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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colcolor=#fff> 신재호 | |
<colbgcolor=#5196D2> 개명 전 이름 | 신동엽[1] |
출생 | 1977년 ([age(1977-01-01)]세) |
학력 |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 중퇴) |
데뷔 | 2004년 영화 '내 사랑 싸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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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영화감독.2. 성향
작품 활동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데뷔작인 내 사랑 싸가지[2]를 제외하고, 2024년 현재까지 단 한 번도 상업적 성공을 거둔 적이 없다.이로 인해 존재 자체가 충무로 최대의 미스테리이자, 대한민국 영화계의 우베 볼로 평가되고 있다.[3] 모든 작품이 평가도 나쁘고 흥행조차 실패했음에도 끊임없이 영화를 찍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영화계에서는 제아무리 잘나가던 감독이라도 흥행에 실패하면 투자를 못 받아서 한동안 재기하지 못하거나, 심하면 아예 현장에서 밀려나는 경우가 잦다.[4] 그런데 다른 영화 감독이었다면 필모그래피에 치명타를 입고 다시는 영화계에 얼씬도 못 할 졸작들을 다수 감독했음에도, 끊임없이 새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 각종 영화 커뮤니티에서 미스터리로 회자된다. 심지어 몸값 싼 무명 배우들을 기용해서 저예산 독립영화를 찍어내는 것도 아니고, 임창정[5], 양동근, 오지호, 이정진, 최다니엘, 이경영 등 인지도 높고 연기 실력도 좋은 배우들을 주연으로 기용하는데 말이다. 영화 커뮤니티에서는 집이 금수저라느니, 석유왕이라느니, 투자자를 꾀는 말빨이 장난이 아니라느니 하는 비웃음 섞인 괴소문이 돌고 있지만 그 실체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인터뷰를 보면
사실 그 해답은 의외로 복잡하지 않으며, 영화시장의 구조에 기인한 것이다. 여느 나라의 영화 시장이 대개 그렇듯, 충무로도 텐트폴 무비나 블록버스터만 있는 것이 아닌 VOD 시장을 주로 노리는 B급 무비 시장이 존재하며 따라서 그런 영화를 주로 찍는 삼류 감독들에 대한 수요도 존재한다. 이런 영화들은 근본이 근본이다 보니 제작비를 싸게 후려쳐서 수익 비율을 올린다. 예컨대 제작비(마케팅 비용 포함) 1억 원에 극장 티켓, VOD 판권 시장 수익이 1억 3천만원이라고 가정하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3천만 원의 수익을 달성한 것이다. 신재호가 딱 이런 케이스여서 최소 제작비로 수익성이 어느 정도 담보된 프로젝트만을 기획한다. 그래서 신재호의 영화 개봉 인터뷰들을 보면 영화 내용 이야기는 없이 허구헌 날 제작비 타령만 해 대는데, 바로 이런 수익 구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싸구려 삼류 영화 시장에서 조용히 살면 별 주목도 받지 않았을 위인인데, 자꾸 자기 주제에 맞지도 않는 메이저 영역에 집적거리니 비웃음과 어그로를 받고 있는 것이다.
실력이 개판이면 최소한 인성이라도 괜찮아야 하는데, 배우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최악인 것으로 보아 인간 됨됨이도 영 아닌 모양이다. 임창정의 발언 웃긴 것은 임창정은 이런 발언을 해 놓고서는 정작 신재호의 차기작 게이트에 또 출연했다가 말아먹고 필모그래피도 다 망가뜨렸다.
영화를 빠르고 싸고 엉성하게, 그리고 많이 찍어낸다는 점에서 수준이 비슷한 졸작 전문 영화감독 남기남과 비교되기도 한다.[6] 다만 시네필들 사이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남기남과 신재호를 도매금으로 엮는 것은 남기남에게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평이 다수다. 남기남이 주로 활동하던 1970~80년대의 한국은 지금보다 훨씬 빈곤했고, 따라서 문화예술에 대한 투자 역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했으며 영화 제작에 대한 사회적 경험 역시 일천했기에 그런 점을 감안하여 영화의 만듦새가 조잡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면죄부가 주어질 수 있는 환경이었다. 반면 신재호의 경우 남기남 때보다도 영화계가 기술적으로나, 문법적으로나 훨씬 발전된 세대에서 감독 일을 시작한 양반인데도 그와 영화 수준이 비교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7][8]
배우 캐스팅도 무분별하게 하는 것으로 악명높다. 2018년 개봉 예정이라는 <전학생>이라는 이름의 신작을 촬영 중일 때 캐스팅된 배우 중 한 명이 바로 VOCALOID 시유의 성우이자 이병헌을 협박했던 범죄자이다. 이 작품은 개봉 소식도 없다.
무려(?) 열 번째 연출작품인 판타지 스릴러 영화 <인드림>으로 2022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메탈누아르 섹션에 공식초청되었다.
3. 평가
"기록, 7번째 습작" - 박평식
"막무가내 연출도 한두번이지" - 박평식
"아이들을 얕보지 말라니까" - 박평식
"누가 누군지 확인하는 재미만 있다" - 장영엽
"최순실이 최서원으로 개명해도 최순실이듯, 신동엽 감독이 신재호로 이름을 바꿔 달아도 DNA는 바뀌지 않는다." - 정시우
"누구를 향한 응징입니까" - 윤혜지
이렇듯 평론가들은 신재호에 대해 걱정과 조소 수준의 참담한 평론을 남긴다. 주제의식, 내러티브, 구성, 앵글, 진행 등 거의 모든 영화적 장치에서 "독창적인 취약함"을 드러낸다는 평이다.
특이하게도 이용철 평론가는 신재호에 대한 나름의 애정을 갖고 있는 듯 하다. "나쁜 세상, 그들은 미쳐야 했다.(치외법권, 6점)" 등 이상하게 좋은 평가를 내렸다. 그런데 이는 이용철도 괴짜 평론가라서 충분히 이해가 가는 행태이다.
3.1. 재평가?
개막장 스토리라고 생각했던 제가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감독님 죄송합니다. 이 때 당시 하고싶으셨던 얘기가 있었을 텐데 무지한 저희들은 매도하고 무시했었네요.실화를 바탕으로한 영화라고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더 흥했을텐데요... - sldkfh12
일주일 전만 해도 한국 관객들의 일반적인 생각은->"내부자들 정도는 돼야 개연성 있는 고발물이지 이 영화는 스토리 ㅎㅌㅊ" 하지만 한국 사회의 실제 수준은-> 딱 이 영화랑 싱크로율 백프로! - 다른 세계
2015년 개봉한 영화 <치외법권>에서의 쌈마이스러운 한국 사회상 묘사가, 하필이면 이듬해 터진 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일부에서는 재평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개 사이비 교주에 의해 온 사회 기득권이 놀아나는 코믹하고도 허술한 묘사가 웃음을 자아냈으나, 하필이면 역대급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극도로 리얼한 묘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신재호가 정말로 그 사건을 미리 알고 영화를 촬영했을 리는 없고, 그저 단순한 우연일 뿐인데 시의적절한 시점에 사건이 폭로된 덕에 재조명된 케이스다. 물론 어디까지나 농담조로 띄워 주는 것일 뿐이지, 영화의 완성도가 형편없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므로 영화 커뮤니티에서도 반짝 하고 묻힌 밈이다.
그리고 자기도 그런 재평가(?)에 내심 신이 났는지 최순실을 소재삼아 게이트를 만들었다가 다시 망했다.
4. 필모그래피
신재호 감독 장편 연출 작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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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부를 맡았던 <기막힌 사내들>과 원안을 맡은 <동감>을 제외하고 본격적으로 각본, 연출에 참여한 영화들의 평점이 확연하게 낮아짐은 물론 데뷔작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상업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적이 없다.
년도 | 제목 | 역할 | 평점 | 비고 | |
네이버 영화[9] | 왓챠 | ||||
1998년 | 기막힌 사내들 | 연출부 | 7.82 / 없음 | 3.0 | |
2000년 | 동감 | 원안 | 9.00 / 없음 | 3.6 | |
2002년 | 유아독존 | 각본 | 4.37 / 없음 | 1.9 | |
2004년 | 내 사랑 싸가지 | 연출, 각본 | 4.72 / 없음 | 2.1 | 첫 연출작 |
2007년 | 못말리는 결혼 | 각색 | 6.45 / 3.00 | 2.5 | |
2009년 | 4교시 추리영역 | 각본 | 5.05 / 2.67 | 1.9 | |
2010년 | 서유기 리턴즈 | 공동제작, 연출, 각본 | 5.91 / 2.00 | 1.9 | |
2012년 | 웨딩스캔들 | 각본, 제작, 기획, 연출 | 5.44 / 3.92 | 2.0 | |
2013년 | 응징자 | 각본, 연출 | 6.12 / 4.00 | 2.4 | |
2014년 | 따라지: 비열한 거리 | 각본, 연출 | 5.72 / 없음 | 1.9 | 총 유료관객수 11명[10] |
2015년 | 치외법권 | 각본, 연출 | 5.98 / 4.83 | 2.8 | |
2016년 | 대결 | 연출 | 5.95 / 4.56 | 2.2 | |
2018년 | 게이트 | 연출 | 3.79 / 3.00 | 1.7 | |
2019년 | 응징자 2 | 연출, 각본 | |||
2022년 | 리미트 | 각색, 제작 | |||
2023년 | 인드림 | 연출 |
5. 기타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의 강좌 "지적재산권법"의 온라인 강의에 게스트로 등장한다.
6. 관련 문서
[1] 2017년 현재 이름으로 개명하였다.[2] 물론 영화의 평가는 이후의 작품들과 다를 바 없는 졸작이다. 그러나 당시의 B급 인터넷 소설 원작 러브코메디 붐을 타고 전국 관객 151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에는 성공했다. 영진위 통합전산망이 없던 시절이라 현재 스코어는 서울관객만 반영되어 사람들이 실패로 인식하는 듯하다.[3] 사실 신재호는 우베 볼보다도 더 심각한 인물이다. 우베 볼도 게임 원작 영화를 비롯한 온갖 졸작들로 악명이 높은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최소한 평작 정도는 되는 램페이지 시리즈를 만든 바 있고 현재는 은퇴한 상태라 더 이상 관객들의 눈을 버릴 일은 없다. 그에 반해 신재호는 제대로 된 필모그래피가 아예 없는데도 불구하고 현재진행형으로 영화를 연출하는 중이다.[4] 평론가들의 평이 굉장히 좋거나 매니아 관객층이 있다면 장준환 감독처럼 복귀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장준환 감독은 감독 입봉작인 지구를 지켜라!가 너무 큰 흥행 참패를 겪었을 뿐이지, 작품성은 매우 높게 평가받았으며 신인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실력도 인정받은 탄탄한 인재다. 그리고 복귀한 이후의 작품들인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와 1987은 평가와 흥행 모두를 휘어잡은 화제작이었다. 애초에 신재호 '따위'와 비교 대상이 될 인물이 아니다. 그리고 장준환은 복귀하는 데 10년이나 걸린 데 반해 신재호는 무려 다작이다. 오랜 기간 동안 영화계에 발을 들이지 못했던 장준환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속터질 일이다.[5] 신재호와 엮여서 가장 피본 케이스다. 가수 활동뿐만 아니라 배우로도 준수한 커리어를 쌓아 오다가, 계속 신재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믿고 거르는 배우 취급을 받으며 필모그래피를 완전히 망쳤고 슬럼프에 빠져 결국 2018년에 5년 동안 연기 활동을 중단하고 자숙하겠다는 선언까지 해 버렸다.[6] 실제로 신재호도 <서유기 리턴즈> 같은 아동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7]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기남의 영화는 '예술 작품'으로서야 전혀 가치가 없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으로는 어느 정도 기능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대표작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 같은 경우 제대로 된 극장에서 상영하지 못하고 주로 어린이회관에 걸리긴 했지만 어쨌건 서울 43만, 전국 180만 관객설까지 나오면서 당해 한국 영화 흥행 1위까지 찍은 물건이다. 말하자면 70~80년대의 한국이 빈국의 대열에서는 슬슬 벗어나 본격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서민~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문화 상품에 대한 수요도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 본격적이고 질 좋은 문화 상품을 생산하기에는 이들이 지불할 수 있는 비용의 규모가 작았다는 특수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남기남이 활동하던 당시의 한국 사회는 '싸구려라도 잠시 즐길 수 있는' 문화 상품을 요구하고 있었고, 남기남은 이 요구에 부응하여 싸구려 양산형 영화를 마구 찍어냈으며 그 작품들이 사회의 유흥거리로 작동하였다. 그런데 신재호에게는 이러한 '역사적 당위성'이 없다.[8] 다만 남기남도 과거라면 몰랐을까 경제적/기술적으로 엄청나게 풍요로워진 21세기 이후로도 계속 활동했으면서도 타성에 젖은 채 전혀 발전 없이 저질 영화만 계속 찍어냈고, 그 때문에 자신의 장점이었던 상업성조차 상실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긴 어렵다.[9] 네티즌 평가 / 평론가 평가[10] 이는 한국 상업영화 중 최저 기록으로, 독립영화까지 포함하면 가장 낮은 유료 관객 영화는 《애비》 (6명)가 된다.[11] 엄근진한 고소 경고라기보다는 다소 유머를 섞은 뉘앙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