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21:27:47

이반 코제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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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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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제5대 제76공군 사령관
이반 코제두브
Ива́н Кожеду́б | Ivan Kozhedub
파일:이반 니키토비치 코제두브.jpg
본명 이반 니키토비치 코제두브 (러시아어)
Ива́н Ники́тович Кожеду́б
Ivan Nikitovich Kozhedub
이반 미키토비치 코제두브 (우크라이나어)
Іван Микитович Кожедуб
Ivan Mykytovych Kozhedub
출생 1920년 6월 8일
우크라이나 SSR 체르니고프현 글루홉스키구 오브라지옙카
(現 우크라이나 수미주 쇼스트킨스키군 오브라지옙카)
사망 1991년 8월 8일 (향년 71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 연방시)
묘소 노보데비치 묘지
재임기간 제5대 제76공군 사령관
1962년 6월 ~ 196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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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아버지 니키타 일라리오노비치 코제두브
어머니 스테파니다 이바노브나 코제두브
형제자매 5남매 중 막내
배우자 베로니카 니콜라예브나 코제두브
자녀 딸 나탈리아 이바노브나 코제두브[1]
아들 니키타 이바노비치 코제두브[2]
소속 정당
[[소련 공산당|]]
복무 노농적군 공군
1940년 ~ 1946년
소비에트 연방 공군
1946년 ~ 1985년
최종 계급 항공원수 (소비에트 연방 공군)
주요 참전 독소전쟁
쿠르스크 전투
베를린 공방전
6.25 전쟁
주요 서훈 대조국공로훈장 2등급
대조국공로훈장 3등급
레닌훈장 (2회)
소비에트 연방 영웅 (3회)
적기훈장 (7회)
적성훈장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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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반기 ~ 입대2.2. 첫 전투2.3. 이후 전쟁기간2.4. 소련의 영웅이 되다2.5. 종전 후
3. 기타4. 대중 매체에서5. 진급 이력6. 이반 코제두브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군 전투기 조종사.

제2차 세계 대전 소련군의 전투기 에이스이자 소련 역사상 최고의 격추왕. 2차대전의 전설적인 저격수인 바실리 자이체프와 더불어 소련군의 제2차 세계 대전 역사에서 연방영웅을 논하는데엔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공식 격추 기록은 66기[3]로 격추 전과 60기를 넘긴 소련 파일럿이 코제두브와 레치칼로프 두 명이 전부인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소련 역사상 최고의 에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전부 독일군 전투기는 아니고 미군P-512기 격추기록이 있는데 2차 대전 당시 같은 연합군을 실수가 아닌 고의로 격추한 매우 드문 경우이기도 하다. 반미 성향이라 공격한 건 아니고 미군이 착각했는지 먼저 공격하길래 막아 보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격추시켜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군기 격추 기록은 전후 미국과 소련의 대립에 따른 선전을 위한 거짓일 확률이 높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 이 내용을 담았지만 교차검증에 따르면 이 날 미군기의 손실은 없었다.

2. 생애

파일:external/4.bp.blogspot.com/Kozedub003La7.jpg

코제두브가 탄 La-7

2.1. 초반기 ~ 입대

1920년 6월 8일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의 오브라지옙카(Ображиевка)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다섯 남매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공학도가 되길 바랬으며 그도 아버지의 바램대로 1940년에 화학공대를 졸업하였지만 하늘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하고 1940년소련 공군에 입대했다.

1941년 공군학교를 졸업하였으나 그해 바로 독일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바르바로사 작전과 함께 동부전선이 개전되자 그도 소련 공군으로 발령받았다. 하지만 공군학교에서의 준수한 성적으로 인해 그는 바로 전선으로 발령받지 못하고 후방에서 전투기 조종사들을 양성하는 직에 발령받았는데 재능을 썩히고 있기 아깝다는 생각으로 전방 배치를 원했으며 그의 희망대로 쿠르스크 전투 직전 1943년 동부전선의 Воронежский фронт(보로네시 전선)[4]에 배속되었으며 그 후에는 다른 부대에도 발령받았다.

2.2. 첫 전투

소련 최고의 에이스로 알려져 있으나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첫 공중전을 겪었을 때 그는 엄청난 바보짓을 저질렀다.

19433월, 소위로 진급한 그는 쿠르스크 주변의 비행장에서 마침내 첫번째 실전 출격을 감행했지만 그게 마지막 출격이 될 뻔했다.

1. 이륙한 지 30분 만에 코제두프는 장기와의 연락이 끊겼다.
2. 마침 독일군의 Bf 109 편대가 수천미터 아래에 있는것을 보고 부족한 경험 탓에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노련한 루프트바페.
3. 독일군 편대는 흩어졌고 곧바로 코제두프는 2대의 Bf 109로부터 추격을 받기 시작했다.
4. 코제두프는 당황해서 한참을 급강하하며 추적을 피하려고 했고 소련군의 대공포가 마구 쏘아대자 Bf 109들은 돌아갔지만 코제두프의 비행기도 날개에 구멍이 뚫려 반파된 채 기지로 돌아왔다.

2.3. 이후 전쟁기간

이후 격추 기록을 열심히 올리며 독일 공군을 말 그대로 갈아마시던 그는 결국 64기의 독일기와 2기의 미군기를 격추시켰다. 격추 기록 중 미군기는 자신을 독일 전투기로 간주하고 달려들었다가 얻어터진 거라고 한다. 그 말고도 독일기 격추 기록 중 한 대는 저공비행 중이던 Me262라고 한다. 날아가던 도중에 지면 근처에 생긴 게 이상한 놈이 하나 있어서 봤더니 생전 처음 보는 기체였고 이것이 제트 전투기이던 Me262였다. 후달리는 추중비 덕에 낮아진 가속성능이 결국 그 Me262의 파일럿을 소련 공군 소속 연합군 공군 최강자의 손에 순식간에 골로 가게 만들고 말았다.

2.4. 소련의 영웅이 되다

첫 공중전에서의 장대한 삽질을 잊지 않고 노력한 덕에 66기를 격추시킨 소련 최고의 에이스가 되었고 훈장을 무더기로 받았으며 소련의 훈장 중 가장 높은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훈장을 3번이나 받았다.

2.5. 종전 후

1950년 소장 진급으로 최연소 장성에 올랐고 소련 연방의회 의원으로 3번이나 선출되었으며 제76항공군사령관,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부사령관, 공군 전투훈련부사령관을 역임하고 항공병과 원수 자리에까지 올랐다.

6.25 전쟁에도 참전한 적이 있다. 당시 소련은 공군 전투기 부대를 비밀리에 중공군에 파견했는데 이들은 형식상 중공군 소속으로 위장하고 교신도 러시아어가 아닌 중국어로 하였다.[5] 이 공군 부대의 지휘관을 그가 역임했다. 다만 그는 직접 항공기를 타고 출격하지 않고 지상에서 지휘하였다.

1991년 8월 10일 소련 붕괴 직전에 심장마비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3. 기타

  • 부하 한 명이 충각으로 자꾸 적을 잡고 다니자[6] 나 같은 에이스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 하지 말란 뜻으로 충각으로 격추했는데 죽을 뻔해서 상관한테 혼나고 격추 수에 넣지 않아 주었다고 한다.
  • 우크라이나의 공군사관학교급 국립대학교가 그의 이름을 땄다.

4. 대중 매체에서

스틸 디비전 2에서 제9 근위기병사단의 에이스로 등장한다.

5. 진급 이력

6. 이반 코제두브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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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6b94> ▲ 142~177위
순위 이름 국적 격추 수 비고
180위 빌헬름 헤르게트 독일 73대
안톤 린트너 독일
게르하르트 미칼스키 독일
오토 슐츠 독일
184위 후쿠모토 시게오 일본 72대
빌헬름 밍크 독일
카를 하인츠 슈넬 독일
188위 한스 푸스 독일 71대
알프레트 헤크만 독일
귄터 셸 독일
192위 스기타 쇼이치[1] 일본 70대
카를-하인츠 호프만 독일
헤르만-프리드리히 요핀 독일
하인츠 랑게 독일
루디 린츠 독일
에밀 오메르트 독일
198위 루츠-빌헬름 부르크하르트 독일 69대
아르민 쾰러 독일
에른스트 바이스만 독일
오이겐-루트비히 츠바이가르트 독일
202위 쿠르트 돔바허 독일 68대
발터 회크너 독일
헤르베르트 후페르츠 독일
하인리히 융 독일
헤르베르트 카이저 독일
리하르트 레플라 독일
프리츠 로지히카이트 독일
귄터 프라이헤어 폰 말트찬 독일
한스 슈트렐로 독일
에른스트 쥐스 독일
오토 탕게 독일
213위 프리츠 딩거 독일 67대
헤르베르트 핀다이젠 독일
카를 문츠 독일
하인리히 퓔그라베 독일
카를 하멀 독일
라인홀트 호프만 독일
에르보 그라프 폰 카게네크 독일
프란츠 쉬스 독일
프란츠 슈바이거 독일
후베르트 슈트라슬 독일 하루에 15대를 격추
223위 에르빈 플라이크 독일 66대
베르너 슈트라이프 독일 야간 65대 격추
225위 베르톨트 그라스무크 독일 65대
카를 켐프 독일
만프레트 모이러 독일
228위 이반 코제두브 소련 66대 연합군 1위, 소련 1위
▼ 229~304위
}}}}}}}}} ||

[1] 단독격투 70대, 협동격추 40대로 일각에선 비공인 격추수까지 포함하면 120대에 이를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343해군항공대에 합류하여 칸노 나오시의 301비행대에서 시덴카이를 타고 활약했으며 45년 4월 1일 기지를 기습한 헬켓들에게 대응하여 이륙하던 중 피격당해 전사.



[1] 1947년생[2] 1952년생[3] 격추수는 자료마다 모두 다르다. 66기라는 곳도 있고 64기, 혹은 62기 라고 주장하는 곳도 있다. 베를린 공방전에서 추가로 2기를 격추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일단 공식적인 격추기록은 64기로 적혀 있으며 그의 격추기록 중에 베를린에서 격추하였다는 2기의 격추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후술할 미군의 P-51 2기의 격추를 포함하면 66기가 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66기로 적어 놓았다.[4] 194310월 20일 이후로 Первый украинский фронт ( 제1우크라이나전선)으로 개명했다.[5] 물론 이게 완벽하지 않아서 교신 도중에 러시아어가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도 이를 감청하고 소련군이 참전했음을 알았지만 이를 공개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려해서 알고도 모른 척 묵인했다.[6] 정말 충격적이게도 2차대전 초기에 소련 공군은 공중 충각 전술을 '타란'이라고 부르며 애용했으며 이후에도 애용한 조종사들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