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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598년 5월 6일에서 1621년 7월 13일까지 일시적으로 총독이 아니라 주권자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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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nando Álvarez[1] de Toledo
(1507. 10. 29 ~ 1582. 12. 11)
1. 개요
군왕들의 용인술이란 비정하기 짝이 없어 마치 사람이 귤인 마냥 처음엔 그 과육을 다 짜낸 이후, 껍데기만 남았을땐 망설임도 없이 버려버린다.
Los reyes usan a los hombres como si fuesen naranjas, primero exprimen el jugo y luego tiran la cáscara.
Los reyes usan a los hombres como si fuesen naranjas, primero exprimen el jugo y luego tiran la cáscara.
에스파냐의 군인이자 정치가. 보통 16세기 유럽사 굵직한 장면에 등장하는 알바 공(Duque de Alba)은 이 사람을 가리킨다. 스페인 제국의 최고 전성기인 16세기 중후반을 대표하는 군인이자 대귀족이다. 당시 스페인 귀족단의 최선임 중 하나로 정치적 영향력도 막대했으며, 군공으로선 16세기 최고의 야전 지휘관으로 봐도 과언이 아니고, 한창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던 황금기 스페인 카스티야 영지에선 문화적, 종교적 부흥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미권 중심의 근대 유럽 역사학계에선 네덜란드 반란 진압 사령관 때 막상 본인도 정치적으로 답이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으면서도[2] 폭압적인 군사적 진압을 통해 반란을 더 키워버린 실책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네덜란드와 이들의 시각을 이어받은 개신교 영미권에선 이런 전적 때문에 유서 깊은 반(反)스페인 사관(La Leyenda Negra/the Black Legend)에선 당시 스페인의 군사적 위세와 폭압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폄하되었으나, 군사 지휘관으로선 적어도 그 휘하에 종군했던 부하와 병사들에겐 큰 존경과 사랑을 받은 덕장이었다. 하늘로 치솟는 전비와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인해 스페인 본국이 하루가 멀다 하고 디폴트 선언할 때마다 반란 터지기 직전인 휘하 스페인 네덜란드 군단의 봉급을 자기 사비에서 갹출해서 매꿔준 적도 많고, 비효율적인 전투나 인력 소모는 피하면서 병사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지휘관이란 평판을 들었다. 16세기 군사 대전략의 발전에 있어 스페인 테르시오가 기여한 가장 중요한 분야인 야전 병원, 병참 체계 등 전문화된 군사 복지 등 시설이 확충된 것도 알바 공작의 공적이 크다.
2. 생애
1535년에 튀니스 원정에 종군하고, 1536년에는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하여 란츠크네히트의 한 축을 담당했지만 프랑스군의 지휘관인 안 드몽모랑시가 전략적 요충지를 제외하고 다른 지역을 초토화하는 작전으로 나가자 식량의 현지 조달이 어려운 상태에 봉착하였으며, 마르세유 근처에서 기습을 받자 병사들을 후퇴시켰다.1541년에는 북아프리카 원정에서 육군 총사령관으로 참여하여 알제로 상륙하려고 시도했지만 매우 좋지 않은 날씨 탓에 수많은 병사들이 수장된 데다가 상륙한 직후에는 매복한 무슬림들의 공격을 받아 후퇴했다.
이 북아프리카 원정 때 병에 걸려 몸이 좋지 않은 상태임에도 참전하였으며, 종군하기 전에는 전쟁에 필요 없는 짐을 가져가려는 자를 제외시키고, 비전투 종군자들에게 태형을 내리는 등 전쟁을 위해 열심히 했다는 이유로 최고 궁내관에 임명되었다. 또한 이 해에 나바라와 카탈루냐의 수비를 맡아 현지의 병력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 프랑스군이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게 하였다.
1544년 9월 19일에 프랑스 왕국과 맺은 크레피 평화 조약 때 결혼 동맹으로 프랑수아 1세의 차남인 오를레앙 공 샤를 2세의 짝을 선택하는 일로 토론이 벌어졌는데 그 대상은 카를 5세의 딸인 마리아와 카를 5세의 질녀인 안나였다.
마리아와 결혼하면 카를 사후 네덜란드 지배권을 부부가 공유하고, 안나와 결혼하면 1년 후 밀라노의 지배권을 가져간다는 조건이었는데 이때 밀라노 공국은 나폴리, 시칠리아의 방어에서도 중요한 곳이면서 독일과 플랑드로로 원활하게 진입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한다는 이유로 오를레앙 공 샤를 2세의 결혼 상대를 카를 5세의 질녀인 안나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1544년에 카를 5세는 블라스코 누녜스 벨라(Blasco Núñez Vela)를 페루를 통치할 부왕으로 임명하고, 누녜스 벨라는 인디오(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좋은 대우와 보호에 대한 내용이 담긴 신법령을 발표하자 이 소식을 들은 곤살로 피사로는 황제가 임명한 부왕과 신법령에 반대하고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과 신법령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켜 누녜스 벨라를 죽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본국은 대책 회의를 열었고 오로지 알바 공 혼자서만 병력을 보내 제압하자는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페드로 데라가스카(Pedro de la Gasca)가 파견되어 외교적인 능력으로 이를 해결하였다.
1546년 슈말칼덴 전쟁에 종군하여 황제와 함께 군을 지휘하였다. 1547년 4월 24일에 뮐베르크 전투에서 1천여 명의 후사르와 화승총병 450명을 이끌고, 재빨리 여울목을 건너면서 롱 머스킷 사수들에게 엄호하도록 시켜서 신교도군의 파수병을 쫓아냈으며, 우익 기병대를 맡아 돌격하여 신교도군의 좌익을 전멸시켰다.
1548년에는 펠리페 2세가 후계자임을 알리는 궁정 예식을 주관하였으며, 펠리페의 가솔과 일정을 총괄하여 관리하는 고문관의 자리에 올랐다. 1551년에는 아들인 돈 파드리케를 카르도나 공작의 딸인 기오마르 데 아라곤과 결혼시켰으며, 1552년에 작센 선제후인 모리츠가 프랑스의 편에 서서 인스브루크를 기습하여 황제를 도주하게 만들자 황제의 명에 따라 프랑스를 징벌하기 위해 메츠를 공격하지만 실패했다.
1555년에 프랑스군이 이탈리아의 제국 영토들이 위협받자 이탈리아로 군사를 이끌고 갔으며, 그 와중에 보급 문제로 고전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것에 적대감을 가진 교황 바오로 4세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맞서 싸우려고 하자 로마로 진군하였다.
로마로 진군한 것으로 다급해진 교황이 휴전을 하지만 1557년 1월에 프랑스군이 휴전이 깨지고, 프랑스의 기즈 공작이 나폴리를 공격하자 수세로 일관하였다. 시에나에서 소수의 프랑스군을 격파하자 이들을 모두 교수형에 처하였으며, 1557년에 스페인군이 프랑스 북부을 기습하면서 교황령을 서서히 점령하였다.
결국 1557년 9월 27일에 교황의 구걸로 평화 조약이 이루어졌으며, 나폴리의 부왕이 되었고, 1559년에는 국내의 신교도들을 탄압하기 위해 프랑스와 카토캉브레지 화약을 체결했다.
1566년에 플란데런의 혼트슈테 교회를 칼뱅주의자들이 습격하여 성상 파괴 운동이 벌어지자 1567년에 8월 22일에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브뤼셀에 주둔하였다. 또한 플란데런의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종교 재판소를 설치해서 에흐몬트 백작, 호른 백작 등이 처형되었고 9,000명이 이단 혹은 반역으로 선고되었다.[3] 이 재판은 피의 법정(Bloedraad)이라 불렸으며, 알바 공작은 강철 대공이라는 악명을 떨치면서 이에 항거한 빌럼 1세를 몰아냈다.
이 일과 함께 각종 무거운 세금과 압정으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유발하였으며, 1573년에 반란군이 점령한 알크마르를 공격했지만 실패하였고, 10월에 레이던을 공격하였다가 빌럼 1세가 구원하자 모케르헤이더에서 빌럼 1세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했다.
1573년에 본국으로 소환되었다가 1574년 6월에 다시 레이던을 공격하였지만 저항이 매우 거셌다. 빌럼 1세의 수공으로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철수하였다. 1579년에 왕의 미움을 받아 추방되었다.
1580년에 포르투갈 합병을 위해 다시 부름받아 군대를 이끌고 리스본으로 출병하여 기습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1582년에 리스본에서 사망했다.
3. 매체에서
3.1. Carlos, rey emperador
스페인의 사극 Carlos, rey emperador에서 등장한다. 초반에는 이방인인 카를로스를 받아들이지 못하나 할아버지의 일갈을 듣고 점차 카를로스를 군주로 받아들인다. 후반부로 가면 카를로스의 최고 충신을 자처하고 펠리페 2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3.2. 게임 대항해시대 온라인의 등장 인물
대항해시대 온라인 에스파냐 이벤트의 등장인물. 포르투갈, 잉글랜드, 네덜란드 이벤트에도 나온다. 모델은 항목 1의 인물.알바 공은 에스파냐의 군권을 가지고 있는 재상이며 발바리아 해적과 네덜란드 독립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두 문제 중 네덜란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보고 있어서 발바리아 해적의 수장 하이레딘과 접촉해 분쟁을 종식하고 발바리아 해적을 맡은 흑고래 용병 함대를 네덜란드로 보내 처리하려고 한다.
에스파냐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잉글랜드에 대해서는 스파이를 파견하고, 잉글랜드 해군의 지휘권을 가진 킬링류 백작을 회유하여 잉글랜드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든다.
하지만 흑고래 용병 함대 대장인 발타자르 올리베이라의 똥고집 때문에 알바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지못미.
발바리아 해적은 알바 공의 의도와는 달랐어도 어쨌든 발타자르와 디에고가 처리를 해줬지만 네덜란드 독립은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숨겨둔 딸(...) 이네스는 바다 여단과의 싸움 도중 전사하고 만다.
킬링류 백작을 통해 잉글랜드를 집어삼키려던 계획도 잉글랜드 해군 장교 라이자 미들튼의 민폐에 가까운 활약으로 쫄딱 망하고 만다.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악역이기는 하지만 알바 공으로서는 국내외에 산적한 여러 가지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상당히 노력한 것인데... 주인공 보정 앞에서는... 지못미.
[1] 알바 공작가. 참고로 이 공작가도 성씨가 여러 번 바뀌었는데 톨레도-실바-피츠제임스 스튜어트이다. 참고로 피츠제임스 가문은 영국의 제임스 2세의 사생아 가문이다.[2] 펠리페 2세와의 서신을 보면 알바 공작 또한 네덜란드 반란의 수준이 단순히 군대를 보내 때려잡는 정도로는 진압될 수 없다는 것 자체는 이해하고 있었다.[3] Israel, J.I. (1995), The Dutch Republic: Its Rise, Greatness and Fall, 1477-1806,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0-19-873072-1 (hardback); ISBN 0-19-820734-4(paperback), pp. 156-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