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0 18:19:30

김종부

김종부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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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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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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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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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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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부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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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1984 ·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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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시티 감독
南京城市足球俱乐部
파일:김종부 난징.jpg
<colcolor=#fff><colbgcolor=#162B5A> 이름 김종부
金鍾夫 | Kim Jong-boo
출생 1965년 1월 13일 ([age(1965-01-13)]세)
경상남도 충무시 (現 통영시)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83cm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자영업자
학력 유영초등학교 (졸업)
중동중학교 (졸업)
중동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학사)
소속 <colcolor=#fff><colbgcolor=#162B5A> 선수 포항제철 아톰즈 (1988~1989)
대우 로얄즈 (1990~1993)
일화 천마 (1993~1994)
대우 로얄즈 (1995)
감독 거제고등학교 (1997~2001)
동의대학교 (2002~2005)
중동고등학교 (2006~2010)
양주시민축구단 (2011~2012)
화성 FC (2013~2015)
경남 FC (2016~2019)
허베이 FC (2021~2022)
난징 시티 (2024~ )
국가대표 25경기 8골 (대한민국 / 1983~1990)
서명 파일:김종부서명.svg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지도자 경력
3.1. 초기3.2. 화성 FC 감독3.3. 경남 FC 감독3.4. 중국 무대3.5. 지도 스타일
4. 논란 및 사건 사고
4.1. 스카우트 파동4.2. 음주운전4.3. 조기호 대표 이사와의 불화
5.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한국 축구계에서 비운의 천재 계보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된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후술할 김종부 스카우트 파동 이후, 대우 로얄즈와 현대 호랑이의 공동 임대 형식으로 포항제철 아톰스에 2년 임대되었다. 어부지리로 김종부를 얻은 포항은 대우에만 이적료 1억 1천만원을 지급하며 김종부 영입에 열의를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프로에 입성한 김종부는 데뷔 시즌 K리그 도움왕을 차지하면서 역시 김종부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후술할 스카우트 파동으로 1년여간 운동을 쉰 부작용이 오래가지 않아 나타났다. 체력은 갈수록 떨어져 교체되는 횟수가 잦았고, 잦은 부상과 컨디션 난조에 시달린 것이다. 결국 포항제철은 김종부가 이름값을 못한다는 평가와 함께, 대우와 현대 측에 김종부의 처분을 논의했고 대우는 수비수 손형선과 이적료 2천만원을 내주는 트레이드하게 된다.

그토록 본인이 원하던 대우에 입단한 김종부는 친정 팀 포항제철을 상대로 득점포를 가동하는 등 1990 시즌에만 5골을 기록하며 서서히 부활하는 것이 아니냐는 희망섞인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91년 조덕제가 김종부의 자리를 노리며 급성장했고, 김종부는 몇 경기 출장하지도 못했거니와 출장한 경기마다 부진한 움직임 끝에 교체당해 아쉬움만을 남겼다.

결국 1993년 김종부를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가르친 박종환이 이끄는 일화 천마에 입단하게 되었다. 계약금은 0원, 월봉 120만원의 조건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일화에 입단한 김종부였지만, 일화에서의 생활도 순탄치는 않았다. 김종부의 포지션에는 신태용, 고정운 같이 1993년부터 1995년까지 K리그 3연패라는 업적을 일구게 되는 전설적인 선수들이 즐비했다. 제 기량이 아닌 김종부가 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1994년을 끝으로 일화에서도 퇴단한 김종부는 1995년 대우에서의 생활을 마지막으로 쓸쓸하게 은퇴하고 만다.

2.2. 국가대표 경력

파일:external/www.kfa.or.kr/200711313724.jpg

1983년부터 1990년까지 25경기 8골을 기록했다. 그 8골 중 하나가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기록한 골이다. 그것도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 불가리아를 상대로 0:1로 뒤지던 상황에 측면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수비수 두 명 사이에서 가슴으로 트래핑한 뒤 다이렉트 발리 슛으로 넣은 동점골로 대한민국이 월드컵 본선에서 첫 승점을 획득하게 만들어 준 골이다. 여러 가지로 당시 대한민국 축구에서 기대가 큰 유망주였으나 여러 불운으로 빛을 보지 못한 선수.

3. 지도자 경력

3.1. 초기

은퇴 후 1997년 대우 로얄즈의 U-18 팀이라고 할 수 있는 거제고등학교 축구부 지휘봉을 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2002년 동의대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아 FA컵에서 포항 스틸러스를 이기고 16강에 오르는 이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모교 중동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챌린저스 리그 양주시민축구단의 감독을 맡았다.

3.2. 화성 FC 감독

2013년에는 K3 챌린저스 리그의 신생팀 화성 FC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첫 시즌에 곧바로 B조 1위이자 통합 정규리그 2위를 차지했다. 비록 챔피언십에서 파주에게 패하며 챔피언 결정전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두각을 보였다.

2년 차인 2014년에는 팀을 아예 K3리그 우승을 이끌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당대 K3리그 최강 팀이던 포천을 챔피언 결정전에서 물리치며 깜짝 우승을 달성했다. 2014년 기록한 승점 59점은 2023년 현재도 화성의 구단 한 시즌 최다 승점 기록이다.

2015년에는 FA컵에서 구단 첫 16강 진출을 일궈내는 등 세미프로 레벨에서 정상급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3.3. 경남 FC 감독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남 FC/김종부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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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중국 무대

3.4.1. 허베이 FC 감독

2021년 3월 중국 허베이 FC 감독으로 부임하며 말컹과 재회하게 되었다. #

시즌 개막 3주를 앞두고 급하게 부임하는 바람에 체력 훈련은 실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중국 리그의 가장 큰 애로사항인 장거리 이동은 코로나 19 사태 때문에 없어졌으므로 체력이 그다지 필요하지는 않을 듯.

4월 28일, 2라운드 다롄 프로를 맞아 말컹의 페널티킥으로 1 : 0으로 신승하여 중국 리그 첫승을 신고했다. 1라운드에서는 우한 FC을 맞아 1 : 1로 비겼다.

허베이 FC의 모기업 싱푸 그룹이 선수 임금을 체불할 정도로 매우 어려워져 (어렵게 데려온 말컹도 팔아야 할 정도였다) 팀은 강등권으로 쳐박힐 위기에 처했으나 최종 순위에서 16개 팀 중 8위에 머물러 구단주가 김종부를 칭송했다고 한다.

2022 시즌은 너무 처참하다. 선수단 구성은 외국인 선수 없이 10대 후반~20대 초반 어린 선수들로 구성됐고 재정난으로 월급도 제데로 못주면서 팀 사기나 프로 정신 이런건 기대도 할 수 없다. 시즌 중반까지 1승 15패로 사실상 최하위 강등이 유력하다. 그러나 이건 김종부의 능력 밖에 일이라 3연패만 해도 샤커(사퇴)를 외치는 서포터즈가 김종부를 불쌍히 여겼다.

2022년 12월 17일, 시즌이 마감되지 않았지만, 계약 종료로 팀을 떠났다. #[1]

3.4.2. 난징 시티 감독

2024년 2월 4일, 중국 갑급 리그 난징 감독으로 부임하며 1년 만에 감독직에 복귀했다.#

3.5. 지도 스타일

단순한 원패턴인 4-4-2 역습축구를 애용하는 편인데 극한의 효율성을 강조해서 점유율을 사실상 신경쓰지 않는 편이다.

수비시 하프라인 아래 3/4 지점까지는 압박 하러 나가지도 않고 내려서 있다가[2]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끈질기게 계속해서 압박이 들어간다.

물론 개인기량이 보통 상대보다 부족하기에 잘 뺏어내지는 못하고 실수를 유도하는 수준으로서 중원의 두명은 최대한 수비적으로 움직이며 볼을 탈취하는데 집중하는데 보통은 박스 안까지 들어간다.

역습시 주로 공을 뺏은 시점에서 최대한 측면의 공격수에게 원터치로 벌려주는 걸로 이루어지는데, 물론 측면만이 아니라 최 전방에 위치한 누구에게든 공 탈취 즉시 넘기는 걸 중시한다.

물론 이 때 역시도 기량이 부족해 답답할 때는 미스가 많은 편이다.

이후에는 상대 진영 곳곳으로 공격수들이 퍼지며 자리잡고 공 잡은 선수의 개인 기량으로 드리블 돌파하거나 라스트 패스까지 시도하지만 역습상황에서 아기자기하게 만드는 플레이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지공 상황은 잘 나오지 않지만, 상대가 전방부터 압박하지 않고 내려선는 경기에선 지공상황도 나오긴 하지만 이 지공시에도 경남의 공격패턴은 너무도 단순하다.
빌드업의 핵심은 좌, 우측 풀백. 우선 풀백에게 공을 배급하고 이 공을 중앙의 플레이메이킹이 되는 선수에게 연결하기는 하지만 곧바로 다시 측면으로 연결. 지공상황 80% 이상이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이 공이 누구에게 주어지느냐에 따라 패턴이 바뀌는데 보통 우측면에선 풀백인 우주성의 아무나 맞아라 크로스. 좌측에서는 네게바가 화려하게 상대를 뒤흔든 뒤 직접 돌파나 크로스, 풀백의 오버래핑에 볼을 배급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지공, 역습, 세트피스를 포함해 경남 공격의 핵심은 결국 말컹에게 공을 '맞추는' 것인데 대체로 경기장 중앙에서 버티고 있는 말컹이 있는 곳에 대충 공을 때려 그 공을 말컹이 뒤로 떨궈주고 그 틈을 2선의 선수들이 파고들며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경남의 공격루트였다.
경남의 경기를 몇 경기만 봐도 누구나 파악할 수 있는 경남의 이런 단순한 형태야 말로 지금 경남이 돌풍을 일으키며 리그의 상위권에 랭크될 수 있게 한 힘이었는데, 기량이 부족한 선수들에게 많은 역할을 요구하지 않으며 알아도 막기 힘든 공격 루트를 통해 상대를 위협하는 단순하지만 파괴력 있는 축구이다.

4. 논란 및 사건 사고

4.1. 스카우트 파동

"혼자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였다. 아무도 충고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파동이 일어났던 당시는 축구에 눈을 뜨는 시기였다. 선수들의 움직임이나 수비수들의 태클 들어오는 다리가 보였다. 그럴 때 축구 실력이 향상되는데, 그 좋은 시기에 경기를 뛰지 못했다."

파일:external/thumb.zumst.com/b047898da843490bbbf2f722165391b5.jpg

1983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김종부는 각 프로팀들에게 눈독의 대상이었다. 해외의 각종 잡지에서 김종부를 1986년 월드컵 대표팀의 핵심으로 간주했고 실제로 월드컵 대표팀에서 좋은 활약을 하면서 기량을 발전시키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3월 21일 대표팀 전지훈련으로부터 귀국한 김종부를 놓고 현대대우가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대우는 이미 김종부의 작은 형을 구단 경리 담당으로 임명하고, 과거 2년 동안 김종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가족까지 접촉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인 상황이었다. 현대도 만만치 않아서, 김종부의 모교 고려대학교에 3억원의 시설 투자를 약속했고, 고려대 측에서는 김종부에게 현대로 갈 것을 권유하게 된다.[3]

김종부는 대우로 가고 싶은 의사를 여러 번 드러냈으나 학교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자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현대는 김종부와 가계약[4]을 맺었다고 주장하며 법정 싸움으로 옮겨가겠다는 자세를 취했고 김종부가 대우와 현대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혼란을 빚자 여론 또한 악화되어 간다. 결국 체육부가 나서서 이 사건을 조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고려대가 김종부의 제명을 요구하면서 축구협회는 김종부를 월드컵 대표에서 제외하는 충격적인 일로 이어진다.

이에 축구계가 나서서 구명 운동을 벌여 김종부는 우여곡절 끝에 대표팀에 합류하여 득점도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대우와 현대는 한 치도 물러섬이 없이 김종부를 두고 계속 대결을 벌였고, 이 와중에 상처를 받은 것은 선수 뿐이었다. 이때 현대와 대우 사이의 감정의 골이 어찌나 깊었던지 정주영이 젊은 시절 일했던 쌀가게 주인의 손자로 현대그룹 일가와 가깝게 지냈던 중앙일보 기자에 의하면 당시 현대축구단 구단주를 맡고 있던 정세영이 김우중을 가리켜 김우중, 그 x같은 xx라고 쌍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VN19882005-00_01305622.jpg

월드컵 이후로도 계속된 싸움은 현대의 팀 해체 위협과 축구계 내분으로 이어졌고 결국 대우도 현대도 아닌 포항제철로 김종부는 리그 데뷔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1년간 운동을 쉰 김종부는 이전의 기량을 회복할 수 없었고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결국 1995년 그렇게 가고 싶었던 대우에서 씁쓸한 은퇴를 하게 된다. 고려대학교 시절의 전성기 기량을 보여주지 못한채 선수 생활을 은퇴해야만 했으며 이후 K리그에는 드래프트 제도가 탄생하게 되었다.

4.2. 음주운전

1992년 만취 상태에서 음주운전을 하다 경찰의 음주측정을 거부하고 도주해 공무집행방해혐의로 입건됐다. #

4.3. 조기호 대표 이사와의 불화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조기호(기업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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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 장어집 사장이었다. 2015년 6월 화성 감독 시절, FA컵 16강에서 FC 서울을 상대로 '이기면 장어 회식 한 번 하겠다'고 인터뷰하였으나 경기는 패했다.[5] 경남 감독 취임 이후에는 장어집 운영권을 누나에게 줬다고 한다. 장어집을 하게 된 것도 축구인으로서 당당해지고 부적절한 돈을 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인터뷰 다만 2024년 현재는 운영하고있지 않다.
  • 2017 시즌 중 모친상을 겪었다. 그리고 49재가 지나가기 전 10월 8일에 상대한 2위 팀 부산 아이파크와의 경기에서 2:0으로 이겼는데 이틀 후 부산 감독 조진호가 급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우승 확정을 짓고도 헹가래는 자제했으며 이 우승을 조진호에게 바친다고 얘기했다.[6]
  • 말컹의 완전 이적 당시 사비를 털어 이적료에 보탰다고 기사가 났으나 사실이 아니다. 김종부의 가까운 지인이 오해를 하고 인터뷰에 응했다.
  • 쿠니모토 타카히로의 경우, 그동안 J리그에서 숱한 사고와 문제를 일으켜 자국내에서도 저 선수는 안된다라는 부정적 평가[7]가 오곤 했으나, 2018년 경남에 입단한 후, 김종부의 지도하에 경남 FC의 핵심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러나 쿠니모토는 결국 한국에서도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치고 떠났다.
  • 닮은꼴로는 배우 이종혁이 자주 언급된다.
  • 흡연자라고 하며 축구장에서 적지 않은 축구 팬들이 흡연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1] 그리고 허베이 FC는 이후 2023년 3월에 해체되었다.[2] 최전방 공격수가 그 라인까지 내려온다.[3] 이러한 접촉을 당시 대우 사무국장 안종복이 등장해 저지한다.[4] 계약금 1억 5000만 원, 연봉 2400만 원, 연봉과 별도로 고려대 졸업 전까지 장학금 월 200만 원 지급, 프로 입단 후 팀 공헌도에 따라 추가로 상여금 지급.[5] K3리그 팀 감독은 웬만한 중고등학교 축구부 감독보다도 월급이 적다고 한다.[6] 이 49재 때문에 김종부는 조문을 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화를 보내는 걸로만 했고 헹가래를 하지 않았다.[7] 쿠니모토의 에이전트(혼다 케이스케의 친형)조차도 "저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쿠니모토가 인간이 되면 홈페이지 리스트가 기재하겠지만,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는 비난과 함께 그를 선수 리스트에 올리지 않았으나, 2018 시즌 경남에서의 활약에 그를 선수로 정식 인정했다. 담당 에이전트도 쿠니모토 같은 망나니를 어떻게 조련했는지 김종부가 대단하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