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21:50:26

살리에리 증후군

1. 개요2. 유래3. 기억해야 할 점: 살리에리는 억울하다4. 반전 : 오늘날에 오히려 올라간 살리에리의 명성5. 관련 문서

1. 개요

살리에리 증후군(Salieri Syndrome)은 1인자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2인자의 심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대음악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2. 유래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대음악가였다. 하지만 그의 재능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불세출의 천재였던 모차르트를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었고 결국 살리에리는 천재를 초월할 수 없는 수재, 영원한 2인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항간에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시샘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퍼졌다. 푸시킨의 오페라를 통해 항간에 떠돌았던 살리에리의 모차르트 독살설은 이후 마치 정설처럼 굳어져 현재까지도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다.

이 때문에 1인자를 질투, 시기하는 2인자의 심리를 가리켜 살리에리 증후군이란 말이 붙었다.

다만 해당 용어는 《아마데우스(연극)》 평론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고, 〈아마데우스(영화)〉 대성공으로 대중화된 용어이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시대 18세기~19세기에 만들어진 용어가 아니다. 살리에리 증후군이란 용어는 생각보다 최근에 만들어진 용어이다.

3. 기억해야 할 점: 살리에리는 억울하다

살리에리의 모차르트 독살설에서 유래해서 살리에리 증후군이라는 병명이 탄생하긴 했지만, 사실 이는 살리에리에게는 다소 억울한 일이다.

지금이야 모차르트 쪽이 더 명성이 높지만, 당시에는 살리에리의 명성도 모차르트와 필적할 정도였다. 부와 당대의 명성이라는 면에서 보면 살리에리가 굳이 열등감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는 이야기. 모차르트도 유명했지만, 살리에리도 당대 최고의 음악가 중 한 사람이었고 그에 맞는 부와 명예를 누렸다. 오히려 당대에는 "살리에리의 음악이 모든 공연을 가져간다."라며 벌이가 막막하다는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보낸 투정 섞인 편지까지도 발견되었을 정도.

물론 모차르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모차르트가 지나치게 자기관리나 사회생활을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에 모차르트는 살리에리뿐 아니라 많은 음악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 마음이 맞아야 사이가 좋을 거 아닌가? 오히려 살리에리는 그런 모차르트를 여러모로 챙겨주었고,[1] 그 외에도 사정이 어려운 후학들에게 무료로 음악을 가르칠 정도로 그릇이 넓었던 사람이다.

즉,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싫어한 건 모차르트의 모난 성격 때문이었고 재능과 명성을 시샘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살리에리 증후군이란 이름으로까지 남아서 질투의 화신으로 기억된 점은 살리에리 본인으로서는 매우 억울한 일일 것이다.

실제로 살리에리 생전에도 이 소문이 퍼져서, 작곡가였던 이그나츠 모셸레스(Ignaz Moscheles)가 노년의 살리에리를 찾아가 인터뷰했을 때 이에 대해 질문하자 살리에리는 '나는 물론 모차르트를 싫어하긴 했지만, 나 외에도 그 자를 싫어한 사람은 한 둘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죽였다는 설은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정했다. 게다가 최근 연구에 따르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공동작업을 한 적도 있어서 사이가 좋지 않았을지언정 다툼이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4. 반전 : 오늘날에 오히려 올라간 살리에리의 명성

원래는 서양음악사나 고전음악 전공이 아니라면 살리에리의 이름을 알만한 사람은 매우 적었을 것이다. 오늘날 대중들이 아는 이탈리아 음악가라고 해봐야 비발디와 파가니니 정도로, 모든 분야가 그렇듯 아무리 유능해도 위인전에 이름이 실리거나,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 하여[2] 후대에 재조명되는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 모차르트도 비할데 없이 뛰어난 연주실력과 별개로 악풍이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당시의 정서에 맞지않는다는 이유로 고액 유료 공연 관객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상류층에게 어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모차르트 사후 그의 곡이 점점 재평가받게 되면서 위상이 올라갔고 후세에까지 이름이 남은 것이다. 반면에 살리에리는 당대 음악사조에 부합하는 잘나가는 주류 음악인중 하나였지만 후대의 조류에 어필하기엔 난해하여 이름을 남기기 어려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질투 루머와 암살 음모론이 마치 정설인 것처럼 되어버렸고 모차르트가 불멸의 명성을 획득함과 동시에 그와 불명예스러운 악성 루머로 엮인 살리에리도 대중들이 이름 정도는 아는 음악가가 되었다.

5. 관련 문서

  • 리플리 증후군 - 두 용어 다 전문용어가 아니며, 원작이 아닌 각색물의 성공으로 만들어진 조어들이다.


[1] 본인과 부인의 사치로 경제형편이 곤궁한 모차르트에게 살리에리가 일자리를 소개해준 일도 있으며, 모차르트 사후 모차르트의 아들을 가르치기도 했다.[2] 빈센트 반 고흐 같은 화가가 대표적인 사례다. 차이점은 모차르트는 당대에 이미 신동이라 널리 인정받았고 다수의 흥행작들도 남겼지만, 빈센트 반 고흐는 생전 그림 딱 1점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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