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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장영철(張永哲) |
닉네임 | 백드롭의 명수 털보 |
출생일 | 1934년[1] |
사망일 | 2006년 8월 8일 (향년 73세) |
출생지 | 경상남도 부산부 (現 부산광역시) |
사망지 | 경상남도 김해시 |
신장 | 177cm |
체중 | 101kg |
시그니쳐 무브 | 드롭킥 헤드시저스 휩 백드롭 |
주요 커리어 | 한국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 1회 한국 태그팀 챔피언 1회 한국 헤비급 챔피언 2회 OSI 세계 헤비급 챔피언 1회 |
1. 개요
한국의 프로레슬러이자 한국 프로레슬링의 개척자. 한국 프로레슬링의 ‘제1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김일 귀국 이후 발생한 갈등과 사건으로 한국 프로레슬링 역사에서 비운의 인물로 평가받는다.2. 경력
2.1. 한국 프로레슬링 개척
1950년대 중반, 장영철은 부산에서 수신되던 일본 방송에서 역도산의 경기를 보고 프로레슬링을 처음 접했다. 당시 한국에는 프로레슬링을 배울 곳이 없었다. 그는 아마추어 레슬링, 권투, 유도 경험을 토대로 프로레슬링을 독학했다. 1957년, 장영철은 부산 자갈치시장 안에 있는 국제 종합체육관에서 전진주와 함께 한국 최초의 프로레슬링 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는 한국 프로레슬링의 출발점이었다.1959년 가을, 그는 서울로 올라와 서울운동장 배구장에서 프로레슬링 대회를 개최했다.[2] 하지만 이 대회는 뜨거운 햇살 아래 야외에서 열렸고, 기술 수준도 아직 초보적이어서 관중이 적었다. 이후 천규덕, 고태산 등과 함께 수년간 야외 대회를 이어갔지만, 관중은 쉽게 늘지 않았다.
2.2. 장충체육관 개관과 황금기
1963년, 장충체육관 개관은 한국 프로레슬링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다. 개관을 손꼽아 기다려온 장영철은 곧바로 개관 기념 대회를 열었다. 낮의 운동장에서 밤의 실내 체육관으로 무대를 옮긴 프로레슬링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었다. 링만 밝히는 조명 아래, 어두운 관중석의 시선이 한곳에 모이며 경기는 더욱 열띠고 흥미롭게 보이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프로레슬링을 새로운 스포츠로 각인시켰고, 첫날 3천 명이던 관중은 이틀째 5천 명, 사흘째 8천 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장영철은 일본인 프로레슬러 아라쿠마(荒熊)를 초청해서 경기를 치렀다. 덩치가 크고 링 위에서 거만했던 아라쿠마의 공격에 밀리던 장영철이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자, 관중들은 마치 일본을 이긴 것처럼 열광했다. 장영철의 승리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울분을 해소하는 카타르시스를 관중들에게 선사했고, 장영철은 단숨에 전국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 1963년 4월 21일, 장영철은 박송남을 꺾고 초대 한국 헤비급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1964년 동양방송 개국 기념으로 방영된 프로레슬링 중계는 프로레슬링 붐을 더욱 확산시켰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이 시기는 한국 프로레슬링의 제1 전성기였으며, 동시에 장영철의 황금기였다.
2.3. 김일의 귀국과 '프로레슬링은 쇼다' 사건
1965년 6월, 일본 역도산 문하에서 8년간 수련한 김일이 귀국했다. 그는 귀국 후 첫 번째 이벤트로 극동 헤비급 선수권 쟁탈전을 개최했다. 일본에서는 요시노 사토, 우에다 우마노스케, 요시무라 미치아키, 나가사와 히데유키가, 한국에서는 김일, 장영철, 천규덕, 박송남이 참가했다.이 대회에서 김일은 기존 한국 프로레슬링과는 차원이 다른 기량을 선보였고, 그 결과 장충체육관은 사흘 내내 관중으로 가득 찼다. 장영철은 8월 6일 8강전에서 우에다 우마노스케를 꺾었지만, 다음 날 4강전에서 요시노 사토에게 패했다. 장영철의 첫 패배였다. 반면, 김일은 결승에서 요시노 사토를 꺾고 우승해 초대 극동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한국 프로레슬링계의 권력과 팬들의 관심은 빠르게 장영철에서 김일에게로 옮겨갔다. 맨땅에서 한국 프로레슬링을 개척했던 장영철과 그의 문하생들은 위기감과 소외감과 허탈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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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김일파'와 '장영철파' 간의 갈등이 심해지던 1965년 11월 28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5개국 친선 세계 프로레슬링 대회'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장영철은 일본의 오쿠마 모토시와 맞붙었는데, 경기 도중 오쿠마가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과격한 카멜 클러치[3]를 사용했다. 장영철이 비명을 지르자, 링사이드에 있던 그의 제자 5~6명이 링 위로 난입해 물병과 의자로 오쿠마를 공격하며 난투극을 벌였다. 이들은 경찰에 연행됐다.
이후 경찰 조사 과정에서 장영철이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말했다는 사실이 다음 날 신문에 크게 보도됐다. 장영철은 이 발언을 부인했지만, 이 사건은 프로레슬링을 향한 대중의 열기를 식혔고, 한국 프로레슬링 침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장영철은 한동안 링을 떠났다.
2.4. 재도전과 은퇴
이 사건 이후, 장영철은 조치원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생활고에 시달렸다. 1967년 9월 17일, 공백을 깨고 복귀한 장영철은 천규덕과 한국 헤비급 타이틀 매치를 가졌다. 팬들의 큰 기대 속에서 열린 이 경기는 쇼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시멘트(실전) 매치로 진행됐다. 하지만 두 선수는 서로를 제대로 공격하지 못했고, 결국 61분 경기 중 19분 만에 천규덕이 기권하며 허무하게 끝났다.1972년 6월 7일[4], 장영철은 바비 하몬에게 승리하며 OSI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이후 사단법인 프로레슬링협회가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교류하면서, 1976년 그는 천규덕, 우기환과 함께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출전했다.
1981년 11월 14일, 제주도 공설 운동장에서 열린 신일본 프로레슬링 한국 원정 대회에서 약 9,500명의 관중 앞에서 장영철은 양진오와 팀을 이뤄 안토니오 이노키, 조지 타카노를 상대했지만 패배했다. 1980년대 후반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2.5. 김일과 화해 그리고 사망
2006년 2월, 병마와 싸우던 장영철과 김일은 수십 년 만에 만났다. 휠체어를 탄 김일이 경남 김해의 병원에 입원해 있던 장영철을 찾아간 것이다. 당시 장영철은 파킨슨병, 중풍, 그리고 약간의 치매 증상을 겪고 있었고, 김일 역시 박치기 후유증에 따른 합병증으로 15년째 투병 중이었다.두 사람은 마주 잡은 손을 놓지 않고 회한이 담긴 대화를 나눴다. 장영철은 "내가 철이 없었다"고 후회했고, 김일은 "체증이 뻥 뚫린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41년 만에 화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해 8월 9일,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3. 참고자료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세대 1967년 10월호
- 아리랑 1968년 2월호
- 아리랑 1968년 12월호
- 주간 스포츠 455호
- 사론-역도산 도장 세 까마귀, 타츠미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