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22:48:59

유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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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C0FF,#2f2f52> 유수 전투
濰水之戰
시기 기원전 204년
장소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웨이허(潍河)
원인 한신의 침공에 대한 초(楚)·제(齊)의 오월동주
교전국 한漢 초楚·제齊 연합
지휘관 한신
조참
관영
부관
용저
주란
항타[1]
항관
전횡
전광
전기
화무상
전해
유공 선
병력 병력 규모 불명 (호왈) 200,000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지휘부 붕괴
결과 용저의 사망, 초(楚)·제(齊) 연합군 괴멸.
영향 초(楚)의 전국(戰局) 주도권 상실.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제나라에 지원군을 보내는 항우3.2. 용저의 교만3.3. 유수의 대패3.4. 섬멸전
4. 결과와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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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J8wdNP7.jpg
초나라가 패배하여 용저를 잃게 되자, 항우는 몹시 두려워하며 우이(盱眙) 사람 무섭(武涉)을 시켜서 제왕(齊王) 한신에게 가게 하여,
무섭으로 하여금 한신을 회유토록 하였다.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중국 초한쟁패기 시대 벌어진 전한(漢)의 군대와 초나라(楚), 제나라(齊) 연합군의 대결. 한나라 군대라고 하였지만 사실상, 이 싸움은 한신(韓信)의 독자적인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전투까지 이른 계기 역시 한신의 독자적인 판단이었기 때문. 정작, 한나라의 지도자인 유방(劉邦)은 그 이전에 역이기(酈食其)의 제안을 바탕으로 제나라를 회유하려고 했었기에 이러한 싸움을 반길 이유가 없었다. 엄밀히 말해 이 싸움은 한신이 주도적으로 결정한 싸움이었으며, 사실상 한군에서 한신이 별도의 세력으로 자리매김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만, 한신 자신이 그러한 정치 상황을 감지하고 있었는지는 사실 알 수 없다. 이러한 한신의 독립적인 정치 상황이야말로 괴철이 바라고 만들어낸 그림이었지만, 정작 상황을 유도하는데 성공한 괴철은 한신을 설득하는데는 실패하고 만다. 한신이 괴철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정치적 이유가 아닌 개인적 은혜를 근거로 든 것은, 괴철이 한신을 설득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이후, 제나라는 항우에게 반감을 품고 계속해서 초나라를 물고 늘어지며 괴롭혔다. 초나라 역시 계속해서 제나라를 떨어뜨리려고 공격했으나, 제나라가 계속하여 끈질기게 맞서 싸웠기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철천지 원수처럼 지내던 제나라와 초나라였는데, 그러한 양국이 손을 잡고 한나라 군대와 교전을 벌였으니 한신의 위용에 양국이 모두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많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원정을 치러야 하는 한신 역시 그 위험부담이 결코 작지 않았다. 게다가 제나라 원정은 사실상 한신이 독자적으로 실행한 일이었으므로 한왕 유방에게서 지원을 바랄 수도 없었다.

한신은 이 전투에서 완벽하게 초-제 연합군을 압살하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제나라를 완전히 손에 넣었고, 초나라의 수만 군사를 전멸시켜 초나라에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초나라의 목숨줄이 거의 끊겼다고 봐도 무리가 없으니, 사실상 초한전쟁의 향방을 결정해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대단히 중요한 전투이다.

2. 배경

진(秦) 말 대혼란 시기에 가장 두각을 드러낸 군웅 항우(項羽)는 홍문연(鴻門宴)에서 라이벌 유방(劉邦)을 굴복시킨 후,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을 시행하여 천하를 좌지우지 하는 패자가 되었다. 하지만 유방은 포기하지 않고 소하(蕭何), 한신(韓信)의 도움 등을 바탕으로 역습을 감행하였다. 이는 상당한 성공을 가져왔지만 이내 팽성대전의 대패로 유방은 위기에 빠졌고, 경색 전투(京索之戰)의 승리로 간신히 위기를 돌파한 뒤 한신을 파견하여 안읍 전투에서 위표(魏豹)를 무찌르는데 성공한다. 이후 한신은 북벌을 감행하여 조나라(趙)를 정형 전투에서 격파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사이 유방은 형양 · 성고 전역에서 항우를 성공적으로 붙잡아 두고 있었는데, 유방이 항우를 붙잡아두는 동안 한신은 조나라를 평정하며 세력을 다질 수 있었고, 이좌거(李左車)의 도움으로 연나라(燕) 왕 장도(臧荼)를 항복시키는데 성공했다. 다만 유방은 도중 형양과 성고가 모조리 함락되는 최대의 위기를 맞고 한신의 진영으로 도주, 잠을 자고 있던 한신의 군권을 탈취하여 전력을 회복했다. 이후 유방은 또다시 항우와의 전선으로 이동했고, 그 대신 한신에게 명령하여 동쪽의 제나라를 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역이기(酈食其)는 유방에게 계책을 올리며 자신의 설득으로 제나라를 한군에 끌어올 수 있다는 발언을 했고, 실제 제나라 왕 전광(田廣)을 만나 설득하여 이를 성공시킨다. 이 시점에서 한신이 제나라를 공격해야 할 이유는 사라져버렸고, 한신 역시 당초에는 공격을 중지하려고 했다. 헌데 한신의 책사로서 천하삼분지계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던 괴철(蒯徹)은 한신에게 감언이설을 늘어놓아 공격을 중단하지 말도록 했고,[2]넘어간 한신은 그대로 제나라를 급습, 이미 경계를 풀고 있던 제나라는 처절하게 당하고 만다.

제나라는 삽시간에 수도 임치(臨菑)가 함락될 지경에 처해졌고, 분노한 제왕 전광은 자신이 속았다고 생각하며 역이기를 팽형(烹刑)으로 삶아 죽이고 고밀(高密)로 달아났다. 나라가 초토화된 제나라는 임시 재상 전광(田光)[3]이 성양(城陽)으로 달아났고, 전횡(田橫)은 박(博)으로 도주했으며, 장군 전기(田旣)는 교동(膠東)에 진을 쳤다.

이 시점에서 제나라는 나라를 잃은 셈이지만 단독으로는 한신을 물리치기 힘들었기에, 전광은 초유의 결정을 내린다. 숙적 중의 숙적인 항우에게 손을 내민 것.

3. 전개

3.1. 제나라에 지원군을 보내는 항우

본래 초나라와 제나라는 초한쟁패기 동안 친해질래야 친해질수없는 극악한 사이였다.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체제를 가장 먼저 뒤흔들어 박살내버린 사람은 다름아닌 제나라의 전영(田榮)이었으며, 항우는 전영을 격파한 후 제나라에서 대학살을 자행하며 수많은 지역을 초토화 했다. 당연히, 일반적으로라면 제나라와 초나라는 손을 잡을 수가 없었으며, 역이기는 바로 그러한 점을 통해 제나라를 설득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철에 꼬드김에 넘어간 한신의 공격으로 제나라는 박살이 나버렸는데, 한신의 공격 자체는 유방의 의지와 전혀 상관이 없었지만 어찌되었건 한신은 한나라에 소속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한나라와 적대관계가 되어버린 전광으로서는 살기 위해서는 한과 대치하고 있는 세력을 끌어올 수 밖에 없었고, 천하에 그런 세력은 바로 초나라의 항우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원한을 앞세웠을 항우였지만, 이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면서 느끼는 초조함은 항우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전광의 손을 기꺼이 잡았다. 범증의 죽음 이후 항우는 점점 더 큰 압박감에 시달렸고, 이에 따라 그의 태도도 크게 변화했다. 기존의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다른 제후들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13세 어린아이의 말을 듣고 학살을 중단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동안 무시하고 홀대했던 한신을 무섭을 통해 회유하려 하는 등,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팽월(彭越)의 지리한 견제 때문에 항우는 형양 · 성고 전역광무 대치에서 보급 곤란으로 고전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신이 북방을 평정하는 것은 심히 우려스러웠는데, 여기에 더해 제나라와 조나라를 무너뜨린 한신이 이후 초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소문 역시 들려왔던 것이다.

유방을 상대로 발이 묶인 항우는 자신 대신 제나라에 보낼 지원군의 사령관으로 용저(龍且)를 결정했다. 용저는 진나라를 무너뜨린 거록대전 등에서 눈부신 무훈을 세운 경포(黥布)를 격파한 적도 있는 등, 항우의 수하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역전의 무장이었다. 이 용저에게 딸려보낸 항우의 군대는 호왈 20만. 호왈이라고 하니 실제로 20만은 아니겠지만, 20만을 일컫을 정도면 적지 않은 병력이었을 것은 틀림없다.

3.2. 용저의 교만

이렇게 적지 않은 병력을 손에 쥔 용저는 여기에 더해, 제왕 전광이 패전에서 수습한 남은 제나라의 병력과 합쳐 더 큰 군세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군대가 많으니 용저의 자신감도 상당히 커지게 되었다. 용저와 전광이 군대를 모아놓고 아직 한신과 싸우기 이전, 막빈에 있던 부관 주란이 계책을 내었다.
"한나라 군대는 멀리서 싸우러 왔으니,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울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예봉을 막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제나라와 초 나라는 자기 나라 땅에서 싸우기 때문에 병사들이 패해 흩어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니, 성벽을 높이 해 지키면서 제나라 왕으로 하여금 그가 신임하는 신하를 보내 제나라가 이미 잃어버린 성을 이쪽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함락된 성의 군사들이 자기 왕이 건재하다는 것을 듣고 초 나라가 구원하러 왔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한나라를 배반할 것입니다. 한나라 군대는 2천리나 떨어진 타국에 와 있습니다. 제나라 성들이 모두 배반하면 그 정세로 보아 식량도 얻을 수 없을 테니,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원정군인 한신군의 약점을 잘 이용해서 수비에 전념을 하고 있으면 적은 지치기 마련이고, 그 사이에 제나라 왕 전광의 이름을 이용해 어필을 하면 항복한 사람들도 다시 제나라에 돌아올것이고 전광이 살아있다는걸 알면 제나라 각지에서 유격군이 발생하여 한군을 괴롭힌다는 계책이다. 그렇게 된다면 보급도 어려워지니 싸울 방법이 없어지는 한신으로서는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미 제나라는 비슷한 방식으로 성양(城陽)의 싸움에서 전영이 항우에게 대패하고도 초나라를 괴롭힌 전력이 있었다. 중일전쟁 당시의 일본군도 그랬지만 원정군의 입장에서 저런 구도는 정말 싫을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하지만 용저는 만용을 부리며 이를 거부했다.
"내가 평소부터 한신의 사람됨을 알고 있는데, 그는 상대하기가 쉽다. 게다가 제나라를 구원한다면서 싸우지도 않고 한나라 군대를 항복시킨다면, 내게 무슨 공이 있겠느냐? 지금 싸워서 승리하면 제나라의 절반은 내 것이 된다. 어찌 이대로 그만두겠는가?"

한신은 능력없는 찌질이에 불과하니 문제 될 것도 없고, 네 말대로 하면 난 공을 세울 수 없지만 싸워서 이기는건 간단하고 지금 공을 세우면 항우가 자신에게 제나라의 반을 줄테니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한신은 초나라군에서 낭중(郎中)으로 있으면서 여러차례 항우에게 계책을 올린 적이 있으니 용저도 한신과 면식은 있었을 것이며, 한신이 남의 가랑이 사이를 걸어갔던 찌찔한 과거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서의 한신전에서는 용저의 저 말이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나는 평생 한신의 사람됨을 알아 왔는데, 쉬운 상대일 뿐이다. 빨래하는 아낙에게 밥 얻어 먹었으니 자신의 계책을 취하는 바가 없고, 가랭이 밑을 지나가는 치욕을 받았으니 사람의 용기라곤 겸한 것이 없으니, 족히 두려워 할 바가 아니다. 또 제를 구하고 그를 항복시킨다면 내게 무슨 공이 있는가? 지금 싸워서 그를 이긴다면 제의 반을 얻을 수 있는데, 어찌 그만두겠는가?"

용저 입장에서 알고 있는 한신은 그저 찌질이에 불과했는데, 그런 놈이 이제와서 대장군이라 칭하고 있으니 웃기지도 않았던 것이다. 또한 항우의 인색한 분봉 조치 때문에 용저는 여전히 봉토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심지어 진평의 반간계 때문에 항우의 측근 위치에서 멀어진[4] 용저로서는 욕심이 앞섰을 것이다. 즉 싸우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있으나 자신의 군공을 부풀리고 싶은 욕심에 휩싸였던 것이다.

사실 이와 비슷한 선례가 이미 초한전쟁 때 있었다. 바로 정형 전투이다. 정형 전투 직전 이좌거진여에게 주란의 주장과 비슷하게 수비를 굳건히 하며 한신을 지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진여는 이를 무시하고 단기 결전이란 정공법을 택했다. 그나마 진여의 경우엔 용저와는 달리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라도 있었다. 당시 진여의 조군은 수적 우위가 명백했고, 이미 조나라가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더 지구전을 펼치면 이기더라도 이득이 없었으므로 수적 우위를 살려서 속전속결로 한신을 조나라에서 물리치는게 최선의 방법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용저는 이런 것도 없이 단순한 교만과 제나라의 반을 얻을 수 있다는 욕심이 앞선 것에 불과했다.

3.3. 유수의 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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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전을 벌이자는 말을 이렇게 무시한 용저는 자신만만하게 유수(濰水)로 나아가, 강을 사이에 두고 한신과 대치하여 진을 쳤다.

이렇게 용저가 느긋한 태도를 보이고 있을때 한신은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밤 중에 수하들을 시켜 밤 중에 모래를 가득 넣은 자루를 만여 개나 만들었고, 이를 유수의 상류에 던져 넣었다. 고대의 기술로 강을 막는 시설을 단기간에 만들기는 어려워서 물이 얕은 상류에 모래 주머니를 던진 것은 물세를 조금 줄이는 용도였고, 딱히 댐처럼 물을 완전히 틀어막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용저와 한신이 서로 강을 사이에 두고도 대치하여 싸우려고 했던 점을 볼때 당시 유수는 그렇게까지 큰 강이 아니거나 혹은 강이 커지는 부분에서 싸웠던 것은 아니지 않나 추정된다.[5]

이렇게 어느 정도 물세를 막아놓은 한신은 한나라 군을 이끌고 걸어갈 수 있을 만큼 물세가 그리 세지 않은 강을 건너 용저에게 싸움을 걸었다. 한참 동안 양군은 싸움을 벌였으나, 곧이어 한신은 일부러 지는 체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대장이 싸움을 포기하고 달아나는 판국이니 다른 한나라 병사들도 정신없이 도주했고, 그 혼란상을 지켜본 용저는 자기가 말한대로 일이 술술 풀리자 기뻐하며 소리쳤다.

본래 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가 발생하는 시기는 한참 격전이 벌어질 때가 아닌 추격전이니 만큼, 용저 역시 이 기회를 살려 한신과 한군을 모조리 박살내기 위하여 바로 군을 움직여 정신없이 공격해들어왔다.

급하게 추격한 만큼 공격을 하는 초나라군도 정신 없었을 텐데, 이후에 나오는 언급 등으로 보면 당시 초나라군은 성급히 공격하느라 규율도 대열도 엉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황급하게 초군이 유수를 건너가기 시작할때, 한신은 급히 사람을 시켜 상류에서 물을 막아놓은 자루들을 모조리 터져버리게 하였다. 갑자기 상류에서 물이 쏟아지자, 초나라 군은 혼란에 빠졌다. 수천, 수만의 병력이 정신없이 강에서 얽히고 섥힌 만큼 딱히 상류에서 쏟아지는 물이 쓰나미 수준이 아니더라도 혼란스러웠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아비규환의 혼란 끝에 용저가 이끈 일부 병력이 간신히 뭍에 올라오기는 했지만 그 숫자는 태반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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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랄빵 상태로 강에서 어정거리는 병력들은 제쳐놓고라도 아직 유수 반대편에서는 강으로 들어서지도 않은 병력도 있었을 정도이니, 이 시점에서 초나라군은 '유수 반대편에 간신히 올라선 부대', '강에서 휘적거리는 부대', '아직 강에 들어서지도 않은 대열 후방의 병력들' 등으로 완전히 분열되어 버렸다. 손자병법에서 '적군이 물을 건널 때는 반쯤 도하했을 때 공격하라'(행군편)라는 내용이 있는데 정확히 그 꼴이 된 것이다.

바로 그 절묘한 시기에 한신은 군대를 이끌고 급히 공격해왔다. 용저는 유수를 건넌 병사들을 이끌고 저항을 해보려고 했지만 혼란에 빠진데다 전부 건너오지도 못한 몇몇 병력을 가지고 미리 준비 했던 한신의 공격을 이기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용저는 패배했고, 용저 자신도 참살당하고 만다. 용저를 죽인 주체에 대해 조상국세가에서는 조참(曹參)이 상가밀(上假密)에서 용저를 참하고 그의 부장 주란(周蘭)을 생포했다고 하는데, 관영(灌嬰)의 기록에서는 고밀현(高密縣)에서 관영이 용저와 유공(留公) 선(旋)을 공격해서 관영의 부하가 용저를 죽이고 우사마와 연윤 각각 한 사람씩과 누번의 장군 10명을 생포했으며, 주란을 포로로 잡은 것도 관영이라고 한다.

일단 항우본기나 고조본기의 기록에서는 용저를 죽인 사람이 관영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관영은 경색 전투 무렵에 기병대 대장으로 임명되었고, 당시의 싸움에서도 기장(騎將)으로 나왔다는 언급이 있으니 유수 전투 당시에도 기병을 이끌고 동분서주했을테고, 우왕자왕하고 도망치는 병력을 섬멸하는데 있어서는 기병대가 최고이다. 승패가 결정되는 시점이라고 해도 이 점은 꽤 크다. 말년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기병전력의 부재로 몇차례 승리를 거두어도 결국 적을 섬멸시키지 못하여 싸움을 끝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관영이 포로를 많이 잡아 공을 세웠다 해도 이상할 것 없을 것이다.

3.4. 섬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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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총대장 용저가 참살되자 나머지 병력은 더 볼 것이 없었고, 아직 유수를 건너지 않은 건너편의 병사들은 모두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도망쳤다. 용저와 함께 유수 전투에 참여했던 제왕 전광 역시 마찬가지로 달아났고, 이제 반대로 한군이 추격 섬멸전을 벌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한신은 군세를 동원하여 적을 추격했다.

이 설거지 역할에서는 조참이 대활약했다. 이미 남은 군세가 초토화된 제나라는 한군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고, 조참은 추풍낙엽으로 쓰러지는 제나라 잔당들을 공격하여 단번에 제나라 70여 현을 평정했다. 성양까지 진군한 한신과 조참 등은 도망친 전광을 사로잡았으며[6] 그 외에 재상인 전광(田光), 대리 승상인 수상(守相) 허장(許章) 등도 포로로 잡혔다.

조참은 교동으로 이동해서 그곳에 주둔해 있던 장군 전기를 격파했는데, 조상국세가에서는 전기가 포로가 되었다고 하며 전담열전에서는 전기가 죽었다고 한다. 이렇게 초나라의 장군 용저와 제나라 왕 전광이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됨에 따라 제나라 지역은 평정되었다.

다만 원체 끈질긴 지역이 제나라였던만큼 그렇게 쉽게 평정되진 않았다. 이런 난리 와중에도 전횡은 다시 자립하여 제나라 왕의 자리를 잇고 관영과 교전하기도 했으며, 관영에게 영(嬴) 땅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팽월에게 도망하여 의지했다. 관영은 전횡을 물리친 이후에 천승(千乘)에서 장군 전흡(田吸)을 물리쳤다. 이후에 한신은 유방에게 요구하여 제나라 왕이 되었지만, 항우가 최종적으로 끝장나는 해하 전투 무렵에도 조참 이하 상당수 한군이 해하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제나라의 항복하지 않은 지역을 평정하고 있었다. 제나라 땅의 혼란이 완전히 진정된 건 유방이 전횡을 왕으로 되돌리려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전횡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뒤이어 한신이 회음후로까지 떨어진 후의 일이었다. 한신이 두번째로 강등당했을 때 전긍이라는 인물이 축하를 올리며 제나라를 완전히 유씨에게 예속시켜주기를 청하는데 성씨를 보면 전씨 일가의 일원이었던 듯 하니, 더이상 제나라가 유방에게 원한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대세는 유수의 패배로 끝장이 나버려 회복이 될 가능성은 없어졌지만, 항우를 그토록 괴롭혔던 제나라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악착같은 면모를 보여주었다.

4. 결과와 영향

유수 전투는 초한쟁패에 있어 가장 극적인 전투는 아닐지라도, 가장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전투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 싸움의 결과로 초한전쟁사실상 승패가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를 넘기며 벌어진 항우와 유방의 대치에서 항우는 형양과 성고 너머로 진격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는데, 반면에 한군은 그 사이에 하북을 완전히 평정하여 세력의 균형비가 정반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항우는 혼자서 중국 전역과 싸워야 하는 상태가 되었으므로, 눈 앞의 유방 하나도 밀어내지 못하던 상황에서 항우가 전세를 뒤바꿀 수 있을 방법은 전혀 없었다. 해하 전투는 그런 항우가 붙잡고 있던 썩은 줄을 끊어버렸을 뿐이다.

반면에 용저가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 항우는 최후의 반전을 기대해볼만 했다. 만일 이 싸움에서 용저가 적을 완전히 섬멸시키고 한신 이하 대장들까지 참살하는데 성공했다면 그 즉시 하북을 역으로 평정하는 일도 가능했고, 적을 어느정도 밀어내는 수준만 가능했어도 제나라 지역을 손에 넣고 형양이나 성고의 대치나 광무 대치 같은 치열한 대치를 북쪽에서도 이룰 수 있었으니, 그렇게 되었으면 승패는 좀 더 뒷일로 미루어졌을 터이다. 굳이 섬멸까지는 아니여도 성을 굳게 지키고 제나라 왕이라는 위명을 통해 항복한 제나라 성을 다시 귀순시켰다면 원정군인 이상 필연적으로 장기전은 불리하게 작용할 수 밖에 없었고 이렇게되면 한신의 활동이 매우 힘들어져 사실상 북벌 실패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제나라에 20만+제나라군이 버티고 있었으므로 제나라 인근에서 초나라를 괴롭히던 팽월의 후방 게릴라 활동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초나라가 제나라를 영향권 아래 두면 얻을 수 있는 이점으로는 후방의 팽월에 대한 부분이 있다. 항우에게 최대의 난관은 양나라 지역에서 계속해서 유격전을 벌이는 팽월의 존재인데, 만일 제나라가 초나라에 복속된다면 이 후방의 견제를 막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

그러나 항우의 속좁은 논공행상에 공에 눈이 먼 용저가 순식간에 대장군이 된 한신을 얕보고 방심했기 때문에 결과는 초나라에게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로 작용하고 말았다. 이후 항우는 후방에서 팽월의 유격전뿐만 아니라 한신의 직접적인 수준의 군사적 공격까지 고려해야 했다. 한신이 이상한 생각을 한다고 이쪽은 해하전투 직전에 관영 하나만 내려왔을 뿐이었지만(...).

유방의 한군 본대의 입장에서 보면 이득이라고 보기어려운 측면이 강한데 단번에 제나라 수도를 평정하고 용저를 참살한 것을 통해 초한쟁패를 승리로 결정지은 전투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이는 승리로 끝났으니 망정이지 굳이 이런 위험한 전투 상황을 초래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부분이 있다. 초나라를 후방에서 옥죄어버리는 것은 제나라를 평정하지 않고 손만 잡아도 가능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유방과 역이기는 이를 거의 성사 직전까지 이루어내었다. 그러나 괴철의 말을 들은 한신의 역하 공격은 최악의 앙숙인 제나라와 초나라가 손을 잡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으며, 이로 인하여 굳이 일어날 필요가 없었던 유수 전투의 전개까지 치닿아야만 했다. 한신이 승리를 거두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패배했다면 기껏 만들어진 유리한 상황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었던 것. 거기에 후술할 제나라 저항세력의 항전으로 조참을 비롯한 상당수의 병력을 초한전쟁이 끝날때까지 제나라에 박아둬야 했던 시점에서[7] 유수전투는 크게 남는 장사라고 보기 힘들었다. 다만 초나라 본국에 소속되었던 용저의 별동대까지 함께 박살냈기 때문에 이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병력은 광무에서 대치 중에 여유가 없었던 항우가 겨우 짜내고 짜내서 준 병력이었다.

한신의 공격으로 인한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제나라 전씨들과 역이기인 셈이다. 당초에 유방에게 협력할 생각이 있던 전씨들은 난데없는 기습에 나라가 초토화되었으며, 원수 초나라와 손을 잡으면서까지 대항했지만 결국 패배하여 나라는 멸망하고 종족은 흩어져버렸다. 사마천은 전담열전에서 이에 대한 평론을 하며, 한신으로 하여금 유방에게 거스르게 하여 교만해지게 한 부분과 제나라 전씨의 비참한 말로를 초래한 괴철의 계략이 너무 심하다고 한탄했다. 역이기는 정말 억울하게도 전씨들에게 배신자 취급을 받아 삶겨 죽었다.

한편 괴철의 이 제안은 한신을 유방에게서 독립시켜 천하삼분지계의 밑그림을 그리는데 있었을 터였고, 만일 그런 의도라면 확실히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한신은 공을 조금 더 탐하는 정도라면 몰라도 독립할 의사는 없었으니... 결국 이 전투로 한신은 유방의 눈 밖에 제대로 나고 만다. 유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자신은 눈앞의 항우와 대치하느라 진땀 빼고 있는데, 원정 총사령관은 자기 명령을 어기고 항복시키러 간 아군 참모를 죽게 만들고 필요도 없는 전투를 치르더니, 반란을 핑계로[8] 원군은 차일피일 미루면서[9] 심지어 "날 왕으로 봉해주지 않으면 어찌될지 모르겠다."며 대놓고 유방을 협박하기까지 한 것이다. 이쯤 되면 유방 아니라 어떤 군주라도 이놈이 딴 속셈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서, 유방이 "한신 이놈 자기가 제나라 땅 먹으려고 일부러 싸움 건 거 아냐? 거길 독립기반으로 삼아서 발이 묶여 있는 내 뒤통수를 치려고?"라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한신은 이좌거의 전략을 구실로 제나라와의 싸움을 미루면서 원군도 보내지 않았는데, 유수 전투에서 한신이 승리했다 해도 한군 쪽에서 보면 그럼 그동안 한 말은 대체 뭐였냐? 싸움으론 제나라 못 이기겠다며?라고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오직 자신의 군공을 위해 아군 살해를 저질렀던 것이었으므로, 전후 분봉에서 대장군인 한신을 제치고 조참이 장수들에 의해 서열 1위로 추대되거나[10] 내내 견제당하는 한신의 곤궁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누구 한사람도 감싸주지 않는 등 한신은 이 일로 한나라 진영 전체에서 인망을 상실하고 만다. 즉 유수 전투의 시작부터 뒤처리까지, 한신은 의심을 살 만한 짓만 골라서 했다. 훗날의 토사구팽이 일반적인 이미지처럼 황제 자리 먹은 유방이 의심병이 도져서 충직한 신하들을 닥치는대로 숙청한 사건은 아니라는 것. 한신이 유방에게 충성을 다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처세에 있어서 그는 빵점이었다.

[1] 항우의 조카라고 한다.[2] 괴철이 이르기를, 첫째 장수(한신)가 전시 상황에서는 임금의 명이라도 듣지 않을 수 있고, 둘째 유방은 한신에게 '사신으로 가는 역이기에게 길을 열어줄 것'만을 명령했지 '역이기가 제나라 왕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할 시 공격을 멈출 것'을 명령하지 않았으므로 공격을 중단하지 않는 것이 정당하다 주장했다. 또한, '여기 있는 우리 장수들과 수만 병사들이 각고의 노력과 희생 끝에 겨우 조나라 50여 개의 성을 정복했는데, 역이기는 자신의 세치 혀로 제나라 70여 개의 성을 정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며 장차의 논공행상 때 우리 군사의 몫은 없을 것이라며 한신을 비롯한 장수들을 분개시켰다.[3] 제왕 전광과는 한자가 다르다.[4] 범증이 걸해골의 고사를 만들어내며 항우의 곁을 떠났을 때다. 항우는 반간계에 제대로 걸려들어서 능력있고 공을 세운 장수들을 죄다 밀어내고 중요한 자리마다 자기 친인척들을 앉혀놓았다. 이때 용저 역시 마찬가지로 항우로부터 견제를 받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5] 안읍전투 당시 한군은 목앵부라는 것을 만들어 강을 건너기도 했으나 이때는 그런 특별한 도하 시도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리 강이 크진 않았던 것 같다.[6] 조상국세가에서는 조참이 전광을 잡았다고 나오는데, 자치통감 등의 다른 기록에서는 또 관영이 전광을 사로잡았다는 둥 혼란스러운 면모를 보여준다.[7] 결국 조참은 초한전쟁 마지막 전투인 해하전투까지 참전못하고 항우가 죽은뒤에도 제법 오랫동안 제나라에서 싸워야했다.[8] 이 반란부터가 한신 때문이라는 점은 덤.[9] 짧게 넘어가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기간으로는 무려 2년이 다 되도록 이러고 있었다.[10] 소하를 대우해주려는 유방의 뜻에 밀리긴 했지만 그래도 바로 아래인 2위로 책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