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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 군나르 솔샤르/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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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맨유 시절 이전과 입단하기까지의 과정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3. 은퇴

1. 맨유 시절 이전과 입단하기까지의 과정

아버지 오이빈드 솔샤르(Øivind Solskjær)는 노르웨이 국가대표까지 지낸 레슬링 선수로 아들인 올레도 꽤 오랫동안 레슬링을 하다가 상당히 늦은 나이에 축구로 전향했다. 포지션은 축구를 시작할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오로지 공격수였다. 어릴 때는 체격 문제도 있고 해서 축구를 계속할지를 고민한 적도 있다고.

솔샤르는 16세가 되던 1989년에 노르웨이의 클라우센겐 FK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는데, 오타 컵 경기에서 단 6경기 만에 17골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았으며 1995년 몰데 FK로 이적해서 첫 해에 20골을 기록하는 눈부신 활약을 했다. 몰데에서는 총 38경기 31골을 기록했으며, 이런 활약에 힘입어 독일이탈리아 팀이 관심을 보였다. 1996년 여름 이적 시장 당시 몰데의 감독은 팀의 에이스인 솔샤르를 맨체스터 시티 FC에버튼 FC에 1.2m에 팔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1]

한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당시 프리미어 리그 톱 공격수였던 앨런 시어러를 영입하려고 노력했지만, 막판에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에게 하이재킹당해서 실패한 후 평소 눈여겨 보았던 솔샤르에게 1.5m의 영입 제의를 했다. 이 금액은 당시로서는 노르웨이 리그 레코드에 상당하는 금액이었고, 노르웨이 리그의 낮은 인지도, 솔샤르가 노르웨이 밖에서는 듣보잡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오죽하면 몰데의 감독은 퍼거슨의 팩스를 받았을 때 솔샤르의 에이전트가 몸값을 올리려고 꼼수를 쓰는 줄 알고 팩스를 버렸을 정도. 혹시 몰라 맨유 측에 확인 전화를 해봤는데 그 팩스가 진짜라고 인증을 받자 팀이 발칵 뒤집어졌다. 맨유의 이러한 파격적인 제의가 알려지고 나서 노르웨이가 술렁였으며,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자 솔샤르는 매우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쟁쟁한 선수들(에릭 칸토나, 데이비드 베컴, 로이 킨 등)과 함께 뛸 수 있다는 퍼거슨 감독의 설득으로 솔샤르는 이적 결심을 했고 1996년 여름 올드 트래포드에 도착했다.

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당시 솔샤르의 영입은 완전히 뜻밖의 영입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노르웨이 리그는 1부 리그라 해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데다 솔샤르의 활약도 노르웨이 내에서나 유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맨유에는 에릭 칸토나, 앤디 콜이라는 탁월한 공격수가 버티고 있었기에 주변에서는 그가 그 둘의 백업자원으로 첫 시즌을 보낼 것이라고 예상했다.[2]

그러나 예상외로 기회가 일찍 찾아왔고 1996년 8월 25일에 열린 블랙번 로버스와의 리그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해서 6분만에 데뷔골을 넣는 등 범상치 않는 임팩트를 보여주더니, 곧바로 노팅엄 포레스트전에 첫 선발 출전을 가져 선제골을 기록하는 좋은 활약을 이어갔다. 이로부터 11일 뒤, 솔샤르는 UEFA 챔피언스리그 데뷔골도 기록했으며, 그 주 주말에는 토트넘 홋스퍼 FC를 상대로 멀티골을 기록했다. 이후 12월 21일에 열린 선더랜드전에서 다시 멀티골을 기록했으며, 시즌 막판 레스터 시티 FC를 상대로도 멀티골을 기록했다. 그렇게 솔샤르는 첫 시즌에 리그 33경기(25선발) 18골, 대회 총합 19골을 넣는 맹활약을 펼치면서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첫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적응으로 이 시즌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1996-97 시즌: 46경기(선발 33경기) 19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3 25 8 18 4
챔피언스 리그 10 8 2 1 1
FA컵 3 0 3 0 0
합계 46 33 13 19 5

1997-98 시즌, 9월 말 첼시전에서 교체 투입되어 시즌 첫 골을 넣어 2-2 무승부를 이끌었다. 이후 11월 초, 셰필드 유나이티드전에서 멀티골을 넣더니, 11월 말에는 블랙번 로버스를 상대로 멀티골을 기록했다. 이후 FA컵에서 3부 리그 팀을 상대로 다시 멀티골을 넣었고, AS 모나코와의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 경기에서는 1-0으로 뒤진 상황에서 동점골을 넣었지만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준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러다 4월 달에는 뉴캐슬과의 리그 경기를 가졌다. 당시 맨유는 아스날과 리그 우승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중이었고 뉴캐슬과의 시합에서 최소한 무승부는 기록해야 우승 경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시합에서 1:1로 팽팽하게 경기가 진행중이던 찰나, 뉴캐슬의 로버트 리 선수가 결정적인 역습 기회를 잡아 텅 비어있던 맨유쪽 골문으로 쇄도했다. 10명의 선수가 모두 뉴캐슬쪽에 몰려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맨유로서는 치명적인 위기였다. 이 때 솔샤르는 전속력으로 로버트 리 쪽으로 내달려서 따라잡아 백태클을 날려서 맨유의 실점 위기를 저지하고 퇴장당했으며 다음 시합에 출장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맨유 서포터들은 팀에 대한 그의 헌신적인 태도에 깊이 감명받았고 퇴장당하는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이 일은 이후 그가 서포터 사이에서 절대적인 지지와 인기를 누리는 계기가 되었다.[3] 그렇게 솔샤르의 맨유에서의 2번째 시즌은 퍼포먼스가 데뷔시즌보다는 아쉬웠지만, 가공할만한 활약을 펼쳤다. 시즌 성적은 22경기(15선발) 6골, 총합 30경기 9골.

1997-98 시즌: 30경기(선발 19경기) 9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2 15 7 6 4
챔피언스 리그 6 3 3 1 0
FA컵 2 1 1 2 0
합계 30 19 11 9 4

하지만 1998-99 시즌, 드와이트 요크가 맨유로 이적해 옴에 따라 벤치 멤버로 밀려났고, 맨유 구단에서도 솔샤르를 런던 연고 클럽인 토트넘 홋스퍼 FC로 이적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팀으로부터 팩스를 받은 솔샤르가 퍼거슨 감독을 찾아갔을 때, 그의 이적허가는 퍼거슨 감독의 뜻과는 무관하며 그가 여전히 팀 구성에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벤치로라도 팀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남겠다고 하여 그대로 남게 된다.[4] 이후로 선발보다는 교체로 주로 출전했는데 이것은 솔샤르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기적을 일궈내는 해결사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해 노팅엄 포레스트전에서 경기 종료 11분을 남겨두고 교체 출전하여 무려 4골을 터트리는 결정력을 보여주었으며, FA컵 32강 리버풀 FC전에서 경기 종료 직전 후반 91분에 기적같은 역전골을 넣기도 했다. 이 이후 '슈퍼 서브'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얻는다. 이 별명이 보여주듯 교체로 출전하면서 결정적인 골을 많이 넣었기 때문에 그가 벤치에 앉아있기만 해도 상대팀이 압박을 느낀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아스날 FC아르센 벵거 감독은 그를 평하기를 "98-99 맨유 트레블 역사, 그 중심에는 셰링엄과 솔샤르가 있었다."라고 하며, 그가 은퇴할 때 '그는 아주 효율적인 선수였다.'라는 요지의 인터뷰도 했다. 다만 솔샤르 본인은 슈퍼서브라는 별명을 싫어했던 듯. 그리고 의외로(?) 선발로도 자주 출전했다. 드와이트 요크, 앤디 콜과 선발 경쟁을 해서 한때 그 둘을 벤치로 보낸 시기도 있으며 특히 베컴이 부상으로 장기 결장했을 때나 이적 때는 오른쪽 윙으로도 자주 출장했다.

그리고 1999년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맨유의 트레블은 절망적으로 보였다. 맨유는 로이 킨폴 스콜스가 경고누적으로 출장하지 못했고, 철의 수문장 올리버 칸이 버티고 있던 FC 바이에른 뮌헨의 골문은 도저히 열릴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경기 내내 끌려다니다 0:1로 지고 있던 상황. 챔피언스리그 트로피 '빅 이어'에 뮌헨의 리본이 감기고 있던 순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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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91분, 교체투입된 테디 셰링엄이 로스타임에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린 데 이어 93분에 터진 솔샤르의 역전골로 트레블 달성의 주인공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맨유 역사상 가장 빛난 시즌인 1999년의 트레블은 바로 솔샤르의 발끝에서 나온 것이다. 퍼거슨 감독이 2011년 11월에 감독 재임 25주년 기념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골을 골랐을 때, 첫 손가락에 꼽은 것이 바로 이 골이다.
이 시즌의 성적은 리그 19경기(9선발) 12골, 총합 37경기 18골이다.

1998-99 시즌: 37경기(선발 17경기) 18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9 9 10 12 1
챔피언스 리그 4 1 3 2 0
FA컵 8 4 4 1 2
EFL컵 3 3 0 3 0
커뮤니티 실드 1 0 1 0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0 2 0 0
합계 37 17 20 18 3

1999-00 시즌에는 8월 11일 리그 개막전부터 시즌 첫 골을 넣었다. 11월 2일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SK 슈투름 그라츠전에서는 환상적인 발리슛으로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여기에 12월 4일 에버튼전에서는 해트트릭을 넘어 포트트릭을 기록하면서 맨유 소속으로 통산 50번째 득점을 기록했다. 이후 3월 4일에는 리버풀전에서 동점골을 기록하며 1-1 무승부를 이끌었으며, 3일 뒤 챔스 16강 보르도전에서는 교체 출전하여 득점을 올렸다. 이후 4월에 웨스트햄전과 선덜랜드전에서 득점포를 가동했으며, 첼시전에서는 동점골을 기록하며 3-2 승리를 이끌었다. 그렇게 리그 28경기(15선발) 12골, 시즌 46경기 15골을 기록하며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99-00 시즌: 46경기(선발 24경기) 15골 8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8 15 13 12 7
챔피언스 리그 11 4 7 3 0
EFL컵 1 1 0 0 0
커뮤니티 실드 1 0 1 0 0
클럽 월드컵 3 2 1 0 1
슈퍼컵 1 1 0 0 0
인터컨티넨탈컵 1 1 0 0 0
합계 46 24 22 15 8

2000-01 시즌에는 기존 주전 투톱이던 요크와 콜이 좋지 않은 몸상태로 결장이 잦아지면서 데뷔 시즌 다음으로 많은 출전 기회를 잡았으나 활약상 자체는 1997-98 시즌 이후로 아쉬웠다. 리그에서는 31경기(19선발)에서 10골을 넣긴 했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득점이 없었으며, 시즌 47경기 13골에 그쳤다. 그래도 팀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000-01 시즌: 47경기(선발 26경기) 13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1 19 12 10 4
챔피언스 리그 11 3 8 0 3
FA컵 2 1 1 1 0
EFL컵 2 2 0 2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47 26 21 13 7

2001-02 시즌에는 콜이 겨울이적시장 때 이적하고, 요크는 노쇠화가 시작되며 부진 및 부상으로 아예 주전 경쟁에서 밀려버리면서 출전 기회가 더욱 늘어난다. 그렇게 솔샤르는 리그에서 주전(30경기 출전, 23경기 선발)으로 활약했으나, 당시 새로 입단한 뤼트 판니스텔로이가 워낙 센세이셔널한 활약상을 보여주면서 챔피언스리그에서는 15경기 출전 중 선발 출전 횟수는 5회에 그쳤다. 그래도 득점 본능은 대단했다. 리그는 30경기 17골을 기록했으며, 챔피언스리그에서는 교체 출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7골을 기록, 총합 47경기 25골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다만 팀이 무관에 그쳐서 아쉬운 시즌.

2001-02 시즌: 47경기(선발 30경기) 25골 9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0 23 7 17 9
챔피언스 리그 15 5 10 7 0
FA컵 2 2 0 1 0
합계 47 30 17 25 9

2002-03 시즌에는 8월 17일 웨스트브롬위치전에서 시즌 첫 골을 기록하면서 맨유 입단 후 100골을 달성하였고 리그 우승도 경험한다. 그리고 데이비드 베컴이 퍼거슨 감독과의 불화로 선발 출전 횟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솔샤르는 우측 윙어로 출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6] 그러면서 리그 빅매치라던가 챔피언스리그 레알 마드리드전 같은 중요한 경기에서 베컴 대신 선발 출전하였다. 시즌 성적은 리그 37경기 9골, 총합 57경기 15골.

2002-03 시즌: 57경기(선발 40경기) 15골 1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7 29 8 9 6
챔피언스 리그 12 8 4 3 5
FA컵 2 1 1 1 0
EFL컵 4 1 3 1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1 1 1 0
합계 57 40 17 15 11

2003-04 시즌에도 데이비드 베컴의 이적으로 인해 오른쪽 윙으로 뛰게 되지만, 시즌 초반 9월 16일 챔스 조별리그 경기에서 입은 무릎 부상으로 인해 다음해 초반까지 뛸 수 없게 된다. 이후 FA컵 준결승 아스날전에 복귀하였고, FA컵 결승에도 출전하며 우승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이 시즌에 입었던 무릎 부상이 이후 그의 커리어 내내 따라다니며 발목을 잡았고[7], 선수 생활 말년에 기나긴 무릎 부상에 시달리게 되는 악재가 되고 만다. 그렇게 2004년 8월에 다시 무릎 부상이 재발되는 불운으로 인해 결국 2004-05 시즌에는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팬들은 계속해서 그를 기다렸고 그가 없는 경기에도 그의 응원가를 불렀다. 구단 측에서도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면서 장기 부상으로 인한 결장하는 와중에서도 계속해서 솔샤르와 재계약을 맺었다. 2005-06 시즌 기나긴 부상에서 회복했으나 실전 감각 회복을 위해 리저브 경기에서 주로 뛰었고, 1군에서는 리그 3경기와 FA컵 2경기 출전에 그쳤다.

2003-04 시즌: 16경기(선발 9경기) 1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3 7 6 0 2
챔피언스 리그 2 1 1 1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16 9 7 1 2

2005-06 시즌: 5경기(선발 2경기)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 0 3 0 0
FA컵 2 2 0 0 0
합계 5 2 3 0 0

그리고 2006-07 시즌이 되면서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한 솔샤르는 8월 23일 찰튼 애슬레틱과의 경기에서 정말로 오랜만에 복귀 골[8]을 기록하면서 2003년 4월 이후 첫 프리미어리그 골을 넣었고, 9월 13일 챔스 조별리그 셀틱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며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도 정말 간만에 득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10월 1일 뉴캐슬전에서는 부상 복귀 후 홈에서 첫 리그 골을 기록했으며, 10월 25일 리그컵 경기에서는 선제골을 넣으며 다음 라운드 진출을 이끌기도 했다. 이후 12월 30일 레딩전에서는 선제골을 넣으며 3-2 승리를 이끌었으며, 1월 7일 FA컵 아스톤빌라전에서는 후반전에 투입되어 추가시간에 결승골을 기록하며 다음 라운드 진출을 이끌었다. 이처럼 솔샤르는 예전 명성을 되찾으며 나이에 걸맞지 않는 뛰어난 결정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즌 막바지를 향해 갈수록 무릎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었고, 2월부터 경기에 나서기 어려운 상태가 되면서 1달 정도 아웃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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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210128_232951.jpg
그러다 3월 31일 블랙번전에서 교체 출전하여 복귀하였고, 박지성의 어시스트를 받아 복귀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골은 현역 선수로서의 마지막 골이 된다.[9] 이후 FA컵 결승 첼시전에서 교체 출전하였으나, 팀이 연장 승부 끝에 1-0으로 패하면서 시즌 마지막 경기를 마쳤다. 그래도 리그에서 19경기 출전[10]하여 7골을 기록하고, 총합 32경기에서 11골을 기록하며 '2OLEGEND'의 명성을 되찾게 해 주었으며 2002-03 시즌 이후 간만에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06-07 시즌: 32경기(선발 15경기) 11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9 9 10 7 0
챔피언스 리그 6 2 4 1 2
FA컵 6 3 3 2 0
EFL컵 1 1 0 1 0
합계 32 15 17 11 2

3. 은퇴

그러나 커리어 내내 따라다니던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인해 결국 2007-08 시즌 개막 직전 현역 은퇴를 선언하게 되었다.[11] 얼마 후 선덜랜드와의 홈 경기에서 한때 팀 동료였던 로이 킨과 함께 올드 트래포드 관중들의 기립 박수 속에 은퇴식을 치렀다.

솔샤르는 은퇴 기자화견에서 감독 및 코치진과 팬들에게 감사함을 밝혔다. 이어 그는 맨유에서 11년간 활약할 수 있었음에 감사함과 자랑스러움을 표했으며, 팬들의 격려 덕에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음을 전했다.

약 1년 후인 2008-09 시즌 개막 직전 RCD 에스파뇰과의 친선 경기를 솔샤르의 은퇴 경기로 가졌다. 맨유는 이 경기에서 프레이저 캠벨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했다.[12]


[1] 후에 1996~97 시즌이 시작하고 얼마 후 솔샤르의 실력이 입증되자 그 두 팀이 그를 놓친 것에 관한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2] 후에 솔샤르는 퍼거슨 감독이 그에게 "너는 미래를 보고 영입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3] 그러나 이 퇴장으로 퍼거슨 감독에게 호되게 야단맞았으며 본인도 자신의 실수라 생각하는 듯.[4] I will stay라고 대답했다고. 이때 그의 에이전트는 이적을 적극적으로 권유했기 때문에 잔류를 원하는 솔샤르와 의견충돌을 빚었는데 솔샤르가 강력하게 의견주장을 해서 남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 에이전트도 당시 솔샤르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인정했다.[5] 베컴은 이 광경을 보고 속이 울렁거렸다고 회고했다.[6] 공교롭게도 이 당시에 발생한 베컴과 퍼거슨의 축구화 사건에서 베컴의 눈두덩이에 맞은 축구화는 솔샤르의 것이었다고 한다. 넷플릭스 ‘베컴’ 다큐멘터리에서 솔샤르 본인이 직접 회고했다.[7] 이 기간 동안, 솔샤르 대신 주전 오른쪽 윙이 된 선수가 당시 이적생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였다.[8] 이때 세레머니가 오랫동안 자신을 기다려준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세레머니였다.[9] 즉, 현역 선수로서 솔샤르의 커리어 마지막 득점이 된 골을 어시스트한 선수가 박지성이 된 것이다.[10] 거의 교체 출전이었다.[11] 이 당시 시즌 개막 직전에 항상 하는 단체 사진까지 찍었는데 이미 클럽 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솔샤르가 은퇴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함구하였고, 며칠 뒤 본인이 직접 은퇴를 발표했다.[12] 솔샤르는 이 경기에서 두 차례 좋은 슈팅을 날리지만 눈치없는 상대 골키퍼의 선방으로 득점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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