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이비 종교
용화교(龍華敎)는 1960년대에 여자신도 강간과 금품갈취 등으로 문제를 야기한 사이비 종교다. 교명은 용화세계(龍華世界)라는 불교용어에서 따왔다. 불교에서는 미륵이 언젠가 강림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설법하여 용화세계를 연다고 말한다.용화교는 서백일이라는 범죄자가 광복 즈음에 창시하였다.
현재는 대한불교 용화종으로 활동중이다.
1.1. 교주 서백일
徐白日
1888년(?) 1893년(?) ~ 1966년
초명은 서한춘(徐漢春), 일제강점기 시절 창씨명은 가네아마 겐보(金天源法), 일명 서서죽(徐書竹)·서청죽(徐靑竹)#. 법호는 진공(眞空)·현무(玄武)#.
이 인물은 사이비 종교의 교주인 점 때문인지 출생년도 및 출생지에 대해서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이 없이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선 비교적 공식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인물사전#에서는 1888년생으로 기재하였다. 1962년 3월 13일 제2회 공판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동년 10월 3일 고혈압으로 보석받은 동아일보 기사#에서 그를 75세로 소개하였고, 1966년 3월 28일 소윤하에 의해 피살된 사실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경향신문 기사#·중앙일보 기사#에서 그를 79세로 소개하여 1888년생 설을 뒷받침한다.
허나, 1962년 2월 2일 그가 처음 구속되었을 당시 일제 때 백백교 간부였을 수도 있다는 정보를 다룬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그를 74세로 소개하여 1889년생으로 보이게끔 했고, 동년 2월 1일 같은 시기 구속 당시의 경향신문 기사#에서는 그를 72세로 소개하여 1891년생으로 보이게 하는 등 같은 해 기사에서도 서로 말이 다르다.
그의 나이를 다룬 가장 오래된 기록인 1938년 10월 7일 서한춘의 이름으로 부산증산교 사건의 주범으로 검거된 사실을 다룬 매일신보 기사#에서는 그를 46세로 소개하였고, 전술한 사건으로 1942년 6월 1일 징역 3년 형을 언도한 판결문##2#3에서는 그를 당시 나이 50세로 소개하므로 그가 일제강점기만 해도 출생년도가 1893년이라고 공식 문서에 기재한 모양이다.
또한 용화교 간부들이 서백일이 지었다고 주장하는 만법전(萬法典)에 수록된 기초가(基礎歌)에 의하면, 서한춘은 광양 칠성리(현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칠성리)의 서씨(徐氏) 배를 빌려 계사정월초육일(癸巳正月初六日) 신시(申時)에 태어났다고 하였다.# 고종 30년(계사) 음력 1월 6일생이란 소리인데, 양력으로 환산하면 1893년 2월 22일이다. 이 또한 1893년생 설을 뒷받침한다.
또 1962년 10월 26일 서백일의 형기가 징역 1년 6개월로 확정될 당시 동아일보 기사#와 경향신문 기사#는 그를 69세로 소개하여 1894년생으로 생각될 수 있게끔 하기도 했다.
한편, 출생지에 대해서도 자료마다 말이 다르다. 첫 번째, 1934년 1월 27일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서한춘을 전라남도 구례군 간문면(현 문척면) 금정리에 사는 한 농부의 자식으로 소개하였다. 1942년 6월 1일 부산증산교 사건에 대해 징역 3년 형을 언도한 판결문##2#3에서도 그의 본적을 전남 구례군 간문면 금정리 423번지라고 기재하였다.
두 번째, 1962년 2월 1일 첫 구속 당시의 경향신문 기사#에서 서백일의 본적이 경상남도 하동군이라고 하였다. 하동군은 후술할 1938년 일련교(日蓮敎) 하동지부를 두어 증산교 지하활동을 전개한 곳으로, 이전에 미륵교 사건으로 검거된 사실을 숨기고 증산교 지하활동을 하기 위해 임의로 전남 구례에서 본적을 옮긴 듯하므로 경남 하동군이 출생지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세 번째, 1966년 3월 28일 소윤하에게 피살된 사실을 다룬 중앙일보 기사#와 그가 개창한 대한불교용화종을 소개하는 법보신문 기사#2에서는 그를 경상도 대구부 출신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용화교의 종교문서인 만법전(萬法典) 기초가(基礎歌)에서는 서백일이 광양 칠성리(현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칠성리)에서 태어났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서백일은 출생부터 불분명한 인물이다.[1]
그의 광복 이전 행적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 당시 신문 자료 및 판결문 등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모두 초명인 서한춘(徐漢春)으로 몇 차례 등장한다.
그는 1934년 1월 27일동아일보 기사1기사2에서 미륵교(彌勒敎)라는 증산 계통의 종교[2]의 교주 서한춘의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이 기사는 그가 이 종교를 개창하기 이전의 과정을 설명했다.
서한춘은 전라남도 구례군에서 태어나 12살 되던 해에 순천 선암사의 김경지(金敬之)라는 중에게 상좌(上佐)로 출가했다가, 2년 만에 환속하여 한동안 농업에 종사했으며, 이후 1926년(대정 15년) 10월, 전라북도 김제군 수류면(현 금산면) 금산리의 금산사에 있는 김형렬(金亨烈: 강일순의 수제자)에게서 최면술과 유사한 술법을 배워 차경석처럼 종교의 교주가 되어 보려고 이때부터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차경석과 충돌하다가 보천교를 탈퇴한 보천교 중요간부인 조제승(曺悌承)·노태흠(盧台欽)을 군산 미곡취인소에서 접선하여 의기를 투합, 마침내 1928년(쇼와 3년) 4월 8일, 고향인 간문면(현 문척면) 금정리 뒷등에 미륵불상 하나를 두고 구성사(九星寺)라고 이름하여 미륵교를 개창하여 교주가 되었다. 이후 서한춘은 일부 보천교 신도 등 여러 민중을 규합하여 "너희들은 세상의 모든 물욕과 사심을 버리고 나에게로 오면 백발환흑(白髮還黑: 흰 머리가 검게 돌아옴)·낙치부생(落齒復生: 빠진 이가 다시 돋음)·환골탈태(幻骨脫態: 겉과 속이 변함)·선풍도골(仙風道骨: 신선의 풍채와 도인의 골격)·불로불사(不老不死: 늙지 않고 죽지 않음) 등의 복을 받을 수 있다."라고 선전하면서 시주 명목으로 현금 3천 여 원을 속여 빼앗는 등 요술로 혹세무민한 혐의를 받아 1933년 12월 초, 구례경찰서에 용화교 간부 11명과 함께 검거되었으며, 1934년 1월 21일에 광주지방법원 순천검사분국에 송치되었다.
아쉽게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사후처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보천교를 비롯한 신흥종교들을 탄압할 때 주로 적용된 법이 치안유지법임을 감안한다면 이 때 당시에 치안유지법으로 체포된 것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이후 1938년 10월 7일 매일신보 기사에서 서한춘은 부산증산교사건으로 또 한번 이름을 알렸다. 당시 그는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면(현 하동읍) 읍내리 1448번지에 일련교(日蓮敎) 하동지부를 두고 지부장으로 취임하여 증산교 지하활동을 하던 중 동년 6월 8일 부산경찰서 고등계형사 10여 명에게 검거, 간부 7명과 체포되었으며, 그 직후 경상남도·제주도·광양군·구례군 등지에 흩어져 있던 간부들까지 색출되어 한 달 동안 22명의 간부가 검거되어 그로부터 3개월 간 취조를 당했고 10월 6일 취조서류 3천여 쪽과 함께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당시 그를 비롯, 그와 함께 검거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았다.
주범 서한춘(徐漢春, 46세, 상업)·문주식(文周植, 52세, 농업)·권기옥(權奇玉, 67세, 농업)·오재원(吳在元, 49세, 농업)·박노수(朴魯洙, 48세, 농업)·박윤근(朴潤根, 49세, 농업)·이동호(李東浩, 52세, 농업)·박원수(朴元秀, 48세, 농업)·최현경(崔鉉擎, 58세, 농업)·박수민(朴秀民, 49세, 농업)·이영훈(李永勳, 61세, 목공업)·조성환(曺盛煥, 60세, 농업)·서진달(徐鎭達, 44세, 무직)·이무열(李武烈, 55세, 농업)·이우건(李愚鍵, 49세, 농업)·최주식(崔周植, 51세, 농업)·강휘봉(姜彙鳳, 52세, 농업)·김춘동(金春洞, 31세, 무직)·안종수(安鍾守, 49세, 농업)·강경호(姜景昊, 61세, 농업)·최한진(崔翰振, 49세, 농업)·유해룡(柳海龍, 65세, 농업)·황세영(黃世泳, 39세) |
이후 서한춘은 1939년 7월 24일 판결문#에 따르면 사기 및 보안법위반 혐의로 상고심에서 상고기각되었다. 원심 판결에 대해선 자료 부족으로 알 수 없으나, 1962년 2월 2일 그가 처음 구속되었을 당시 일제 때 백백교 간부였을 수도 있다는 정보를 다룬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1938년 사건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다고 하니 원심 판결은 징역 7년형이었던 모양이다. 또한 1942년 6월 1일에도 징역 3년(미결 구류 통산 150일)등을 선고받았던 판결문#이 있다.
한편, 전술한 동아일보 기사에서 서백일이 이전에 백백교 간부였을 수도 있다는 추측에 대해 당시 용화사(龍華寺) 감원(監院) 김덕연(金德淵)은 1938년 산제를 지내다가 독립운동을 한다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는데, 1938년에 투옥된 이유는 부산 증산교사건 때문이었다. 죄명 또한 치안유지법이 아닌 사기 및 보안법위반 혐의였으므로 이 주장은 사실에 맞지 않다. 오히려 서한춘은 1934년부터 38년까지 행적이 불분명하므로, 1937년 2월에 실체가 드러나 일경이 수사를 시작했던 백백교의 잔당일 가능성이 차라리 설득력 있다. 하지만 백백교와 증산계 종교는 거리가 멀므로 그냥 추측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1.2. 용화교의 개창
1947년 지리산에 상불사(上佛寺)란 절을 짓고 용화사를 창교했다고 설명한 자료도 있으나, 그 전부터 중을 자칭하며 사이비 종교다운 교설을 설파한 듯하다.서백일은 상불사 말고도 여타 절을 지어 교세를 확장하고 신도들을 분산배치하며 근거지를 옮기다가, 1955년 전라북도 김제시 모악산에 용화사(龍華寺)란 절을 짓고 본부로 삼아 정착하였다. 서백일은 여자들을 출가하게 하여 여수좌(女首座)라 불렀는데, 여수좌들은 사실상 서백일의 첩으로 그 숫자가 5백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서백일이 김제 모악산에 절을 세웠다는 점에서 감을 잡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용화교는 증산 강일순을 신앙대상으로 삼았다. 강일순은 1901년에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大院寺)라는 절에 들어가 도통했다고 주장하였다. 용화교는 강일순이 미륵이라고 주장하였다. 강일순이 생전에 김제 금산사의 미륵불상을 두고 "날 보고 싶으면 금산사에 와라." 하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용화교는 금산사를 어떻게든 자기네 영향권에 두려고 애썼으나 실패하였다.[3]
강일순은 1909년에 만 37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서백일은 강일순이 실은 죽지 않았고 자신에게 내려와 도를 전수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964년에 천지개벽이 일어나 강일순이 조만간 미륵으로서 다시 강림하고 세상에 큰 재앙이 닥치는데, 그때가 되면 용화사 주변에 와야 안전하며, 개벽의 때가 지나면 모악산 일대가 전 세계의 수도가 된다고 설하였다. 서백일은 자신이 미륵에게 사람들을 인도하는 자라고 주장하였다.
1962년, 여수좌 2명이 서백일을 고소해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서백일을 따르는 여수좌들은 서백일은 여자들에게 성범죄를 주장한 적이 없다고 재판에서 극구 옹호하였다. 서백일은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상 이유로 10개월만 복역하고 형 집행정지를 처분받았다. 그러나 형 집행정지 중에도 여전히 범행을 계속하여 66년 2월에도 다시 경찰서 신세를 지었다.
1.2.1. 여수좌(女首座)
전라북도 김제시 모악산에 용화사(龍華寺)란 절을 짓고 본부로 삼아 정착한 뒤로 신도들을 그 주변에 모이게 한뒤에 용화사신도들에게 딸이 있으면 무조건 만 13세 이상이 되면 여자들을 출가하게 하여 여수좌(女首座)라 불렀다. 여수좌들은 사실상 서백일의 첩으로 그 숫자가 전성기에는 5백여 명에 달했는데, 서백일이 있는 용화사 성화대에만 150여 명 이상 거주했다고 한다.[4] 하지만 서백일이 1차 체포가 된 이후 교세가 줄고 여수좌들이 도주하는 일이 생기면서 용화사 성화대 기준으로 110여 명으로 줄었고 서백일이 2차 체포가 된 말기에는 30여 명을 유지했다고 한다.[5] 신도들은 서백일이 자기 딸을 첩으로 삼는 줄 알고도 보냈다고 하니, 서백일에게는 사이비 교주다운 마성(魔性)이 있었던 모양이다. 여수좌들은 출가하면 출가했다는 입장에서 머리를 모두 삭발하고 입신했는데, 용화사로 들어오면 육총리들에게 인도되어서 화장과 가발을 쓰고 다시 교주 서백일에게 불려가서 아래와 같은 여덞 가지 가르침을 맹세해야 했다고 한다.①수좌가 되려고 산만법현무(서백일)가 죽으라면 죽겠는가
②현무가 죽으면 따라 죽겠는가
③현무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호랑이 굴에 가서라도 약을 구해 오겠는가
④너의 간을 먹어야 낫겠다면 간을 내어 주겠는가
⑤현무가 꾀(옷)를 벗고 장바닥에 나가라면 나가겠는가
⑥현무 앞에서 꾀를 벗으라면 벗겠는가
⑦생사를 영원히 만법현무에게 맡기겠는가
⑧만일 용화가 없더라도 성화대에 그냥 살겠는가?
출처
여수좌들은 처음 만난 교주 서백일에게 이 여덟가지의 맹세를 하는데 당시에 그들은 신앙심을 굳게 하는 서약인 줄만 알았다고 한다. 그 다음에 서백일은 여수좌들에 옷을 벗게하며 간음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들이 거부하기 전에 이미 맹세를 바탕으로
1백5수좌가 되려면 용화공자의 대법인 천하음양·도수를 보아서 도인의 수기를 받아야 된다.
안 보이는 마음은 부처에게 맡기고 육신은 내게 맡겨야 한다.
안 보이는 마음은 부처에게 맡기고 육신은 내게 맡겨야 한다.
라며 음양도수(陰陽道數)라는 명분으로 이들과의 간음을 합리화하고 강요했다고 한다. 그냥 간음도 아니고 서백일은 105계층의 용화세계 계급이 있고 이것은 자신의 강(姜)[6]이라는 명목의 성관계를 통해서만 계급을 올라간다 명목으로 지속적인 강간을 합리화했다. 여수좌 한 명당 적어도 3년 동안은 이런 일을 당했는데, 보통은 서백일의 거처지인 대법전 소제 당번으로 돌려서 당했다고 한다.[7] 특히 저녁 7시나 8시쯤 당번 수좌는 방문을 잠그고 포장으로 방을 둘러치고 병풍을 친 다음 알몸으로 있는 서백일을 안마해줌이 일이었다고 한다. 당번 수좌들은 23세까지 할 수 있었다.
이 당번 수좌 혹은 소제 수좌의 연령이 끝나면 그 다음부터는 뒷방수좌 혹은 늙은수좌라고 하여 사실상 버려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파계해서 나갈 수도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서백일의 편집증적으로 수집된 노예로 살아야 했다고 한다. 이렇게 물러난 뒷방수좌들에 의한 투기 및 소위 말하는 갈굼으로 여수좌들끼리 갈등이 의외로 빈번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집단행동이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의도한 것 같다. 즉 여수좌 집단은 서백일의 하렘이었다. 게다가 이들이 집단행동을 못하도록 2명 이상만 모여도 '짝패'라고 하여 큰 비난[8]을 받게 했다.
앞서 말한대로 뒷방수좌로 물러난 여수좌들과 신입 여수좌 및 소제당번이 유효한 여수좌들간의 갈등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통제했는데 이들 여수좌들을 관리하는 건 '육총리'라는 관리자[9]나 감시자들이 존재했고 그 위로 그 육총리들을 관리하는 팔선녀들이 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따라서는 다르지만 팔선녀의 존재는 서백일의 처라는 입장과 그냥 똑같은 첩이라는 입장이 있다. 이러한 피라미드식 관리는 전형적인 사이비종교의 신도 통제방식이다.
앞서 말한 대로 그나마 서백일이 1차 체포되던 시점에서 살아있는 부처라는 활불의 존재도 체포당한다는 사실에 교단은 흔들렸고 남승들과 눈맞아서 야반도주하는 등 일들이 의외로 많았기에 점점 수가 줄었들었다. 150여 명이 벗어나지 못한 채 통제당했고 2차 체포 시점에서 30여 명 정도로 줄었다는 점에서 점점 도망치고 환속하는 여수좌들이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서백일이 여수좌들을 농락하던 때 나이가 당시로서는 오늘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60~70대였다.
1.3. 서백일의 종말과 그 후
1966년 3월 27일 새벽, 서백일은 과거 신도였던 22세의 청년 소윤하(蘇潤夏)[10]에게 암살당함으로써 79세 나이에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소윤하는 교주에게 자기 누나와 여동생이 당하였으므로 참을 수 없어서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교도소에서 복역했지만, 용화교 실체가 드러나면서 가석방되었다.아직 개벽이 오지도 않았는데 교주가 피살되자 교단이 크게 흔들렸다. 모여들었던 수좌들도 흩어지고 소수의 광신도만 남아 교단을 유지하였다. 지금도 단체는 계속 이어지지만, 창교주 서백일을 없는 역사로 묻어버리고 '대한불교 용화종'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미륵을 기다리는 불교종파가 되었다.
1999년에 MBC의 '한국 100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라는 다큐 프로그램에서 용화교 관련 내용을 방송하였다. 여담으로 소윤하는 해당 방송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살인 당시를 남 얘기하듯이 굉장히 밝게 묘사한다.
용화교 관련 추가 정보는 관련 블로그에서 확인 가능하다.
2. 퇴마록에서 등장하는 단체
용화교(퇴마록) 항목 참고[1] 물론 당시 혼란스러웠던 시대상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서백일이 사기꾼 범죄자임을 감안하면 의도적으로 감추거나 위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서백일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최태민도 여러 가명과 나이, 심지어 자신의 족보까지 위조하면서 사기행각을 일삼았다.[2] 서한춘이 강일순의 수제자 김형렬(金亨烈)로부터 술법을 배운 바 있고, 또한 보천교 교주 차경석과 알력을 빚다가 보천교를 탈퇴한 조제승(曺悌承)·노태흠(盧台欽) 등 간부들을 비롯한 보천교 신도 등을 규합하여 만든 것이 미륵교이므로, 증산계 종교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위 동아일보 기사에서 '제2보천교'라고 지칭하기도 했다.[3] 일제강점기에는 강일순의 수제자 김형렬이 금산사 내부에 종교단체 사무실을 설치할 정도였다. 현재도 많은 증산종교인들이 금산사에 찾아온다.[4] 나머지는 원각사와 남일사에 각각 상주했다고 한다.[5] 13세부터 출가한 존재도 있었지만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수좌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6] 원래는 강도(姜道)라는 의미로 상제의 기 혹은 도라는 의미라고 한다. 즉 서백일 자신의 기라는 소리다.[7] 이들 당번 수좌는 105명으로 한정했다고 한다.[8] 서백일을 비난하거나 수좌끼리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외부에 자신들만의 사교다운 교리가 들통나지 않도록 "천하(天下)에서 제일 큰 죄(罪)는 용화공음구업죄(龍華空陰口業罪)"라는 명분을 들이대었다. 사이비종교에서 보여주는 전형적인 정보의 차단통제 효과를 노린 것이다. 여기서 '용화공음구업죄'란 단어는 '시원한(살기 좋은) 용화세계에서 입으로 짓는(구업口業) 죄'라는 뜻이다.[9] 이들은 성화대라는 서백일이 거주하는 직할 용화사에만 20여 명 정도 되었으며 주로 30대 이상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10] 1944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