회 대회위원장
Korea Football Association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AKR20160306025800007_01_i_99_20160306122405.jpg
<colbgcolor=#00285e,#164266><colcolor=#ffffff> 이름 조긍연
趙兢衍 | Cho Keung-Yeon
출생 음력 1961년 3월 18일[1] ([age(1961-03-18)]세)
전라북도 옥구군
(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2]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본관 풍양 조씨[3]
신체 178cm
학력 발산초등학교 (1968~1973)
옥구중학교 (전학)
군산제일중학교 (1974~1977)
영등포공업고등학교 (1978~1980)
고려대학교 (1981~1984, 학사)
가족 아버지 조남융[4]
소속 <colbgcolor=#00285e,#164266><colcolor=#ffffff> 선수 포항제철 아톰즈 (1985~1991)
현대 호랑이 (1992)
지도자 포항 스틸러스 (2000~2003 / 코치)
선문대학교 축구부 (2004~2012)
연변 FC (2012~2013)
행정가 한국프로축구연맹 (2016 / 경기위원장)
대한축구협회 (2017 / 기술분과위원)
전북 현대 모터스 (2018 / 기술위원)
대한축구협회 (2019~ / 대회위원장)
국가대표 6경기

1. 개요2. 선수 경력
2.1. 유소년 시절2.2. 클럽 경력2.3. 국가대표 경력
3. 지도자 경력4.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지도자이자 행정가. 現 대한축구협회 대회위원장.

2. 선수 경력

2.1. 유소년 시절

음력 1961년 3월 18일(양력 5월 2일) 전라북도 옥구군(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에서 아버지 조남융(趙南融, 1932.2.16. ~ 2016.6.24.)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발산초등학교 3학년 때 축구를 시작하여 옥구중학교에 진학했다가 군산제일중학교로 전학하였고, 중학교 3학년 때 영등포공업고등학교로 스카웃되었다. 빠른 스피드와 정확한 왼발 슛으로 일찍이 각광을 받았으며 영등포공업고등학교에서 그 기량이 만개하게 되었다. 고교무대를 평정하며 제2의 차범근이라는 수식어는 그를 항상 따라다녔고 각종대회 득점왕은 대부분 그의 몫이 었다. 공격수로써 필수적인 3B(Brain, Ball controll, Body ballance)와 스피드를 고루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국가대표에 승선하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받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고려대학교에 진학했으나 이때는 조금 부진했지만, 포항제철 아톰즈에 입단한다.

2.2. 클럽 경력

파일:조긍연.jpg
1985년, 포항제철 아톰즈에서 프로 선수 경력을 시작하였다. 턱수염을 길게 기른 외모로 털보 조긍연이라고 불렸다.

신인시절 등번호 99번을 배정받았다. 1985년 4월 21일 인천에서 진행한 85'축구대제전에서 최순호를 대신해 출전하며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그러나, 근육통에 시달리며 14경기 2득점으로 부진했다.

1986년 초반 5경기에서 4골을 기록하며 득점 선두에 올랐으나, 막판 뒷심이 부족해 득점 4위에 오르는데 그친다.

1987년 20경기 3골로 부진했고, 1988년에는 데뷔 첫 해트트릭을 기록했으나, 역시 뒷심이 부족해 시즌 5골을 넣는데 그친다.

1989년에는 시즌 개막전부터 득점을 기록했고, 이 시즌에만 두 번의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자신의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또한 K-리그 통산 1300호골과 1400호골 역시 이 시즌에 기록했다. 무엇보다, 리그 39경기에 출장해 20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한국프로축구 첫 시즌 20골이라는 대기록이었다.[5] 결국 노수진윤상철을 누르고 1989년 득점왕을 차지했다.

이런 활약에 1989년 시즌 후 차범근의 추천을 통해 바이어 04 레버쿠젠을 통해 분데스리가 진출을 시도했지만 입단테스트에서 몸상태가 안 좋았으며, 서른을 앞둔 나이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김종부, 박경훈, 이길용, 이기근, 최상국, 이흥실 등과 함께 1980년대말 포철의 황금기를 이끌다가, 1992년 현대 호랑이에서 한 시즌을 뛰고 은퇴했다. 당초 새로 창단한 완산 푸마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고 했으나 완산 푸마 측에서 거절했다.

2.3. 국가대표 경력

조긍연은 영등포공업고등학교 시절, 당시 국가대표 김정남 코치의 눈에 들어 태극마크를 달았다. '고교생 국가대표 1호'였다. 하지만 왼발잡이였던 그는 양발을 자유자재로 쓰지 못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오른발을 잘 쓸수 없으니 슈팅타이밍이 늦어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지 못한다는 단점이 발목을 잡았고 그것이 약점으로 작용했다. 결국 이 부분은 그가 선수생활을 하는 내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가 한 단계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하는데 장애물이 되었다. 오른발을 더 잘 쓸 수 있었다면 대성할 수 있었다는게 당시 코치들의 중론...

3. 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 당시 현대 호랑이의 감독이던 차범근 감독이 지도자 제의를 했으나, 거절하고 개인 사업을 했다. 하지만, IMF 사태로 실패하고 만다.

이후 포항제철시절 선배였던 최순호 감독이 포항 스틸러스의 감독으로 승격하던 2000년 7월, 최순호의 요청으로 친정 팀인 포항에 코치로 합류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3년 동안 포항에서 최순호 감독을 보좌했다.

이후 2003년 초, 브라질 1부리그 과라니 FC에서 7개월 간 지도자 연수를 떠났다.

귀국한 후 2004년 1월, 해체 직전에 선문대학교 감독에 부임하며 첫 감독직을 시작하게 된다. 2006년 전국춘계 1,2학년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는 등, 2012년 5월까지 8년이 넘도록 선문대를 지휘하며 경쟁력 있는 팀으로 만드는데 많은 부분을 기여한다.

이후 2012년 6월, 선문대 시절 조긍연을 보좌하던 정성훈 코치와 함께 중국 2부리그인 갑급리그 소속인 연변 FC에 임시 감독으로 부임했다. 포철에 입단했을 때 스승이던 최은택 감독에 이어 옌볜 백두산 축구팀의 두 번째 한국인 감독이 됐다. 부임 전 15개 팀 중 13위에 허덕이던 팀을 두 달 만에 8위까지 끌어올렸으나, 허리 부상으로 2개월 만에 계약을 해지하고 국내로 귀국하며 자신의 첫 번째 프로 감독 커리어를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을 높게 산 연변 구단은 2013년 시작 전 그에게 다시 지휘봉을 맡겼다. 그러나, 선수단 장악에 실패하며 선수단과 불화가 생겼고 결국 8월에 정성훈 코치와 함께 지휘봉을 내려 놓게 된다.

4. 여담

  • 머리와 수염을 길렀던 시기는 고작 2년 밖에 안 되지만 1989년 득점왕을 차지했을 때, 수염을 기르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털보로 각인되었다고 한다. 1990년에는 골이 지독히도 안 들어가자 아예 삭발을 했다고 한다.


[1] 양력 5월 2일[2] 2006년 11월 3일 KBS뉴스[3] 전직공계(殿直公系)-회양공파(淮陽公派)-학생공파(學生公派) 27세 연(衍) 항렬.[4] 2016년 6월 24일 사망했다.#[5] 해당 기록은 1994년 윤상철이 24골을 기록하며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