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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베드로


파일:이승훈 베드로.jpg
이승훈 초상화 흉상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 소장
이름 이승훈(李承薰)
만천(蔓川)
사인 참수형
본관 평창 이씨
출생 1756년
인천부 조동면 장수동[1][2]
사망 1801년
한성부 돈의문
종교 천주교 (세례명: 베드로)
부모 부친 - 이동욱(李東旭)
모친 - 여주 이씨 이용휴(李用休, 1708 ~ 1782)의 딸
형제자매 남동생 - 이치훈(李致薰)
부인 나주 정씨(羅州 丁氏) - 정재원(丁載遠)의 딸[3]
자녀 장남 - ?
차남 - ?
3남 - 이신규(李身逵)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4]

2. 생애

파일:18692-2-17418.jpg
[5]
20대 중반이던 1780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땐 벼슬은 하지 않았다. 정파는 남인시파로 분류되었다.

1784년 조선인 최초로[6] 영세를 받아와 천주교 전파에 나섰다. 참고로 세계에서 최초로 선교사가 선교를 하러 가지 않은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직접 세례까지 받으러 온 인물이라고 한다. 세례명은 베드로. 이후 권일신, 권철우, 김범우, 이벽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1785년 역관 출신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집회를 하다가 적발되자, 천주교는 허황되며 혹세무민하다고 비판하는 글인 벽이문과 척사문을 쓰며 배교를 선언했지만 얼마 안되어 다시 신자가 된다. 참고로 김범우는 양반이 아닌 중인이었고, 배교를 거부하다 유배지에 가 병사한다.[7] 어찌보면 이승훈이 영악했던 것.

이후 조선 천주교의 지도적 인물이 된 그는 정식 사제도 아니라 당연히 교리 지식이 깊지 않았지만 현지 교회를 만들어 스스로 주교신부를 임명하고 교회 의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교회 규정에 위반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1789년 전라도 출신의 윤지충에게 베이징에 있는 주교를 만나 도움을 청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요청을 받아 윤지충은 베이징에 가서 주교 알레산드르 드 구베아에게 도움을 구했으나 구베아는 그들이 단지 세례만 줄 수 있으며 의식은 거행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1790년 음서로 금부도사와 평택현감[8] 벼슬을 지냈다. 이 때 교황청에서 제사를 금한다는 명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 끝에 천주교를 배교했다.

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의 제사 거부 사건으로 인해 체포되었지만 배교하면서 풀려났다. 다만 1787년 반촌에서 서학서를 공부했던 사건과 평택현감 재직시 향교에 배례하지 않았단 의혹으로 삭탈관직되었다.

1795년 청나라 주문모 신부의 밀입국 사건에 연루되었단 의혹으로 체포되고, 천주교 서적을 조선에 반입해서 유포했다는 죄로 유배되었지만 얼마 후 풀려났다. 이 때 또다시 천주교를 배교하면서 천주교의 교리가 허황되었음을 강조하는 유혹문을 썼다.

결국 1801년 신유박해 때 서대문 형장에서 사형당했다. 그 후 1856년 아들 이신규(李身逵)의 탄원으로 신원되었다. 참고로 아들, 손자, 증손자도 이승훈 사후에 순교하여 4대가 순교자가 되었다. 다만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로서 순교한 것인지 아니면 걍 정쟁에 휘말려서 처형된 것인지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있는 관계로 125위 시복시성 운동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3. 여담

  • 이승훈에게 천주교를 처음 알려주고 영세(세례)를 받게 한 인물로 이벽(세례명 요한, 1754~1786)이 있다. 원래 그는 권철신, 정약전 등과 함께 조선에서 자기들끼리 천주교를 공부하던 사람이었는데, 자료 부족의 한계를 느끼고 청나라에 가는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 구입과 교리 수업, 영세 등을 부탁한 것. 다만 이렇게 조선 천주교의 선구자격 인물 중 한명인 그도 말년엔 천주교를 배교했다고 알려져있는데, 그 연유에는 이런 이야기가 떠돈다. 1784년 귀국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천주교 신자가 된 이벽은, 이에 갈등하던 부친 이부만이 목 매어 자살하겠다고까지 하자 어쩔 수 없이 배교한다. 버리는 방법은 "나는 천주쟁이였으나 이젠 아니다"라는 글을 써서 붙이고 일절 기도 모임에 나가지 않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다만, 이벽도 자신의 할아버지를 통해서 처음 천주교를 알게 되었으므로 이 이야기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실제 그의 배교 여부는 학자간에도 논쟁이 있다. 하여튼 이벽은 이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33살 나이로 요절하는데,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는 설부터 부친이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하자 정말 자살해버려 죄책감 끝에 본인도 자살했다는 설[9], 집안에서 몰래 죽였다는(...) 설 등 다양한 얘기들이 떠돈다.
  • 1791년 진산 사건 당시 이승훈은 "제사는 아버지를 으로 믿는 게 아니고 조상에 대하여 고마워하는 것뿐"이라고 논리를 절충하였다. 이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조선 후기 천주교의 첫 영세자로 상징성이 높은 인물이지만, 한편으론 천주교 배교도 여러 번 한 인물이라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 지금의 인천 남동구 장수동.[2] 조선시대에 이 지역은 인천부 조동면 장수동이었으며, 그의 무덤 역시 출생지인 장수동에 있다. 정확히는 장수배수지 뒤편 거머리산 기슭에 있다. '반주골'이라고 불리는 이 묘역에는 이승훈과 그의 아들 중 두 명(장남 이택규, 3남 이신규 마티아)의 묘가 있다. 이 중 3남 이신규 마티아는 병인박해 때 체포돼 순교했다. 천주교 인천교구에서 이승훈 묘역 성역화 사업을 준비 중이다.[3]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의 누이.[4] 세례를 받은 사람.[5] 이 그림은 사실 40대 중반에 사망한 이승훈의 나이를 고려하면 좀 많이 노안이긴 하다.(...)[6]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그 이전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노예로 잡혀간 이들도 당시 일본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고니시 유키나가 같은 다이묘에 의해, 일본에 와 있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에게 영세를 받았으며, 그 이름들도 일부 전해진다.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조선인 개종자로 오타 쥬리아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일본에서 살면서 동화되었고 한국 가톨릭 교회의 성립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 가톨릭 공동체의 시작은 조선에서 세례를 베푼 이승훈 베드로 신자부터로 보는 것.[7] 그래서 조선 최초의 천주교 희생자로 여겨진다. 다만 죽임을 당한게 아니라서 엄밀히 따지면 순교자는 아니다.[8] 1789년이란 말도 있다.[9] 90년대 소설 목민심서에 이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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