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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2년 6월 25일 |
충청북도 청주군 가덕면 인차리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 | |
사망 | 1947년 2월 2일 (향년 45세) |
중화민국 눈강성 치치하얼시 | |
이명 | 신영호(申榮浩, 申鍈浩) 또는 신횡호(申鐄浩) |
자 | 범일(範一) |
본관 | 고령 신씨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82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부모 | 아버지 신정식, 어머니 연안 이씨 이정희 |
자녀 | 딸 1명[1] |
친인척 | 사위 외손자 배성우, 배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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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호의 공식 초상화 |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배성재와 배성우의 외할아버지이다.2. 생애
신영호는 1902년 6월 25일 당시의 충청북도 청주군 가덕면(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신정식(申正植, 1883 ~ 1918. 11. 16)과 어머니 연안 이씨 이정희(李正熙, 1883 ~ ?. 11. 6) 사이의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경성 중앙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를 입수한 그는 충청북도 책임자의 사명을 띠고 귀향한 뒤 3월 9일 청주공립농업학교 기숙사로 가서 학생들에게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을 알리고 청주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제의해 찬성을 얻어냈다. 이후 독립선언문과 경고문 등을 제작하고 인쇄하는 등 거사준비를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했으나 5월 5일 경성복심법원과 5월 3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각각 기각되어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 2월 21일 가출옥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은거하다 1947년 2월 2일 중화민국 눈강성 치치하얼시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신영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3년 10월 13일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