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5:26:45

국제차량제작 시발

시발(자동차)에서 넘어옴
파일:kukje.png
파일:ARCHIVE_FILE/02/C/CET0030807/200200040688/000000000001/000269/02200804231204351000000000462637_00001.jpg
시발
ㅅㅣ-ㅂㅏㄹ
시발 (찦) 승용자동차
國際車輛製作 始發
Gukjae Sibal/The Start Taxi
1. 개요2. 역사3. 명칭에 대해4. 복원(리스토어)5. 시발 시리즈
5.1. 시발 세단5.2. 시발 디젤 버스5.3. 시발 픽업트럭
6. 제원7. 기타8. 미디어
8.1. 영화/드라마8.2. 예능/텔레비전 프로그램8.3. 공연
9. 모형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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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휴전 직후인 1955년, 국제차량제작 주식회사가 미군이 폐기한 윌리스 MB 지프를 해체한 뒤 부품을 재활용, 조립해 만든 SUV 타입의 자동차로, 대한민국에서 생산된 최초의 자동차이다.[1][2] 21세기의 자동차에 비추어 보면 소위 '영운기' 수준의 사제 차량이라고 할 수 있지만 1950년대 당시 법제상으로는 엄연히 상용차로 인정받았으며, 1963년까지 약 3천여 대가 생산, 판매되었다.

이 차량의 정신적 후속작이라고 할 차량이 KGM 코란도이며, 이는 1세대 코란도 차량의 역사가 마찬가지로 윌리스 MB의 민수 버전인 지프 CJ-5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갤로퍼의 원본인 미쓰비시 파제로도 윌리스 지프 베이스로 시작 했으므로 한국과 지프차는 돌고돌아 기묘한 인연인 셈이다.

2. 역사

버려진 미군 지프를 가져다 만들었기 때문에 디자인이나 플랫폼, 파워트레인이 윌리스 MB와 같다. 그리고 워낙 열악한 환경에서 차를 만들다 보니 초기에는 천막에서 생산했을 정도이고 제작 기간도 수개월이 걸릴 정도였다.

엔진의 경우 함경도 아바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영삼이 주도해서 제작했다. 미군 폐차 부품이 떨어져 가는 상황이 되자, 당시 국제차량제작의 최무성 사장에게 엔진 국산화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여 대한민국제 엔진 제작이 추진될 수 있었다. 미제 엔진을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한 끝에 1955년 대한민국제 엔진 제작에 성공했다. 놀랍게도 전통적인 대장간 거푸집 주조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열처리 문제 때문에 엔진이 파손되는 시행착오를 10번이나 반복한 끝에, 열처리 방법을 터득하여 11번째 시도에 성공했다. 4시간 연속으로 엔진을 고속으로 작동시켜보는 방식으로 성공을 확인했다. 1954년 대한민국제 엔진 제작을 시작한 지 1년 만이었다.[3] 자사의 자동차 부품들이 멋대로 활용되고 복제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미국 자동차 회사 관계자가 시발차 공장에 와서 엔진 만드는 광경을 보고 뜻밖의 의미로 경악했다고. 그래서 그는 "당신들 정말 대단하군요. 하지만 이런 짓은 당장 그만둬야 할 겁니다." 라면서 찬사와 경고를 해주고 갔다고 한다.[4]

현대자동차의 현대 포니 엔진 국산화를 담당했던 <포니를 만든 별난 한국인들>의 저자 강명한에 따르면, 서울대 기계공학과 2학년 재학중에 영등포 시장 근처의 삼성공업사에서 실습을 했는데 당시에 시발자동차 엔진을 제작했었다고 한다. 청량리의 주물공장에서 엔진 블록을 만들고 삼성공업사에서는 블록을 드릴링, 보링하여 완성했다고 한다. 실습 이후 자신이 시발자동차 제작에 일조했다는 뿌듯함에 시발 택시를 탈 때마다 운전기사에게 대한민국제 엔진 성능이 어떤지 넌지시 묻고는 했다는데 출시후 두어 달 되면 힘이 다 빠진다고 불평을 듣기 일쑤였다고 한다. 보통 중고 미군 지프차 엔진을 구해서 바꿔 달았다고.[5] 엔진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정밀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며, 6.25 전쟁 직후 열악한 환경과 부족한 기술에서도 대장간에서 복제에 성공한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1955년 8월 출시 당시 이 차량은 최초에는 인지도가 낮고, 유선형의 다른 자동차와는 달리 사각형의 투박한 디자인인지라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6],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10월에 개최한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출품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이 시발자동차는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인지도가 대폭 상승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이 차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오히려 상류층에서 더 인기가 있었다. 심지어 시발차를 생산하기 위해 주문자에게서 받은 돈만 1억 환이 넘었다고 하며(당시 판매가는 약 90만 환)[7], 시발차를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팔려고 시발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 후 1962년에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에서 닛산에서 개발한 자동차인 블루버드와 동일한 부품을 수입해서 생산한 '새나라'가 등장하면서 시발차는 새나라에 비해 품질, 디자인, 성능 등에서 밀리다 보니 판매량 저하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시발차는 약 3,000대가 넘게 팔린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에서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시발택시가 현역으로 운용되었다. #

3. 명칭에 대해

이름은 始發, 즉 시작한다는 뜻으로, 최초로 자국산 기술로 자동차를 만든 것을 기념하자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식 상표는 'ㅅㅣ-ㅂㅏㄹ'. 모음 길이를 구별하던 시대라 그런지[8] 그냥 '시발'이 아니라 '시-발'이라고 하이픈을 넣어서 쓴다. 이래도 감이 안 온다면 똑같이 창세, 시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제네시스를 떠올려 보자. 확실히 좋은 뜻이긴 하다. 물론 이 당시에도 시발은 욕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에, 이름을 왜 이렇게 상스럽게 지었냐는 식의 문의를 많이 받거나 농담거리로 종종 통용되었다.

라디오 광고도 있는데, 로고송은 다음과 같았다.
시발, 시발, 우리의 시~발 자동차를 타고 삼천리를 달리자~ 시발, 시발, 우리의 시~발 자동차를 타고 종로 거리를 달리자~
아쉽게도 이 로고송은 악보와 음원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당대 세대들의 구전에 의존해야될 따름이다. 해당 영상[9] 작곡가는 2004년 작고한 황문평이다. 전영선 소장의 인터뷰에서도 언급되지만, 그 당시에도 시발이라는 말의 어감 때문에 아이들이 이 로고송을 부르고 다니는 것을 들은 어머니들이 어디서 그런 욕지거리를 하고 다니냐며 야단을 치는 해프닝이 종종 있었다는 모양이다.[10]

영문 이름도 있는데 시작을 의미로 'The Start TAXI' 로 작명했다. 한국어 상표나 기업은 보통 한국어로 읽은 발음을 그대로 영어로 쓰는데, 시발자동차는 '시발'을 발음 그대로 쓰지 않고 그 단어의 의미인 'Start'로 바꿔썼다. 근데 위키피디아 등 사이트에선 sibal car라고 한다.

4. 복원(리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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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55_Kookjea_Sibal_White_(1).jpg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이 복원한 시발
안타깝게도 실제 생산할 당시의 차는 현재로서는 단 한 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미관 유지 및 새로운 자동차관리법의 시행으로 남아있던 시발 차량은 1968년 이전에 모두 폐차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시발 차량의 폐차를 알리는 신문기사.[11] 또 차량의 품질도 상당히 좋지 않았다. 즉 남아있는 거라고는 죄다 재현품.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에 2대[12], 제주도 세계자동차박물관에 1대가 전시 중이다. 자동차 대여 업체인 금호상사에도 한 대가 있다. 광화문광장 옆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도 1대 전시되어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당시 제작자의 증언 등이 있어 재현은 온전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 시대가 시대인지라 흑백사진뿐이라 도색을 못할 뻔했는데 다행히 했다. 제작자의 증언에 따르면 에탄올 버전도 만들려 했다고 전해졌다.이게 바로 시발차, #2

2019년 12월, 보배드림에 방치된 시발자동차의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이 찍힌 곳은 대전에 위치한 정일모터스라는 정비공장 옆이다.[13] 하지만 이 차량은 1993 대전 엑스포 당시 전시된 재현차량이다. 즉, 오리지널이 아닌 레플리카.

야인시대 107화에서도 복제품이 잠깐 나온 바 있다.

5. 시발 시리즈

5.1. 시발 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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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9월 10일 대한뉴스 제130호 - 국산 시발 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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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세단
디자인은 1956년식 플리머스 벨베디어나 동시대의 머큐리 몬터레이를 참고한 모양이다. 형태만 보면 어찌 왜건처럼 생겼다.

대한뉴스에 따르면 국제차량제작소에서는 파생 모델로 세단을 제작해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이 차량은 9인승으로[14] 월 100대까지 생산이 가능했으며 천장이 낮은 것을 빼고는 미제 승용차와 비교해도 뛰어나다고 설명됐다. 말이 세단이지 현대 기준으로는 MPV 계열에 가깝다 볼 수 있다. 천장이 낮은 걸 빼면. 시발 계열의 자동차 부품들은 자체 제작되어 국산화를 60프로까지 달성했다고 한다. 심지어 엔진도 미국산 엔진을 복제해서 주물로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엔진 도사로 불리던 김영삼이 이 회사에서 일했었고 윌리스제 직렬 4기통 2.2리터 고데빌 엔진을 복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최고속도는 130km/h 이었다고 한다.

가격은 (당시 가치로) 270만 환. HLKZ-TV 방송이 시작된 1956년 기준 가장 비싼 TV가 470000환이었고, 당시 전체 농가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던 영세 농가 연소득이 270000환이었다는 것을 볼 때 팔릴 리가 없는 초고가였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가격이 더럽게 비쌌던 것을 넘어 당시 급격한 자동차 증가로 석유 파동을 우려한 이승만 정부가 1957년 5월 8일 자동차의 수를 제한하는 긴급조치를 발동하면서 시발 세단의 생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여파로 판매량도 상당히 저조했으며 남아있는 차량도 단 한 대도 없고 복제품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5.2. 시발 디젤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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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RCHIVE_FILE/02/C/CET0031319/200200043540/000000000003/000269/00000001.jpg
시발디젤버스

시발차를 만든 국제차량제작소는 이 사진처럼 버스도 제작했다. 명칭은 시-발듸-젤뻐쓰. 하체는 폐차된 미군 군용트럭의 것을 이용했으나, 엔진은 이스즈의 DA120 6,126cc 125마력 디젤 엔진을 사용했으며 국내 최초로 디젤 엔진을 사용한 버스였다. 그러나 발매했던 시기가 1961년 10월 30일이라서 얼마 안 가서 새나라 자동차에 밀리게 되었던 끝물 시기였다. 사실상 가장 마지막으로 발매한 모델이며 생산 대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15]

5.3. 시발 픽업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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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g_2011215102831.jpg
시발픽업
시발 픽업트럭도 만들었지만, 단 2대만 생산되었다. 이유는 당시 시발과 시발 세단의 인기가 높아서 상대적으로 수요가 없었던 픽업을 굳이 대량 생산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시발픽업보다 훨씬 힘도 좋고 적재량도 많아서 강원도 험지도 잘 굴러다니는 미군 CCKW가 민간에 마구 불하되고 있었기 때문에 화물작업에서 굳이 조그마한 픽업을 쓸 이유도 없었다.[16]

6. 제원

SUV 기준이다.
시발
<colbgcolor=#002e6b><colcolor=#ffffff> 생산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차량형태 2도어 소형 SUV
승차인원 6명
전장 3,378mm
전폭 1,560mm
전고 1,730mm
축거 2,135mm
공차중량 1,500kg
타이어 규격
구동방식 파트타임 4WD
전륜 현가장치 리프 스프링 서스펜션
후륜 현가장치
전륜 제동장치 드럼 브레이크
후륜 제동장치

7. 기타

  • 생산 당시 시동방식이 앞 범퍼 구멍에 시동핸들을 삽입하여 돌려서 시동을 거는 크랭크시동 방식 이였다.[17]
<colcolor=black>
파일:cival motors-1.jpg
파일:cival motors.jpg
초기형 시발[18] 후기형 시발[19]
  • 시발자동차를 생산하면서 차체 설계에 관한 노하우가 쌓였는지, 초창기에 제작된 시발차에 비해 후기에 제작된 시발차들은 차체에 전체적으로 곡선이 들어가고 일부 장식이 추가된 디자인을 하고 있다.[20]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면 관련된 사진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 당장 위의 시발 디젤버스와 시발 픽업의 디자인을 보면 확실이 시발에 비해 깔끔하고 세련되었단 걸 알 수 있다.
  • 필리핀에도 이 차처럼 군용 지프를 개조해서 만든 대중 교통수단인 지프니가 있다. 이쪽은 아직도 현역이다.[21]
  • 항공기 판으로는 해취호가 있다. 사실 대한민국의 극초기 개발 항공기들은 죄다 추락하거나 어디서 주워온 외국제 부품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항공우주 기술이 그만큼 수준높은 기술이다.
  •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최병조 명예교수(1953년생)의 회고에 의하면, 어릴 때 놀다가 시발택시에 치인 적이 있다고 한다.[22] 회고담에서 "시발택시"라고 명확히 진술하는 것을 보면, 그 시대의 한국인들에게 확실히 네임드 차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오원철이 박정희에 의해 공무원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여기에서 공장장으로 일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방산산업과 각종 민수산업이 나름 효율성 있게 돌아가도록 한 현실 경험을 쌓을 수 있던 것이며, 시발자동차가 한국현대사에 아직도 가려진 의의가 많다는 뜻이다.
  • 품질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울퉁불퉁한 도로를 지나가면 유리창이 깨졌다는 말이 있다.
  • 시발자동차 생산 당시 테스트라고 해봐야 기껏 주행 테스트[23] 밖에 없었고 오로지 잘 달리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 때문에 안전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때문에 한번 교통사고가 나면 차체가 심하게 찌그러졌다고.

8. 미디어

대한민국의 초창기 자동차 역사를 연 상징적인 모델 답게 해방 초창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자주 등장한다. 단, 상기한 실물의 부재 때문에 미디어 작품들에 등장하는 시발자동차들은 자료화면이나 당대에 제작된 작품이 아닌 이상 전부 복제품 차량이다.

8.1. 영화/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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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에서 등장한 국제차량제작 시발
배경 차량으로 간간히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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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청춘에서 등장한 국제차량제작 시발
매우 드문 픽업 모델이 스쳐가듯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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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수사반장시발택시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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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수사반장서장시발차.jpg}}} ||
파일:수사반장시발차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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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반장 1958에서 등장한 국제차량제작 시발
택시나 자가용 등 배경 차량으로 자주 등장한다. 종남서장도 자가용으로 검은색 시발차 한대를 보유하고있었으나, 서호정이 건물 밖으로 던진 다이너마이트 때문에 박살났다.

8.2. 예능/텔레비전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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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센스에서 등장한 국제차량제작 시발
자동차 수집가의 컬렉션(금호상사)에서 복제품 차량이 등장했다. 자동차 애호가유재석은 이 차를 보고 반가워 했는데, 제시는 이때 시발 자동차라고 말하는 유재석을 향해 "왜 재석오빠는 시발 되고, 나는 왜 시발 안 돼요?"라며 따졌다.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제시의 입장에서는 찰진어감이 비슷한 욕설을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8.3. 공연

  • 명동로망스
    뮤지컬의 넘버 중 하나인 '새로 피어나다'의 소재다.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노래한 것이라 노래 내내 '시발'을 외친다.중간엔 진짜 욕인 시바가 나온다.

9. 모형

모형화된 제품은 전무하다. 박물관 전시용 모형이 수작업으로 만들어졌을 뿐 양산되는 제품은 없다. 클래식카들을 비롯한 옛날 차량들 중 모형화된 차량들이 많은 걸 생각하면 의문이 생길 수도 있는 부분.

용인에 위치한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에서 기념품으로 판매하는 완구가 유일하다. 2024년 2월 기준 가격은 6,000원으로 가격대가 저렴한지라 바디가 플라스틱이고 문열림 기능이 없는 통짜여서 모형이라고 하기엔 초라한 수준이다. 그래도 완구 특유의 귀여움이 느껴진다. 1970년대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파는 듯한 느낌의 케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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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카데미M151A2.jpg
모형으로 재현하려면 아카데미과학M151A2 하드탑 트레일러 지프를 구매하여 도색만 다르게 하면 된다. 단 M151A2 무트 지프는 윌리스 MB 지프 다음 모델로 6.25 전쟁이 끝나고 나온 모델이다. 윌리스 지프의 부품을 모아서 만든 시발을 얼추 흉내만 내는 수준.[24] 다만 2000년대 초에 생산된 제품이라 2023년 기준으로 현재는 구입하기가 쉽지 않다.

3D 이노 메탈로 재현된 금속모형도 있는데 완구용보다는 장식용에 비중이 크기 때문에 문열림기능과 바퀴구동기능이 없다. 색상이 실차 그대로 재현되어 비교적 디테일이 뛰어나지만 조립 난이도가 높은 편이다. 조립시간을 넉넉히 잡았을 때 3~4시간 소요된다. #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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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단 시발 세단
픽업트럭 시발 픽업
버스 시발 듸젤 뻐스
}}}}}}}}} ||



[1] 최초의 '고유모델' 자동차는 1975년의 현대자동차의 포니다.[2] 한반도 전체로 본다면 3년 정도 늦지만 북한에서 1958년에 한반도 최초의 자체 생산 상용차승리 트럭 시리즈를 발표했다. 그리고 최초 생산 모델인 승리 모델은 시발 자동차와 같이 거의 같은 연식 차량이지만 오늘날까지 북한에서는 무려 현역인 차량이다.[3] KBS 스페셜 - 빅 아이디어 (2부) 산업의 심장 편[4] 당시 수작업 엔진 제작에 대한 영상이 없으니 과정은 알기 어렵지만 아마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 실제로 한국도 당시에는 수작업으로 온갖 기계장치를 만들고 고쳤다.[5] <응답하라 포니원 - 포니를 만든 별난 한국인들> 24쪽[6] 폐차된 지프를 재활용하여 조립했고 차체 일부는 드럼통을 펴서 만들었다. 현역 당시 생산시기별로 디자인이 조금씩 달라서 완전히 똑같은 형태가 아니었다.[7] 1957년에도 영세 농가의 연소득이 27만 환이었다.[8] 진짜 이게 반영됐다면 당시에만 해도 그 욕과는 다른 발음으로 취급됐을 것이다.[9] 근데 이 영상 내용이 앞서 언급한 욕처럼 들렸는지 연령제한이 걸렸다.[10] 물론 로고송은 사라졌지만 본 자동차가 주제인 뮤지컬 명동로망스의 <새로 피어나다>를 통해 그 당시의 반응이 어떠하였을지를 예측할 수 있다.[11] 시발 차량의 경우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이 택시 등 상용모델로 팔렸기 때문에 정부 주도로 폐차를 강제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운용회사에 대한 보상은 주어졌다.[12] 그나마 실차에 제일 가깝다.[13] 신탄진쪽 대덕공단에 위치해있다.[14] 3열 배열이기 때문에 트렁크가 없다.[15] 이후 국제차량제작은 이스즈와 기술제휴로 당시 이스즈의 신형 버스와 트럭 모델을 들여와 라이센스 생산하려 했으나, 이 과정에서 무리하게 자금을 투자한 것이 화근이 된데다가, 이듬해 새나라자동차의 등장으로 인해 타격을 입고 결국 쓰러지게 되었다.[16] 이 당시 도시의 용달 수요는 아직까지 지게차리어카가 감당하고 있었고 60년대쯤 되면 유지비가 훨씬 저렴한 오토바이 엔진을 쓴 기아마스타 3륜차로 바로 넘어간다.[17] 다만 복제 차량은 원터치키 시동방식으로 제작했다.[18] 드럼통을 펴서 만들었기 때문에 디자인이 상당히 투박했다.[19] 뒤에 있는 차량들이 전부 시발 자동차다. 이름은 같지만 디자인이 서로 다른 이유가 각종 폐자동차 부품들을 재활용하여 개조했기 때문이다.[20] 사실은 폐 미제 승용차 부품들을 들여와서 개조한 것에 가깝다.[21] 특히 마닐라 쪽의 지프니가 시발차와 유사하다.[22] 서울대학교 법학, 제59권 제1호(2018), 18~19면[23] 말이 주행 테스트지 실질적으로는 동네 한바퀴 도는 시운전에 가까웠다.[24] 시발자동차 특유의 가로줄 그릴을 재현하기에는 오히러 무트 모형을 사용하는 것이 더 편하다. 지프 계열 차량들은 전부 세로형 줄무늬 그릴를 장착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