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시게노부 후사코(일본어: [ruby(重信房子,ruby=しげのぶふさこ)])는 극좌 성향의 테러리스트, 혁명가이며 적군파의 한 분파인 일본적군(JRA)의 수반이었다. 적군파의 여제/마녀[1]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1945년 9월 28일에 태어났다.2. 생애
1945년 9월 28일에 도쿄도 세타가야구에서 태어났다. 도쿄도립 제1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서 1년 근무하다가 1965년 메이지대학 야간부에 입학했는데 합격 통보를 받고 등록금을 내러 가다가 등록금 시위를 하던 학생들을 만났는데 한 시위대원이 함께 앉아 항의하지 않겠냐고 권유했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 시위대에 합류했다.[2] 그러다가 운동권에 합류했다.경찰의 추적과 감시, 조직원들의 체포로 일본에서 적군파의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조직이 와해된 상황에서 그녀를 비롯한 일부 간부들이 국제혁명근거지론(소위 P전략)에 따라 레바논을 통해 중동에 잠입하여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과 연계해 일본 적군을 결성했는데 아사마 산장 사건을 일으킨 것은 모리 츠네오를 중심으로 하여 아직 체포되지 않았던 일본 내 잔류 세력이었다.[3] 즉, 아사마 산장 사건이 일어날 때 그녀는 이미 팔레스타인에 잠입하여 PFLP와 합류한 상태였다. 본인은 아사마 산장 사건의 발생을 언론과 소식통을 통해 알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일본 내 잔류 세력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무장항쟁을 시작한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기뻐하였으나 경찰의 추격으로 궁지에 몰린 적군파가 잔혹한 내부 숙청을 거쳐 자포자기 상태에서 농성을 벌였다는 실상을 알게 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자서전에 기록한 바 있다. 특히 아사마 산장에서 농성하기 직전에 린치 살해된 십여명의 동료들 중에 일본에 있었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람도 포함되어 있어서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과 연대해 벤 구리온 국제공항을 습격하는 등 여러 테러 활동을 벌였는데 1975년에 국제 테러리스트로 수배되었을 정도다.
일본을 드나들다가 2000년 말에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되었고 감옥에 들어가면서 일본적군의 해산을 선언했으며 테러 혐의로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4]
시게노부 메이([ruby(重信,ruby=しげのぶ)]メイ) |
한국의 한겨레21에서 복역 중이었던 그녀의 인터뷰를 따낸 적이 있다. 링크
해당 인터뷰나 자서전격인 저서 '사과나무 밑에서 너를 낳으려 했다'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대체로 옳은 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고 상당히 반성적인 인물로 보이는 면모도 있으나 사실 그냥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국제수배된 테러리스트라는 걸 생각하고 읽으면 어조가 너무 담담하다. 뭐 어쨌건 그래도 일본 적군파 여간부 출신으로써는 가장 반성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3. 저서
りんごの[ruby(木,ruby=き)]の[ruby(下,ruby=した)]であなたを[ruby(産,ruby=う)]もうと[ruby(決,ruby=き)]めた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 |
예를 들어 과거 자신이 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자주 거론하는, 그리고 실제로도 시게노부 후사코의 행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벤구리온 작전' 같은 경우 특별히 정당성을 주장하며 옹호하고 변명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잘못한 일이라고 반성도 하지 않고 그저 '내가 젊었던 때 했던 사업이나 프로젝트 중에서 제일 크고 중요한 일' 정도로 담담하게 서술하는데 위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이건 정확히 말하면 '벤구리온 공항 습격사건' 또는 '벤구리온 공항 총기난사 사건' 이며 사상자가 무려 세자릿수로 나왔던 사건이다.
4. 어록
“억압받는 인민의 외침은 총 밖에는 없다! 우리들은 조국을 계속 빼앗겨 왔다. 세계는 평화를 논하고 무력 항쟁을 손가락질하겠지만, 가족과 형제가 죽어 가는 우리들의 생명에 과연 누가 눈물을 흘려 줄 것인가! 우리들의 휴머니즘에는 총밖에는 없다!”
시게노부 후사코,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 63페이지.
시게노부 후사코,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 63페이지.
왜 총을 쥐지 않을 수 없었나.
“총이야말로 남녀 노소를 평등하게 한다.”
나는 이것을 실감했었다. 어른이나 어린이도 총을 손에 들었을 때, 그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한다면 체력적 한계와 관계없이 적을 향해서 평등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총을 잡지 않으면 안 되나?
왜, 총을 잡을 수밖에 없나?
이런 물음 앞에 놓여지면, 딱히 뭐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되묻는다면, 강대국의 이기심, 돈이나 자본애 의한 지배 논리에 맞서기 위해서라고 결론을 내려본다.
사람을 다치거나 죽이지 않고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팔레스타인 해방에는 폭력이 힘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 있으며, 서방측과 대결할 수밖에 없는 문재가 산적해 있다. 강대국의 폭력은 깔끔하고 세련됐으며, 피를 보이지 않고 돈이 붙어 다니는 자본의 냄새가 난다. 민중의 무장 봉기는 증오에 찬, 피비린내 나는 행위가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미숙한 투쟁을 벌인 결과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피해자로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주변의 친구나 친척들이 폭력 앞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나도, 그 누구도 사람이 죽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억압당한 민중이 하는 말은 총 외에는 없다!”
나도 억압당한 팔레스타인의 이런 비장한 선언을, ‘옳다’고 여기며 행동 선언으로 받아들이고 아랍에서 투쟁해 왔다. 그리고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람들의 죽음과 삶, 사람들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슬픔에 수 없이 동참했다. 생명의 귀중함,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과 사람들 간의 관계의 소중함을 그 때마다 배우면서 살아왔다.
지금 우리들이 70년대 식의 무장 투쟁을 중지한 것은 UN에서 팔레스타인의 인정이라는 시대적 흐름도 있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서 보여진 생명의 소중함을 모든 투쟁에서 살리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와 나는 과거의 투쟁에서 사람을 다치게 하고 고통을 주기도 하고, 목숨까지 잃게 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그 피해자에게 깊게 머리 사죄한다.
과연 그때 추구했던 목적 하나하나를 실현할 수 있는, 무장투쟁 이외의 방법이나 형태가 과연 있었을까, 우리들의 부족함을 인정하고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다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아랍의 가치 기준이 보편적인 세계적 기준이 아닌 것처럼, 일본의 가치 기준 역시 보편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는 인간의 양심보다도 자본이나, 돈의 가치에 더 무게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 그것이다.
‘영웅’이 될지, ‘테러리스트’가 될지 우리들을 향해 내려지는 평가가 어떤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그들은 인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고 언젠가 우리를 이해해 주리라고 믿고 있다.
혁명가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사는 존재로 남고 싶다. 또한 참된 휴머니스트가 진정한 혁명가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시게노부 후사코,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 81~83페이지.
“총이야말로 남녀 노소를 평등하게 한다.”
나는 이것을 실감했었다. 어른이나 어린이도 총을 손에 들었을 때, 그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한다면 체력적 한계와 관계없이 적을 향해서 평등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총을 잡지 않으면 안 되나?
왜, 총을 잡을 수밖에 없나?
이런 물음 앞에 놓여지면, 딱히 뭐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되묻는다면, 강대국의 이기심, 돈이나 자본애 의한 지배 논리에 맞서기 위해서라고 결론을 내려본다.
사람을 다치거나 죽이지 않고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팔레스타인 해방에는 폭력이 힘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 있으며, 서방측과 대결할 수밖에 없는 문재가 산적해 있다. 강대국의 폭력은 깔끔하고 세련됐으며, 피를 보이지 않고 돈이 붙어 다니는 자본의 냄새가 난다. 민중의 무장 봉기는 증오에 찬, 피비린내 나는 행위가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미숙한 투쟁을 벌인 결과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피해자로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주변의 친구나 친척들이 폭력 앞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나도, 그 누구도 사람이 죽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억압당한 민중이 하는 말은 총 외에는 없다!”
나도 억압당한 팔레스타인의 이런 비장한 선언을, ‘옳다’고 여기며 행동 선언으로 받아들이고 아랍에서 투쟁해 왔다. 그리고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람들의 죽음과 삶, 사람들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슬픔에 수 없이 동참했다. 생명의 귀중함,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과 사람들 간의 관계의 소중함을 그 때마다 배우면서 살아왔다.
지금 우리들이 70년대 식의 무장 투쟁을 중지한 것은 UN에서 팔레스타인의 인정이라는 시대적 흐름도 있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서 보여진 생명의 소중함을 모든 투쟁에서 살리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와 나는 과거의 투쟁에서 사람을 다치게 하고 고통을 주기도 하고, 목숨까지 잃게 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그 피해자에게 깊게 머리 사죄한다.
과연 그때 추구했던 목적 하나하나를 실현할 수 있는, 무장투쟁 이외의 방법이나 형태가 과연 있었을까, 우리들의 부족함을 인정하고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다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아랍의 가치 기준이 보편적인 세계적 기준이 아닌 것처럼, 일본의 가치 기준 역시 보편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는 인간의 양심보다도 자본이나, 돈의 가치에 더 무게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 그것이다.
‘영웅’이 될지, ‘테러리스트’가 될지 우리들을 향해 내려지는 평가가 어떤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그들은 인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고 언젠가 우리를 이해해 주리라고 믿고 있다.
혁명가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사는 존재로 남고 싶다. 또한 참된 휴머니스트가 진정한 혁명가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시게노부 후사코,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 81~83페이지.
딸애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조차 잃고 나는 체포되고 말았다. 지금 책상도 없는 옥중의 마루 바닥에 종이를 깔고 펜을 빠르게 굴리면서 일본에서 세계로 보내는 내용을 적고 있다.
세계는 지금 일본에게 바라는 것은 많이 있다. 특히 태평양 전쟁 후, 미소 냉전이 시작되기 전, 유엔이 아직 가상주의에 불타고 있을 즈음에 만들어진 유엔 헌장의 평화와 다민족 공존의 요청은 보편화되어 일본 헌법 전문에 남아 있다. 일본이 전쟁에 패하고 점령군에 의한 일본 해체 계획의 일환으로서 신 헌법이 제정되고 신 일본이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미국의 압력으로 만들어진 헌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압력에 못 이겨서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 전쟁은 싫다!”라고 사랑하는 형제 자매를 잃은 전쟁의 아픔을, 평화를 희구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놓고 싶다는 바램이 당시의 일본 서민의 소원이 아니었던가. 이 대다수의 서민들의 바램이 헌법을 지탱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헌법의 평화주의와 전쟁 포기 조항 덕분에 일본은 번영을 누려왔다. 국가 안보나 미국의 덕택으로 일본이 번영을 누려온 것은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인가 아닌가에 관계없이 당시 ‘전쟁은 이제 그만!’이라고 부르짖는 일본 서민이 선택한 것이 지금의 헌법이라는 사실이다.
시게노부 후사코,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 241~242페이지.
세계는 지금 일본에게 바라는 것은 많이 있다. 특히 태평양 전쟁 후, 미소 냉전이 시작되기 전, 유엔이 아직 가상주의에 불타고 있을 즈음에 만들어진 유엔 헌장의 평화와 다민족 공존의 요청은 보편화되어 일본 헌법 전문에 남아 있다. 일본이 전쟁에 패하고 점령군에 의한 일본 해체 계획의 일환으로서 신 헌법이 제정되고 신 일본이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미국의 압력으로 만들어진 헌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압력에 못 이겨서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 전쟁은 싫다!”라고 사랑하는 형제 자매를 잃은 전쟁의 아픔을, 평화를 희구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놓고 싶다는 바램이 당시의 일본 서민의 소원이 아니었던가. 이 대다수의 서민들의 바램이 헌법을 지탱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헌법의 평화주의와 전쟁 포기 조항 덕분에 일본은 번영을 누려왔다. 국가 안보나 미국의 덕택으로 일본이 번영을 누려온 것은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인가 아닌가에 관계없이 당시 ‘전쟁은 이제 그만!’이라고 부르짖는 일본 서민이 선택한 것이 지금의 헌법이라는 사실이다.
시게노부 후사코,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 241~242페이지.
5. 여담
젊은 시절의 사진 | 체포되는 장면 |
덤으로 아버지는 극좌 성향인 딸과는 정반대로 극우였다고 하는데 시골에서 작은 서당을 운영할 때 가르쳤던 제자 중에서 5.15 사건과 2.26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인물이 있어서 제자의 유고를 읽으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인 적도 있다고 할 정도였다. 다만 나름 지조와 사상이 있는 신념형 극우였는지 전후 혼란기에 먹고 살기 위해 식료품점(구멍가게)를 열었을 때 주변에 살던 재일 한국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했는데 이 덕분에 가게에 야쿠자가 쳐들어와서 돈을 뜯어내려고 행패를 부릴 때 주변에 살던 재일 조선인들이 도와주러 몰려와서 야쿠자를 쫒아내 주었다고 한다.[7][8] 뿐만 아니라 자식들이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재일 한국인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절대로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는 일화도 있고 그녀도 자신의 책에서 이런 아버지가 몹시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했다.
정치활동(과격파 학생운동)에 투신한 딸을 무척 깊게 이해해 주는 편이었기 때문에 지나친 과격노선으로 치닫던 적군파의 활동을 보고[9] '혁명이란 일살다생(一煞多生: 한 사람을 죽여 많은 사람을 살린다)이어야 하는데, 그런 과격노선으로는 일살일생(一煞一生: 한 사람을 죽여 한 사람을 살린다) 밖에 할 수 없다'고 타일렀다거나 중동으로 출국하려는 딸이 무엇을 할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할 거라면 어중간하게 하지 말고 끝까지 하라'고 격려했다거나 딸이 출국한 후 인편을 통해 '대의란 불효와 같아서 육친을 죽인다'는 시를 전해 주게 했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적어도 시게노부 후사코란 개인의 일생을 두고보면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결국 일본 신좌파도 길게는 임진왜란 이후 포로로 잡아온 조선 유학자들이 전파한 성리학이 막부 말에 키워 존황양이란 혁명 이데올로기로 한 번 세상을 뒤엎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메이지 시대 일본 사회의 주류 관료-재벌 엘리트와 충돌하며 급진적인 아시아주의적 팽창주의 극우 혹은 소수는 극좌로 투신했던 일본식 지사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녀는 어찌 보면 방향만 다를 뿐이지 근본적인 철학이나 삶의 자세는 공유했으니 정치적으론 반대 성향인 아버지가 오히려 인간적으로 이해해 준 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나쁘게 보자면 비행기 하이재킹에 테러, 사람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는 지극히 과격하고 대의만 좋으면 과정이나 방법은 상관없다는 막나가는 테러리스트스러운 도덕적 무책임함도 기타 잇키의 저서에서부터 발견되며 주류였던 우익 바리에이션으론 바로 그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 전쟁이란 거대한 역사적 똥덩어리를 빗어낸 일본식 지사적 전통의 어두운 면이기도 하다.
다른 여담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작은 서당까지 운영한 지식인으로써 지역 사회에서는 (가난하기는 했어도) 상당한 유지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영향으로 학생운동에 투신하기 전부터 지역 출신 국회의원의 아들[10]과 약혼 이야기가 오갈 정도였다고 한다. 상대측도 그녀의 성격이 정치인의 부인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11] 하지만 시게노부 후사코 본인은 자신이 학생운동에 투신한 뒤 '어차피 일본에 혁명이 일어날 리는 없고 너는 결국 운동을 포기하고 내 품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고 자신만만해하는 상대 남자의 태도가 대단히 재수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12] 운동권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고 차까지 마신 뒤 주머니를 털어 보자 돈이 모자라서 모두들 지인들에게 돈 좀 빌려 달라고 전화를 하는 와중에 국회의원 아들이니 돈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고 마음에 둔 여자가 밥값 좀 내 달라고 하자 얼른 달려온 남자는 운동권 학생들이 모여 있는 모습에 빡쳐서 '이 돈은 너희 같은 좌익들에게 기부하기는 아까운 돈이다. 시게노부씨가 책임지고 갚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나름 뼈 있는 한마디를 남기고 음식값을 대신 내 주었다고 한다.[13] 물론 그녀는 이 돈을 갚지 않았고 관계는 이후 끊어졌다고 한다.
사진
어찌된 영문인지 해당 사진이 시게노부 후사코라는 해괴한 소문이 오래 전부터 돌았다. 심지어 저 사진이 올라온 원 링크의 댓글에도 그런 언급이 있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며 해당 인물은 1980년대 일본 여배우 이라가시 이즈미로 1987년에 출연한 “少女コマンドーIZUMI”라는 특촬 영화의 한 장면이다. 해당 사진을 구글 이미지 검색으로 검색해 보면 나오는 정보다. 사실 이 사진은 시게노부 후사코라는 인물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을 것이다. 대학 시절부터 이름을 날린 인물이 정말 쌩뚱맞게도 웬 교복을 입고 M72 LAW를 들고 있으며 뭔 존 람보도 아니고 기관총 탄띠까지 각개로 차고 있다. 얼핏 보아도 일본의 흔한 특수 촬영 영화스러운 구성의 사진이다. 무엇보다 이목구비부터가 전혀 다르다. 한마디로 약간의 의문을 가지면 해당 사진이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 수 있다. 사실 의문도 안 가지고 그 내용만으로 바로 믿는 게 더 이상한 사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심지어 링크 댓글에 올라온 사진은 딱 봐도 배우의 화보 사진이다. 해당 낭설이 전세계적으로 퍼진 걸로 보아 오래 전 어느 외국인의 실언이 그 시초가 된 것으로 보인다.
[1] 물론 일본 적군파에 '여제'라는 직책이 있었다거나 이 인물이 해당 별명에 상응하는 전제적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고 일본 적군파 구성원 중에서도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후 흔히 "적군파의 여왕/여제"나 "테러리스트 마녀"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1, #2, #3 등 참고. 이러한 별명은 본 문서에 후술된 내용과 같이 시게노부 후사코 개인의 행적과 실적 이전에 이 인물이 안겨준 문화적 충격, 말하자면 "얌전한 옆집 아가씨 같은 인물이 알고 보니 국제 테러조직 간부더라"라는 문화적 충격에 대한 반작용으로 붙은 별명이라고 볼 수 있다.[2] 당시 일본은 학생운동이 강성했고 한국의 1980~1990년대처럼 일반적인 학생이 운동권에 합류하기 쉬웠다.[3] 여담이지만 일본 국내에 잔류했던 적군파 세력은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되었고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으로 북한으로 향한 인물들도 처참한 결말을 맞았다. 이 점에서 보면 일본 적군 중에서 그나마 덜 바보같은 길을 선택한 것이 팔레스타인으로 향한 시게노부 후사코 일파였다.(최소한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에는 명분이 있고 북한으로 간 적군파 간부들이 북한 정권에 의해 철저히 감시당하면서 이용당한 것에 비하면 팔레스타인에서는 동지로서 존중받으면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4] 단, 본인이 자서전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체포 당시 사실상 자수하기 위해 일본에 입국하였으며 중동 정세(더 나아가 세계 정세)의 변화로 의지할 수 있는 세력이 거의 없어진 상황에 무국적 상태였던 딸에게 안정적인 신분(일본 국적)을 보장해 주려는 것이 자수의 이유였다고 한다.[5] 원제는 <りんごの[ruby(木,ruby=き)]の[ruby(下,ruby=した)]であなたを[ruby(産,ruby=う)]もうと[ruby(決,ruby=き)]めた>다.[6]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상당히 수수하고 소박하게 생겼다. 링크 쇼와 시대의 느낌이 나는 미인인 듯하다. 사실 '긴 머리에 미인형' 이라는 수식어는 1970년대 일본에서 그녀가 남긴 일종의 비쥬얼적 충격을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호의적으로 보면 나름 예쁘장하다고 할 만한 수수하고 소박한 젊은 아가씨의 외모와 극좌 테러리스트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행적 사이에서 나타나는 강렬한 괴리감이 사람들에게 큰 문화적 충격을 안겨줬는데 말하자면 <참하고 얌전한 옆집 아가씨가 알고보니 극좌 과격파 조직의 수반으로 해외에서 테러활동을 주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듯한 충격과 괴리감을 안겨준 것이다. 차라리 강인하고 거칠어 보이는 인상이었다거나 미인이라도 좀 더 반항적이거나 기가 세 보이는, 하다못해 화려한 느낌이기라도 했다면 외모로 인한 충격은 덜했을 것이다. 굳이 긴 머리가 자주 거론되는 것도 별다른 장식이나 모양을 내지 않고 그저 단정하게 빗어내린 긴 머리가 얌전한 여성성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져 더욱 생경하게 여겨진 것이다. 사실 외모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인생사 자체가 조금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정에서 여러 형제자매 중 하나로 태어나 성실하게 공부와 집안일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회사에 취업하여 집안을 도우면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야간대학에도 진학하는 등 얌전하고 성실한 젊은이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역시 일본 학생운동의 전성기와 그 뒤를 이어 찾아온 불량문화의 전성기에 흔히 받아들여졌던 '시끄럽고 위험한 젊은이의 전형'과는 전혀 달랐다.[7] 야쿠자를 직접 두들겨패서 쫒아낸 것이 아니고 건장한 체구의 재일 조선인 남성들이 서로 단단히 손을 마주잡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폭력조직원을 둘러싸고 압박을 가했다고 한다. 직접 폭력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 위압감이 대단했는지 폭력조직원이 겁에 질린 채 울며 사과하고 돌아갔다고 할 정도다.[8] 당시 일본 극우는 사상적으로 좀 복잡한 경우가 많아서 내선일체나 아시아주의를 진짜로 믿고 실현하고자 하는 부류도 많았고 정말 조선과 일본이 하나가 되려면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다수였다. 아시아주의 항목 참조. 심지어 기타 잇키 같은 경우는 조선을 완전히 일본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반도에서 도군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9] 딸의 '시위 도중 경찰과 충돌이 일어났을 때 동료 운동가들과 함께 경찰을 마구 두들겨팼다'고 자랑하는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고 한다.[10] 2세 의원 전통이 강한 일본에서 당연히 그 지역구를 물려받을 후계자로 여겨졌다.[11] 적군파의 주요 간부 중 하나가 된 것을 보더라도 상당히 리더십과 과단성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12] 한편 시게노부 후사코의 아버지 역시 이 혼담을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상대 남자를 상당히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일단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도 상당한 집안과의 혼담, 즉 흔히 말하는 좋은 혼담인 데다 상대편 집안이 훨씬 가세가 좋은데도 호의적으로 나오니 혼담 자체는 잘 되면 그대로 진행되어도 좋다고 보고 반대하지 않았지만 사윗감 자체는 썩 탐탁지 않게 여기는 정도의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젊은 사람답지 않게 너무 건방지고 오만해서라고 한다. 예를 들어 젊은이가 연하장을 보내면서 직접 손으로 써서 보내지 않고 인쇄된 연하장에 이름 정도만 써서 보내는 모습 등이 나이에 비해 오만해 보였다고 한다. 시게노부 후사코 본인과 아버지의 평가가 일치한 점으로 볼 때 성격적으로는 확실히 좀 오만한 면이 있었던 인물로 추정된다.[13] 아마도 시게노부 후사코가 자기 밥값을 내 달라고 한 것이었으면 그냥 자기가 냈다고 생각하지, 갚으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