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7-08 12:32:36

이일남(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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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일남_애국지사.png
창씨명 케이하라 이치오(慶原壹男)
출생 1925년 5월 30일
전라북도 금산군 금성면 도곡리 586번지
(現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도곡리)
사망 2023년 11월 30일 (향년 98세)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로 64, 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49호
학력 전주사범학교 (심상과 5회 / 졸업)
중앙대학교 (경제학 / 학사)
상훈 대통령표창 수훈 (1986년)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1990년)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

2. 생애

1925년 5월 30일 전라북도 금산군(現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도곡리 586번지에서 태어났다.

전주사범학교[1] 심상과(5회)[2]에 진학한 후, 일본인 교장의 노골적인 민족차별교육에 분개하여 평소 민족의식이 두드러진 학우들을 모았다. 이후 1942년 6월 15일 친구 조영철(曺泳徹)의 하숙집에서 이들과 함께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이때 '우리의 얼로 우리가 나라를 세워 우리는 모두 평화롭게 산다'는 뜻으로 단체의 이름을 '우리회'로 정하는 한편, "우리는 어머니를 잊어야 한다. 대사(大事)를 일으킬 때 모정(母情)이 앞서서는 나약해지고 저해가 된다", "우리들은 함께 살고 함께 죽자", "우리들은 하나의 무명 용사가 되자", "명예도 지위 고하도 없는 평등한 처지에서 투쟁할 따름이다"라는 강령을 채택하고 혈서로 날인하였다.

1943년 12월에는 만주국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김학길·박완근(朴完根)·이동원(李東源) 등과 함께 선발대로 자원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지린성 수란현(舒蘭縣) 바오자툰(包家屯)으로 이동하였으며, 1944년 2월까지 낮에는 막노동꾼과 직공으로 일하면서 밤에 시국에 관해 몰래 이야기하거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조국 독립의 필연성 등을 토론하며 독립운동 방안을 세웠다. 또한 국내와의 연락과 조직을 확대하고 자금 조달 등 재정을 담당하는 한편, 동삼성에서 활동하는 항일 독립군과 접선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연결되지 못하여 그곳에서 일본 군국주의를 비난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4년 5월부터는 만주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일본어강습소에 강사로 취직하여 조선의 역사와 한국어의 과학성·우수성을 인식시키며 "미국·영국과의 장기전에서 일제는 반드시 패전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등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44년 12월 귀국한 후 국내에서 활동하는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는 한편, 자금 조달을 위해 전라북도 금산군 금산사방관리소(錦山砂防管理所) 인부로 취직하였다. 그러나 이내 발각되어 1945년 1월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에 체포된 후 악독한 고문을 받았고, 옥중에서 장티푸스 등의 전염병을 앓으며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다.

1945년 8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극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1945년 8월 17일 검사 측이 공소를 취하하였고, 이를 전주지방법원에서 인정하여 공소를 기각함으로써[3] 곧 출소하였다.

이후 중앙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이리농과대학[4] 경제학과 조교수, 금산군 인삼조합장 및 산림조합장, 광복회 대전충남 지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0~70년대에 민주공화당 금산지구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금산 기반의 정치인인 유진산, 길재호 의원 등과 친분을 유지하였고, 독립운동 활동을 인정받은 1980년대 이후에는 역대 금산군수, 대전시장, 충남도지사 등과 정기적으로 교류하였다.

198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훈하였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


▲ 이일남 애국지사가 독립기념관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http://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36393
▲ [3·1운동 100주년] 충남 유일 생존 애국지사 이일남 옹 인터뷰

우리회 회원들 중에서 지주 집안 출신인데다, 만주를 오가며 활동했다는 점 등으로 인해 경찰이 아닌 전주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그런데 전북경찰국 고등계에 체포된 다른 동료들은 6.25 당시 화재 등으로 관련 기록이 유실되었는데, 이일남 지사만 헌병대에 구금되어 관련 기록이 마이크로 필름으로 별도 존안되어 일본으로 이송중에, 광복이 되면서 부산에 남겨져있었다. 이 기록이 1980년대에 확인되면서 독립운동 활동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다른 회원들은 생전에 독립운동 활동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에 이일남 지사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충남도지사 등 면담시마다 동료들의 독립유공자 서훈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2019년 3월 18일 '문재인 대통령님께 드리는 진정서'를 통해 김학길, 박완근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자격 인정을 재차 요구했다. 이일남 지사는 "친구 김학길이 우리회를 만들었고, 행동강령을 제정했으며 함께 만주까지 가서 독립운동을 했다"며 "나의 말에 거짓이 있다면 1986년에 정부가 준 수훈증서를 반납하겠다"고 했다.

이후 권익위는 조사를 통해 2022년 7월 18일 '故 김학길 선생 등 11명이 활동한 우리회는 다수의 문헌과 증언으로 독립운동 활동이 확인됨에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며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재심사 할 것을 시정 권고한다'고 의결했다. 결국 김학길씨 등 우리회 회원들은 2023년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http://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86108
▲"친구 독립운동 인정해주길"… 백발 애국지사 바람 이뤄져

201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독립공원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일남 애국지사 등 30인의 족적을 설치하여 현재 전시 중에 있다.

2023년 11월 30일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 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에서 향년 98세로 사망하였다. 사후 그의 시신은 당시 국가보훈처[5]의 주도로 장례를 치른 다음, 화장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에 유해를 안장하였다. 이일남 애국지사가 안장된 12월 2일, 국립대전현충원을 포함한 전국 지방보훈관서와 국립묘지, 소속 공공기관에 조기가 게양되었다.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567
▲ 대전충남 마지막 생존 독립유공자 이일남 지사 별세, 대전현충원에 안장
[1]전주교육대학교[2] #[3] 1945년 8월 17일 전주지방법원 판결문[4]전북대학교[5]국가보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