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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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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스테판 티모페예비치 라진
Stepan Timofeyevich Razin
Степан Тимофеевич Разин
종교 러시아 정교회
직업 카자크
출생 1630년
사망 1671년 6월 16일 (향년 41세) 모스크바

1. 개요2. 루스 차르국의 카자크3. 페르시아 원정4. 봉기5. 최후6.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민중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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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스 차르국카자크로 1670년부터 1671년까지 루스 차르국에서 카자크 봉기를 지휘한 인물이자 러시아우크라이나 민속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민중 영웅이기도 하다. 지소형[1]인 스텐카 라진(Стенька Разин)으로도 알려져 있다.

사라토프에 있는 라진 언덕에서는 라진으로부터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2. 루스 차르국의 카자크

스테판 라진은 역사 사료에서 종종 혼혈 카자크라는 언급이 나온다. 스테판의 아버지 티모페이의 이름은 남아있지만 그의 어머니에 대한 역사 기록이 민속 전승 외에는 남아 있지 않은데 학자들은 스테판의 모친을 카자크에게 포로로 잡힌 크림 타타르 여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동유럽에서는 크림 칸국의 노예 납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이 때문에 동유럽의 많은 비옥한 평야 일대가 사람이 살지 못하는 지역이 되었다.[2] 이 때문에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농민들은 노예로 잡혀가느니 차라리 농노로 사는 게 낫다는 체념 하에 비참한 농노 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농노들에 대한 지주들의 착취가 도를 넘기 시작하자 일부 루테니아 농노들이 탈주하여 도적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카자크 형성 초창기에는 루스 차르국이나 크림 칸국으로부터 탈출한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중추가 되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슬라브인의 비중이 늘어났다. 이들은 일단 자체적으로 크림 타타르족으로부터 자신들의 마을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카자크들이 이끄는 광활하고 비옥한 농토에서 세금도 없이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근대 이전까지는 상당히 민주적인 공동체를 꾸렸기 때문에 농노들 입장에서 카자크 생활은 꿈의 낙원이나 마찬가지였다. 탈주 농노들이 꾸준히 합류하고 여기에 튀르크계, 타타르계 포로들이 합류하면서 카자크는 우크라이나 동부 상당 지역과 러시아 유럽 영토 남부를 상당 부분 아우르게 되었다.

그는 루스 차르국 영토에 살던 카자크로 21살 즈음이었던 1661에 돈 코사크에서 칼미크 칸국으로 파견한 사절단에 포함되었을 만큼 젊은 나이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유복한 아버지를 두었고 형은 아타만(카자크의 지도자)이었으나 그 자신은 혼혈이라는 점 때문에 하류층 카자크들과 주로 어울려 다녀야 했는데 외려 그 때문인지 스테판은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잘 이해했고 많은 카자크들과 농민들로부터 신뢰와 인망을 얻었다.

3. 페르시아 원정

루스 차르국의 폴란드(1654~1667), 스웨덴(1656~1658)을 상대로 하는 전쟁이 길어지자 전쟁 비용의 부담은 조세의 증가로 이어졌다. 1662년에는 경제난 와중에 일부 귀족들이 사재기를 하는 것에 분노한 주민들이 모스크바에서 폭동을 일으켜 7천여 명이 처형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형벌을 받았으며 전쟁 와중에 농노들을 대상으로 계속 징집이 계속 이루어졌는데 농노는 한 번 징집되면 보통 25년 정도 군복무를 해야 제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많은 농노들이 탈주하여 스테판 라진이 이끌던 카자크에 합류했다.

그는 이들에게 보상해 주기 위해 1667년 다게스탄데르벤트와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에 해당하는 지역을 거쳐 카스피해 남부를 약탈했다. 1669년 약탈품을 싣고 루스 차르국 영토로 귀환하면서 약탈품을 상납하는 문제로 러시아군과 유혈 충돌을 빚었는데 결국 이 때문에 벌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자신과 충돌하던 일단의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1670년 봉기를 일으켜 2만여 명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진군했다.

4. 봉기

아타만이었던 그의 형은 억울한 죄목으로 처형당했던 적이 있었는데 자신의 형의 억울한 죽음에 복수하고 루스 차르국 전역에 카자크들의 자유를 확립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카자크뿐만 아니라 과도한 조세와 귀족들의 착취로 고생하던 농노들과 여러 소수민족들이 스테판 라진의 봉기군에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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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료나 아르자마스카야(Алёна Арзамасская, ?–1670)

라진의 봉기군 중에는 알료나 아르자마스카야라는 용감한 여장부도 있었는데 그녀는 볼가핀계 소수민족 모르드바인(에르자인) 출신으로 아주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가 남편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어 청상 과부가 되었으며 수도원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직접 말을 타고 활을 쏘면서 봉기군을 지휘해 금세 유명해졌다. 그녀는 스테판 라진의 봉기군에 수백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아스트라한, 사라토프, 사마라가 라진에게 성문을 열었고 이어 라진의 군대는 울리야놉스크를 공격하기 시작했는제 갑작스레 병력이 2만에서 20만여 명으로 늘어난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후 규율과 기강이 무너지고 오합지졸이 되어 버렸으며 이 와중에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가 보낸 루스 차르국 관군이 공격해 오자 훈련되지 않은 병력이 많은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연전연패를 거듭하게 되었다. 결국 스테판 라진은 1671년 4월 관군에게 체포당했다.

5. 최후

스테판 라진은 그의 아우 프롤 라진(Фрол Разин)과 함께 모스크바로 압송되어 붉은 광장에서 처형당했다.[3] 감옥에서 뼈를 하나하나 부러뜨려 가는 가혹한 고문을 당당하게 견뎌냈으며 간부 중 한 명이었던 알료나는 산 채로 화형당하는 형벌에 처해졌다. 스테판 라진과 알료나 아르자마스카야는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당하는 와중에도 목소리 하나 내는 법이 없었다고 기록되었다. 이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본 민중들은 이들에 대해 일말의 대리만족과 경외감을 느낀 듯 하다. 스테판 라진에 대한 민속 설화 상당수가 라진의 처형을 웅장하게 묘사하며 끝을 맺는다.

6.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민중 영웅

비록 실패하기는 했으나 민중들의 염원을 이뤄내려던 영웅으로 이미 러시아 제국 시대부터 민중들에게 찬양받았으며 소련이 세워진 후에는 프롤레타리아의 영웅이자 국가적 영웅으로 기려졌다.

그를 기리는 스텐카 라진의 노래라는 러시아 노래가 유명하다.


[4]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어 가사 번역은 다음과 같다.
넘쳐 넘쳐 흘러가는 볼가 강물 위에
스텐카 라진 배 위에서 노랫소리 드높다
페르시아의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
웃음 띤 그 입술에 노랫소리 드높다
돈코사크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린다
다시 못 올 그 옛날에 볼가 강은 흐르고
잠을 깨인 스텐카 라진 외롭구나 그 얼굴
전설에 따르면 라진은 전투 중 페르시아 귀족 여인을 사로잡아 아내로 삼아 그 여인에게 영향을 받아 귀족적인 생활에 젖어들게 되었지만 카자크 전우들의 비난을 들은 라진은 그 여인을 볼가 강에 던져 죽여 버리고 초심을 되찾았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노래로 만든 것이다.

소련에서도 군악단이 그에 관한 노래를 만들어서 불렀다.


알렉산드로프 앙상블 1965년 공연 (솔리스트: 레오니트 하리토노프)

러시아어 가사는 다음과 같다.
Есть на Волге утёс, диким мохом оброс
Он с вершины до самого края.
И стоит сотни лет, только мохом одет,
Ни нужды, ни заботы не зная.
И стоит сотни лет, только мохом одет,
Ни нужды, ни заботы не зная.

На вершине его не растет ничего
Только ветер свободный гуляет.
Там могучий орел свой притон там завел
И на нем свои жертвы терзает.
Там могучий орел свой притон там завел
И на нем свои жертвы терзает.

Из людей лишь один на утёсе том был,
Лишь один до вершины добрался.
И утёс человека того не забыл,
И с тех пор его именем звался.

И поныне стоит тот утёс и хранит
Все заветные думы Степана,
И лишь с Волгой одной вспоминает порой
Удалое житьё атамана.
И лишь с Волгой одной вспоминает порой
Удалое житьё атамана.


[1] 친애의 뜻을 담아 다르게 부르는 러시아식 별칭. 영미권의 줄임말(ex.윌리엄 → 빌)과는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개념이다. 예를 들어 알렉산드르(Александр)를 지소형으로 부르면 사샤(Саша)가 되고, 안나(Анна)를 지소형으로 부르면 아냐(Аня)가 되 식.[2] 크림 타타르족들은 언젠가 해당 지역에 다시 사람이 오면 납치해 노예로 팔려고 정착하지 않고 기다렸는데 평야 지대여서 노예 사냥에 유리했기 때문이다.[3] 최대한 잔인하게 처형하라는 황제의 명에 따라 팔과 다리를 차례로 절단한 뒤 목을 자르는 방식으로 집행되었다.[4] 이 동영상에 등장하는 가수 이반 레브로프는 사실 본명이 한스-롤프 리페르트인 독일인으로, 러시아와 동유럽권 노래를 잘 불렀기 때문에 아예 예명을 러시아어로 짓고 러시아인 가수처럼 컨셉을 잡아 활동했으며 2008년에 사망했다. 이 사람의 형 호르스트 리페르트는 2차 대전 독일 공군 전투기 에이스 중 하나로 생텍쥐페리를 격추한 사람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