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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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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안 더글러스 스미스
(Ian Douglas Smith)
출생지 로디지아 연방 셀루케
사망지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생몰년 1919년 4월 8일~2007년 11월 20일
국적 짐바브웨[2]
약력 로디지아 총리(1964~1979)

1. 그는 누구인가
1.1. 정치계 입문 이전1.2. 정치활동과 독재의 길1.3. 몰락
2. 평가
2.1. 후임자와의 비교2.2. 인종차별자인가 선구자인가

1.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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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1월 5일자 타임(주간지)에 나온 이안 스미스. 남로디지아의 국기와 함께 블랙 아프리카[3]의 백인이라는 텍스트가 보인다.

짐바브웨로 명명되기 전의 나라인 로디지아독재자이다. 로디지아 백인 정권을 대표하여 총리로 있다가 내외의 압력으로 흑인에게 정권을 물려주었다. 독재자 항목에 들어있는데 공정한 투표를 통해서 총리직을 유지했으므로 독재자라고 보기 힘들다고 볼 수도 있으나 그 공정한 투표가 흑인을 거의 배제하고 백인들만 한 투표라 (...) 남로디지아의 첫 아프리카 출신 총리이다.

1.1. 정치계 입문 이전

1919년 4월 8일에 남로디지아의 셀루퀘(Selukwe)에서 스코틀랜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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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인 조크 스미스(Jock Smith)와 애그너스 스미스(Agnes Smith)의 모습.

아버지 조크 스미스는 평생 광부, 목장 주인, 정육점 주인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고 지역사회에서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안 스미스 역시 정치를 시작하기 전까지 아버지처럼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며 세상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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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공군 복무 시절의 이안 스미스.

남아프리카 연방의 로즈 대학교를 다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에 복무하였다. 당시 로디지아는 영국 식민지라 영국과 함께 2차대전에 참가한 상태였지만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황이었다. [4] 그러나 이안 스미스는 애국심과 스핏파이어를 몰고 싶어서 (...) 영국 공군에 지원했다. 유럽에 파병되기를 원했으나 처음에는 중동으로 파견되었다. 스핏파이어를 처음부터 몰지는 못하고 허리케인을 몰다가 이집트에서 비행기 고장으로 추락하는데 턱과 다리와 어깨에 큰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얼굴 성형수술을 받고 재활을 거친 후에야 다시 참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상은 그를 일생 내내 계속 괴롭혔는데 얼굴 부상 때문에 그는 일그러진 웃음을 갖게 되었고 오랫동안 앉아 있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1944년 5월부터 드디어 꿈꾸던 스핏파이어를 몰고 주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한다. 그러나 전쟁에 복귀한 지 한달만에 추락했으나 살아남고 친 연합국 세력의 이탈리아 반란군에 합류하여 독일군을 세달 동안 공격했다. 독일이 자신이 있던 지역에서 패퇴하자 다른 군인 3명과 함께 알프스 산맥을 걸어서 여행해 결국 미국군에게 발견된다. 구출된 후 다시 전장에 복귀하여 서독일에 배치되어 있다가 재대하고 대학교에 복귀한다.

1.2. 정치활동과 독재의 길

그 후 1953년 로디지아-니아살랜드 연방 의회 의원을 지냈는데 당선됐을 때 그는 역사상 가장 어린 의원이었다. 1962년 백인 정당인 로디지아 전선(RF)을 결성했다. 연방을 구성했던 북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가 각각 흑인 정권의 잠비아말라위로 독립하자 그도 남로디지아의 독립을 준비했다. 로디지아 전선은 의회에서 다수를 점했고, 스미스는 1964년 남로디지아의 총리가 되어 독립을 준비했다. 그는 당시 로디지아 최초의 현지 태생 총리였다.

당시 로디지아는 흑인들도 법적으로는 투표를 할 수 있었으나 아주 극소수의 흑인들만이 투표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을 갖추고 있어서 사실상 백인들만 투표를 하는 상황이었다. 영국에서 노동당이 정권을 잡자 다수 지배하의 독립을 제시했으나, 백인 정권에서 흑인정권으로 급진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콩고에서 일어난 사회적 혼란을 우려한다는 이유로 스미스는 흑인 정권으로의 급진적인 교체를 반대하고 1965년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국제 사회에서는 백인이 극소수인 이 곳에서 일방적인 백인 정권이 일으킬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했으며,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의사회는 경제 제재를 가했다. 그러나 백인이 지배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모잠비크 [5]는 로디지아와 무역을 계속했고[6] RF는 또한 반공산당 성향을 띠고 있었는데 로디지아가 공산화하는 것을 우려했다.

스미스는 훗날 자신은 흑인들의 정권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 정권을 반대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부분은 독자가 판단해야 할 부분이다. 스미스는 이 시기에 로디지아를 만든 것은 백인이고 로디지아의 주인은 백인이며 백인이 계속해서 로디지아를 지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후 그의 정권은 1969년 흑인의 참여를 극히 제한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공화제 이행을 결의하여, 1970년 영연방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어떤 국가도 로디지아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1971년 그는 다시 영국 정부와 협상을 벌였고 점진적으로 흑인에게 정권을 주는 데에 동의한다. 스미스는 모든 흑인들에게 표를 주는 데에 반대했는데 이런 급진적인 변화가 로디지아 사회에 미칠 악영향이 매우 크다고 주장하면서 주변 국가들을 예로 들었다. 여론조사 결과 거의 대부분의 백인들은 이에 동의하였으나 대다수의 흑인들이 반대하는것으로 밝혀져 결국 이 협상도 깨지고 만다. 1976년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발언을 하게 된다. '나는 절대로 다수 지배 (흑인들의 지배)에 동의하지 않는다. 천년이 지나도'. 하지만 이 발언은 스미스의 입장을 제대로 대표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는데 저 발언 후에 그는 '우리는 로디지아가 흑인과 백인의 국가가 될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흑인과 백인이 대립하면 안 된다' 고 했기 때문.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입장은 백인의 일방적인 통치보다는 백인과 흑인이 같이 통치하는 로디지아를 꿈꾼 듯하다.

1.3. 몰락

그 후 국제 사회로부터의 고립과 흑인 세력의 저항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흑인 온건 세력과 협상, 1979년 총선을 실시하였고, 흑인 정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여 에이벌 무조레와에게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하고 그는 특임 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총선이 흑인 과격 세력이 배제된 채 시행되었으므로, 그에 따라 구성된 새 흑인 정권도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여 그 다음해 다시 총선을 실시하여, 로버트 무가베가 새로 건국된 짐바브웨의 총리가 되었다. 무가베는 총리가 된 후 스미스를 초대하여 그를 환대하였으며 그와 자주 연락하고 협치를 약속했다. 무가베를 사탄의 사도라고 비판했던 스미스는 이 만남 후에 그를 책임감있는 사람이라고 지지하고 아내에게 내가 본 것이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하기도 했다. 또한 백인들이 계속해서 짐바브웨를 떠나는 상황에서 라디오로 그에게 한번만 기회를 주자면서 이민을 말리는 연설을 했다. 하지만 백인들은 계속해서 짐바브웨를 떠났고 절반 이상이 떠났다. 그러나 무가베가 짐바브웨를 일당 일국가 체제로 바꾸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무가베를 다시 열정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 후 로디지아 전선은 짐바브웨 보수 연맹(CAZ)로 이름을 바꿨으며, 스미스는 CAZ 소속으로 1985년 총선에 다시 출마하여 계속 국회의원으로 재직했다. 그러나 1987년 무가베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년간 정치 활동을 금지당했고, 무가베가 1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면서 그는 은퇴하고 낙향하여 농장에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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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 하라레 자택에서. 81세 때의 모습이다.

무가베의 독재가 계속되는 가운데 2005년 신병 치료를 이유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주하였으며, 짐바브웨로 돌아가지 않고 케이프타운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세.

2. 평가

무가베 시절과 마찬가지로 인권탄압을 한 건 사실이지만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린다.

2.1. 후임자와의 비교

백인 정권을 세웠던 전적 때문에 비판을 받았으나 무가베의 거한 삽질과 인권탄압, 국가 경제 파탄등의 이유로 재평가받고 있다. 로디지아 시절이 현 짐바브웨보다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였기 때문. 다만 그 시대를 살았던 몇몇 흑인들의 경우 토지 재분배 등으로 무가베를 옹호하기도 한다.

2.2. 인종차별자인가 선구자인가

그에 대한 평가는 아프리카의 불편한 진실을 이해한 비젼있는 정치가와 인종차별주의자로 극단적으로 갈린다. 스미스는 그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것을 항상 부인했고 그가 싸운 것은 공산주의이지 흑인들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흑인 급진주의 세력들 (무가베의 정치세력)이 짐바브웨의 정치와 경제를 망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예측이 사실이 되면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 저자는 2007년 현재 하라레에 있는 흑인들에게 무가베나 스미스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대부분 스미스를 선택할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1] 1965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며 로디지아를 선포하는 모습이다. 남아 있는 그의 사진 중 가장 유명하다.[2] 정확하게는 로디지아[3] 사하라 이북 아프리카의 원주민인 베르베르인은 백인이라 사하라 사막을 기준으로 북쪽은 화이트 아프리카, 남쪽은 블랙 아프리카라 부른다.[4] 당시 로디지아는 영국 식민지 중 이례적으로 꽤 많은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5] 당시는 포르투칼의 식민지였으나 나중에 카네이션 혁명후에 독립하면서 흑인 정권이 들어선다.[6] 로디지아의 경제는 당시에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