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1 21:08:13

정효주 유괴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1차 유괴
2.1. 후일담
3. 2차 유괴
3.1. 이후

1. 개요

부산의 수산업체 사장을 지낸, 대부호의 막내딸이었던 정효주()양이 납치된 유괴 사건. 1978년 발생한 사건은 대한민국 최초로 범죄 수사에 최면술사가 동원된 사건이었고, 1979년에 다시 정효주가 유괴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해당 사건은 수사 과정에서 얼굴과 이름, 부잣집 딸이라는 사실 등이 알려지면서 발생한 모방범죄다.

2. 1차 유괴

1978년 9월 15일 낮 12시에 남성국민학교 2학년이었던 정효주는 귀가 도중 한 40대 남성을 만났다. 이 남성은 정효주에게 "차 안에서 트렁크 열쇠를 갖다주렴. 그럼 집까지 태워줄게"라고 꼬드겼고, 정효주가 차 안에 올라타자 곧바로 차를 몰고 서울특별시로 올라갔다. 차 안에서 낯선 아저씨가 자신을 데리고 모르는 곳으로 가는 것을 알아챈 정효주는 차 안에서 울음을 터트렸고, 범인은 "나는 너 아버지 친구야. 너 아버지가 5,000만 원 빚을 져 부산 세관에 잡혀갔고, 아버지가 잡혀가기 전에 너를 부탁하고 가셨어"라며 다독였다.

이후 범인은 효주를 데리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협박전화를 걸었고, 효주를 시켜 돈을 부치라는 편지를 썼다. 그러다 범인은 서울에 거주 중이었던 정효주의 이모와 협상하겠다며 가족들에게 통보했는데, 유괴 33일째 되던 날에 전화를 걸 공중전화를 물색하던 중 부산시경 소속 공길용 경사에 의해 검거되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범인은 매석환(梅錫煥)이라는 이름의 남성으로, 유괴[1] 등 전과 9범을 기록했던 남자였다. 그는 서울에서 거주하면서 자신의 자가용으로 불법 택시운전을 했는데, 부산에서 내렸던 한 승객이 "남성국민학교에는 부잣집 자식들이 많이 다닌다."는 말을 했던 것을 듣고 곧바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특이한 성씨[2] 때문에 중국인으로 오해하거나 '배석환' 등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중국인이 아닌 토종 한국인이다.

매석환은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투옥되었으며, 1989년에 만기 출소했다.

2.1. 후일담

  • 매석환은 아이를 납치했지만, 그 기간 동안 정효주에게 옷을 네 벌 사 주고, 불고기 등 맛있는 음식을 사 주는 등 잘 대해 줬기 때문에 정효주는 착한 아저씨라고 믿어서 잘 따랐다. 매석환이 검거됐을 당시 정효주는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보고 있었는데, 매석환을 잡아가자 "'우리 착한 아저씨 왜 잡아가요!''라고 말했다.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볼 수도 있지만, 딱히 학대도 없었으니 범인이 했던 아버지 친구라는 말을 믿었을 수도 있다. 아동 유괴의 경우, 보통 피해 아동에게 엄청난 PTSD를 동반하는데, 해당 사건은 유괴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일어나는 동안 이런 일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저 다행일 따름.
  • 당시 차량번호를 파악하기 위해 대한민국 최초로 최면수사기법이 동원되었고, 차량 번호를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 이 사건의 범인인 매석환의 출소 이후 근황은 알려진 것이 없다.
  • 곽경택 감독의 극비수사가 이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공길용 씨가 직접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그래서 일부 영화적 연출과 정효주의 이름이 가명으로 처리된 것을 빼면, 실제 사건과 동일하게 진행된다. 공길용 경사와 김중산 도사도 실명으로 등장한다. 대체적으로 평이 좋았고, 전국적으로 25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다만, 일반적인 스릴러를 생각한 관객들은 기대와 달라 별로였다는 평도 있었다. 참고로 영화에서 범인이 2명이라는 떡밥이 나오는데, 공범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후술할 두 번째 유괴 사건에 대한 예언이다.

3. 2차 유괴

납치된 지 7개월이 지난 1979년 4월에 정효주는 등교하던 도중 교문 앞에서 또다시 납치를 당했다. 정효주는 납치 이후 가족들과 매일 등교를 같이 했는데, 딱 하루 같이 등교하지 않은 날에 납치를 당한 것이다. 이후 범인은 효주의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며 1억 5,000만 원을 요구했고, "신체를 절단해 보내겠다"는 끔찍한 협박을 동반해 충격을 주었다. 정양의 아버지는 "딸만 살려주면 뭐든 들어주겠다."고 했으며, 1차 유괴범이었던 매석환은 옥중에서 "불안감을 떨치려면 애를 풀어주고 자수해라"라는 편지를 썼다. 부산직할시에서는 전단 60만장을 배포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5일째가 되자,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유괴 사건 관련해 처음으로 특별 담화를 통해 "유괴범이 효주를 무사히 돌려주면 최대한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했고, 범인은 그날 밤 경주IC 인근에 효주를 내려놓고 도주했다.

범인은 사건 발생 1년 8개월이 지난 후에야 잡혔다. 그렇게 범인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끝나나 싶었는데, 여기서 일화가 하나 발생했다. 유괴 사건 당시 특별 담화를 발표한 대통령 박정희가 10.26 사건으로 사망했고, 대한민국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상태였다는 것. 이원석이 유괴범이긴 하지만, 어쨌든 박정희의 담화를 듣고, 효주를 해코지하지 않고 순순히 풀어줬기 때문에 딸 박근령이 '아버지의 약속(최대한 선처)을 지켜주길 바란다'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그 때문에 실제로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 이원석은 1999년 5월 21일을 기하여 출소할 때 옥중에서 모은 돈을 어린이회관 육영재단에 기증하였고#, 이후 박근령의 선처를 기억하며 무려 10여년이 지난 2008년에 또다시 육영재단을 찾아가 150만 원을 기부했다고 알려졌다.

3.1. 이후

범인은 정효주 아버지의 전 운전기사였던 이원석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는 오보로 이원석은 탈영병이었고, 다른 곳에서 트럭운전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고 정효주의 어머니가 진술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였던 정효주는 이후 이름을 바꾸고 성장하여 결혼했으며, 미국에서 거주 중이라고 한다. 훗날 한 기자가 찾아오자, 어린 시절의 일이라 기억이 안 나고 그 일을 언급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사건 당시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정말 기억하지 못할 리는 없어서 기자는 안 좋은 일이라 의도적으로 생각 안 하고 산다고 추측했다.

1998년 발생한 김해 아동 유괴 살인사건의 범인인 박진봉[3]이 다른 죄목으로 수감되었을 때, 이원석과 같은 방을 쓴 적이 있다고 한다. 이후 이원석을 찾아 유괴범의 목소리를 들려주자 박진봉이 맞다고 증언하였다고 한다.
[1] 4.19 혁명 발포 주동자였던 곽영주의 아들을 유괴해서 자신의 집에 판 땅굴에 숨겨 놨다가 잡혔다.[2] 이 성씨는 대한민국에서는 희귀한 성씨로 본관은 충주, 해주의 2가지 본관이다.[3] 검거 이후 사형이 확정되었고 수감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