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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종/선수 경력/아마추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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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종의 연도별 시즌 일람
아마추어 2007년

1. 아마추어 시절2. 연도별 성적
2.1. 투수 기록2.2. 타자 기록
3. 관련 문서

1. 아마추어 시절

1.1. 고교 이전

파일:C8ldGwB.jpg
학강초등학교 시절[1]
처음부터 야구가 좋아서 야구를 시작한건 아니라고 한다. 출신 초등학교인 광주학강초에는 정식 야구부는 있었지만 야구보단 축구, 농구 등 밖에서 뛰어노는걸 더 좋아했고 야구에는 크게 흥미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본인이 공부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고, 학교에 야구부가 있어 야구를 시작했고, 야구부를 하면서 급식을 빨리 먹을 수 있는게 좋아서 쭉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학교의 급식실 줄은 너무나 길었고 운동부의 특성상 가장 먼저 밥을 먹고 운동을 했어야해서 일반 학생들보다 먼저 먹게 된 것이다. 학교에서 야구부에 가입하고나서, 쭉 야구를 하다보니 그렇게 첫 야구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말부터 사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하였으나 타고난 운동신경이 있는 양현종은 금방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투수를 시작한 것은 광주동성중학교 시절부터였다. 이유는 왼손잡이라는 이유라 했고, 타자에는 크게 소질이 없었다고 한다. 중학교 때가 가장 힘든 시기라고 밝힌 적이 있었는데, 체벌, 코치의 훈계, 지나친 체력훈련 등과 때마침 찾아온 사춘기로 처음으로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어머니께 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은 잘넘기고 광주동성고등학교에 진학한 양현종은 그 때부터 초중학교 때는 느껴보지 못한 야구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1.2. 광주동성고등학교 야구부 시절

파일:thumb_3696639864_2XBRwN4j_33.jpg
동성고등학교 시절[2]
광주동성고 재학 당시 한 학년 위의 한기주와 자신의 이름이 신문이나 TV중계에 거론되는 것을 보면서 더욱더 야구에 매진하게 되었고, 김광현의 뒤를 잇는 당해 랭킹 2위의 좌완 투수로 기대를 모았다. 이러한 기대치에 힘입어 청소년 대표팀에 뽑혔고, 2006년에 IBAF 세계야구청소년대회에서 맹활약하며 팀의 우승에 일조했다.[3]

2005년(고2)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에서 신일고에 2-1 역전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할 당시 구원 투수였다. 한기주가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내려가자 2회에 구원 등판했고 6⅓이닝 5피안타 무실점으로 잘 막았다.

2006년(고3) 대통령배 2연패에 도전, 이용찬의 장충고와 맞붙어 결승전에서 7⅔이닝 14탈삼진을 기록했지만 타선이 터지지 않으며 0:2로 패했다. 이 날 경기에서 8회 2사 상황에서 4번타자 이두환에게 솔로 홈런을 맞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4]

당시 공식전 최고 구속은 140km였지만, 프로에서 메커니즘을 좀 더 다듬고 근력을 끌어 올린다면 더 빠른 구속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그래서 KIA 타이거즈가 사상 최초로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얻은 2차 지명 전체 1번으로 입단하였다. 양현종이 광주팜(동성고) 출신이지만 1차 지명에서 KIA는 당대 고교 최대어 중 하나인 광주진흥고정영일[5]과 광주일고-인하대 출신의 오준형을 지명했다.[6] 그러나 정영일은 지명을 거부하며 미국에 진출했고, 오준형은 프로에서 좋은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지명 순서에 대해서는 KIA 타이거즈가 2005년에 최하위를 해서 2차 지명 1순위 지명권을 얻게 되어 계약금을 아끼기 위해[7] 2차 1번으로 넘어간 것이지 꼴찌가 아니었더라면 1차 지명되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8] 하지만 동성고의 에이스이자 양현종의 1년 선배로, 계약금 10억을 받으며 기대를 모았었던 한기주만큼 기대치가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파일:07기아입단식.jpg
KIA 입단식 (아랫줄 오른쪽에서 두번째)[9]

2. 연도별 성적

2.1. 투수 기록

역대 기록
<rowcolor=#fff> 연도 소속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2004 광주동성고 3 3⅔ 1 0 0.00 4 0 0 5 0 0
2005 8 37 2 0 0.49 27 0 10 33 4 2
2006 16 90⅔ 8 3 0.99 50 2 30 141 11 10
통산
(3시즌)
27 131⅓ 11 3 0.82 81 2 40 179 15 12

2.2. 타자 기록

역대 기록
<rowcolor=#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출루율 장타율 OPS
2004 광주동성고 2 0 .000 0 0 0 0 0 0 0 0 .000 .000 .000
2006 6 5 .200 1 0 0 0 0 0 0 0 .200 .200 .400
통산
(2시즌)
8 5 .200 1 0 0 0 0 0 0 0 .200 .200 .400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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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자의 로고를 잘 보면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유니폼에 쓰인 모자 로고와 같다. 참고로 이 학교 야구부의 현재 유니폼은 과거 해태 타이거즈의 상징이었던 검빨 유니폼과 똑같다.[2] 당시 동성고의 로고는 두산 베어스와 비슷했다.[3] 좌완 투수 부분 올스타전과 대회 평균자책점 1위.[4] 양현종은 이두환과의 인연이 특별한데 이두환의 투병부터 사망까지 지켜봤던 절친이었으며 이니셜인 DH를 모자에 항상 적어놓았다.[5] 2006년 한 해동안 혹사의 아이콘이었다. 대통령배 1회전 경기고와의 게임에서 13⅔이닝, 242투구수, 64타자, 23탈삼진, 12피안타, 11사사구, 6실점을 기록하고도 연장 16회에서 패했다. 같은 해 청룡기 경남고와의 결승전에서는 16이닝, 222투구수를 기록하고도 연장 16회에서 패했다. 대통령배, 청룡기, 무등기에서 혼자 다 던지다시피해서 결국 메이저 리그 진출은 커녕 마이너 리그에서도 부상, 재활 등으로 부진한 채 쓸쓸히 귀국했다.[6] 2007년 한 해만 신인 1차 지명으로 2명을 뽑을 수 있었다.[7] 실제로 양현종의 계약금은 2억원으로 오준형의 계약금 1억 8천보다 2천만원 더 많다. 팬들은 양현종이 1차 지명되었다면 계약금이 3억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본다.[8] KIA는 또 2007년에 꼴찌한 대가로 2008년에 고교 4대 유격수 중 한 명이었던 안치홍을 2차 지명 1라운드에서 뽑아갈 수 있었다.[9] 뒷줄 맨 오른쪽 32번을 단 선수가 권윤민KIA 타이거즈 전력기획팀장이다. 그리고 앞줄 맨 왼쪽에 있는 선수는 다름아닌 現 롯데 자이언츠 단장인 성민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