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5 | ||||||||||||||||||||
| | |||||||||||||||||||
| | 양이재 | | |||||||||||||||||
| | |||||||||||||||||||
┏ | ━ | ┓ | ||||||||||||||||||
┃ | 돈덕전 | ┗ | ━ | 생양문 | ━ | ━ | ━ | ━ | ━ | ━ | ━ | ━ | ┓ | |||||||
┃ | | | 정관헌 | | | |||||||||||||||
| ┃ | 석조전 | 준명당 | 즉조당 명례궁터 | 석어당 | | | ┃ | ||||||||||||
중명전 | 석조전 서관 | 정원 | 중화전 | 덕홍전 | 함녕전 | | | | ┃ | |||||||||||
ㅣ | 광명문 | | ||||||||||||||||||
| | 중화문 | | 금천교 | 대한문 | |||||||||||||||
┗ | ━ | | ━ | ━ | ㅡ | | ━ | ━ | ━ | ━ | ━ | ━ | ┛ | |||||||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
덕수궁 인화문 관련 틀 | |||||||||||||||||||||||||||
|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
<colbgcolor=#e3ba62> 덕수궁 인화문 德壽宮 仁化門 | ||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 |
건축시기 | 1896년 (창건) / 1902년 (철훼) |
<colbgcolor=#e3ba62> 인화문 사진 |
인화문 현판[1] |
1. 개요
덕수궁(경운궁)의 정문이었던 문. 현재는 없다. 위치는 후술.2. 이름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 마찬가지로 ‘화(化)’자 돌림을 썼다.[2] '인화(仁化)' 뜻은 ‘어진(仁) 덕을 베풀어 교화(化)한다’이다.참고로, 경운궁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기 전에 없어졌기에 엄밀하게는 경운궁 인화문이 맞다.
3. 역사
원래 임진왜란 당시 임시 행궁이었던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인조 연간 이후 즉조당과 주변 별당 몇 채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궁이었다. 그러다 1896년(건양 원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이 1년 뒤 1897년(건양 2년) 궁으로 돌아갈 때 기존의 경복궁, 창덕궁이 아닌, 근처의 경운궁을 선택했다. 고종은 애초부터 환궁을 경운궁으로 하려고 했는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경운궁 공사를 실시했다.[3]이 때 인화문도 지은 듯 하다. 확실한 건립 연대는 모르나, 1896년 11월 19일 민병석을 인화문현판서사관으로 임명했다는 1896년 11월 23일 자 《대조선국 관보》를 보아 그 무렵 완공한 듯 하다.# 《일성록》과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할 때 인화문을 거쳐 수안문, 의록문을 통해 경운궁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colbgcolor=#e3ba62> 인화문 앞에 모인 사람들[4] |
3.1. 철거
그러나 지은 지 불과 6년도 채 안 지난 1902년 경에 헐렸다. 인화문 앞이 좁아서 통행이 뜸했기에 철거했단 의견이 널리 퍼져있는데 틀렸다. 왜나하면 윗 문단에서 썼던 것처럼 인화문 앞은 여러 군중행사가 열릴 정도로 공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인화문을 없앤 이유는 이렇다. 경운궁에 번듯한 정전(중화전)을 지으려했지만 기존의 궁역으로는 비좁아서 남쪽으로 확장시키려 했는데 바로 인화문이 그 권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화문을 새로 넓힌 남쪽 담장으로 옮기면 안되냐고 할 수 있지만, 그러면 언덕 바로 앞에 놓여서 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철거당했다.# 어차피 큰 길에 있어 사람들과 접촉이 쉬웠던 동문(東門) 대안문이 있어 인화문 철거로 인한 불편함은 크게 없었다. 인화문이 사라진 이후 정식 정문은 대안문으로 바뀌었다. 다만 공사 초기에 헐리진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승정원일기》 1901년 11월 2일(음력) 기사를 보면, 법전[5] 공사에 들어가는 재목들이 인화문과 돈례문[6]을 경유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colbgcolor=#e3ba62> 중화문(왼쪽), 대한문(가운데), 인화문 헐린 흔적(오른쪽). 오른쪽에 담장이 끊긴 채 빈 터로 남아있는 곳이 인화문이 있던 자리이다. |
<colbgcolor=#e3ba62> 창경궁 명정전 회랑에 걸려있는 인화문(왼쪽)과 대안문(오른쪽) 현판[7] |
[1] 사진 출처.[2] 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의 흥화문(興化門), (사라졌지만) 인경궁의 명화문(明化門) 등.[3] 하지만 몇 백 년을 버려진 곳을 임금이 거처로 삼으려니 대공사가 필요했고, 명목상으로는 중건이라 했지만 사실상 새 궁궐 하나를 새로 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4] 사진 출처 - 국가기록원.[5] 정전의 다른 말. 중화전을 가리킨다.[6] 경운궁의 원래 중문(궁궐의 정문과 정전 사이에 있는 문)으로, 인화문과 거의 동시에 헐린 듯하다. 이후 중문은 새로 지은 조원문으로 바뀌었다.[7]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