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Saul David Alinsky |
출생 | 1909년 1월 30일 일리노이주 시카고 |
사망 | 1972년 6월 12일 캘리포니아주 카멀바이더시 |
1. 소개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지역조직가.2. 생애
2.1. 유년과 학창시절
1909년 미국 시카고 남부의 빈민촌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반항아적이고, 유대인 아이들의 골목대장 노릇도 한 바 있다. 그가 18세가 되었을때, 부모가 이혼하였다. 이로 인해 알린스키는 캘리포니아로 떠난 아버지와 시카고에 거주하는 어머니 사이를 왕래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다.[1] 이후 시카고 대학교에 입학하고 고고학을 전공했다. 고고학을 전공하면서도 사회학 강의를 많이 들었다. 그러면서 사회학이 접근하는 빈곤이 현실과 동떨져 있는 것에 불만을 가진다.알린스키가 대학교를 졸업할 당시 대공황이 미국사회를 강타했다. 그렇다 보니 알린스키의 전공은 쓸모가 없어진다. 이러한 와중에 알린스키는 시카고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한다.[2] 그는 범죄학을 전공했으며 연구대상으로 알 카포네의 갱단을 연구한다. 그는 학문적 접근에서 그치지 않고서, 직접 체험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갱단에 직접 가입하고, 우두머리 급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2.2. 빈민사회의 조직가
대학을 마칠무렵 그는 일리노이주 남부의 탄광 노동자들과 만나게 된다. 이후 노동조합인 CIO를 지휘하던 존 루이스와 친분관계를 쌓고 휘하에서 일하기도 했다. 1939년 알린스키는 경제공황으로 고통받는 시카고 증권가의 뒤에 위치한 달동네로 들어간다. 알린스키는 그 달동네에서 다양한 민족으로 매일같이 싸우던 사람들을 조직한다. 알린스키는 지역사회를 조직하면서 자산은 돈이 아닌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구하는 것은 자신에 있다는 이야기를 그 주민들에 다가가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조직된 빈민가 주민들은 시카고의 시장과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권익을 얻어내고 보호한다.이러한 알린스키의 방법에 재산가인 마샬 필드 2세가 기금을 제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서 산업사회재단을 시카고에 설립한다. 산업사회재단은 지역사회의 조직가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역할을 해냈으며 이들은 미국 각지로 나아가 사람들을 조직한다.[3] 알린스키도 50년대에는 시카고의 흑인 게토라던지, 캘리포니아주로 옮겨가면서 각 지역 조직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해낸다.
2.3. 1960년대 그리고 말년
이러한 과정에서 알린스키는 중산층의 조직을 주목하였다. 알린스키는 사회개혁이 미국 인구의 큰 비율을 차지하는 중산층의 지지로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60년대에는 68 혁명을 비롯한 수많은 학생운동이 발생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알린스키는 대학생들이 점거한 대학 강당에 초청된 당시의 지식인처럼 초청되었다. 알린스키는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낭만적으로 보는 것은 매우 잘못되었으며[4] 체제의 전복이 아닌 체제내부에서의 개혁을 강조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의 반발을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을 저술한다. 이 책은 당시의 학생운동가들의 교조주의화[5][6][7]와 의사소통의 부재[8]를 비판하면서 세상을 바꾸는 방법을 이야기 했다. 하지만 그의 책이 출판된 다음해인 1972년 캘리포니아에서 길을 걷던 중 쓰러져 사망한다.3. 영향
3.1. 미국
미국의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시카고에서 그가 이끄는 조직에서 조직가로 일하였고,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그를 다룬 대학 졸업논문을 집필했다. 그 외에 수많은 정치가, 심지어는 공화당과 네오콘 중 상당수도 그의 영향을 받는 등[9] 그는 미국 현대정치와 사회운동의 역사에서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 사람에 대한 언급 자체를 매우 꺼리는 분위기다.[10] 이는 사울 알린스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들이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시위를 하는 너무 과격한 성향으로 인해 주류적인 미국 노동 운동사에서는[11] 흑역사 같은 인물로 평가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젊은 시절 갱스터와 친하게 지낸 것과 40년대에는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노동 운동을 한 적이 있다보니 더더욱 좋은 평가를 받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3.2. 대한민국
1970년대 알린스키의 조직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이 기독교 학생운동의 통합체인 한국사회개발단에 참여하고, 여러가지 사회문제에 대해 수록하고 노동운동을 조직하면서 70년대의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이뤘다.[12] 이후 80년대에서는 지역 주민운동의 일부영역에 그치었다. 2010년대 이후로 박상훈의 <정치의 발견>이나 강준만의 <싸가지 없는 진보>로서 정치적 측면으로 재발굴이 이뤄졌다.2015년 정의당의 대표로 출마한 조성주가 롤모델로 삼는 인물이자, 그를 다룬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을 집필한 바 있다.
시사 팟캐스트인 XSFM의 그것은 알기 싫다의 에피소드 중, 207a. 사울 알린스키와 민주주의 (1/2), 207b. 사울 알린스키와 민주주의 (2/2)에서도 알린스키를 다루었다. 역시 조성주가 출연.
4. 저술
-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 래디컬: 급진주의자여 일어나라
5. 기타
- 한국과 미국에서 알린스키가 썼다고 하는 사회주의 국가로 가는 8가지 단계라는 글이 퍼지고 있다. 일종의 매카시즘으로서 미국에서는 알린스키와 직접적 연관이 있었던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을, 한국에서는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기 위해 주로 인용된다. 그러나 이 글이 실제로 알린스키가 쓴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1] 그래서 고등학교 네 곳의 수업증명서를 대학진학 할 당시에 제출하였다.[2] 전액의 장학금을 받을수 있었기에 진학했다.[3] 알린스키는 조직가들에게 운동이 시작될 때 주인행세를 하지 말고, 현장에서 3년이내에 운동을 일으키고 성공적일때 그 곳을 떠나라고 가르친다.[4] 그 외에 TV같은 것을 가지고 싶은 하층민이 속물스럽다는 대학생들의 주장에 대해 그게 바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 본질이라고 일갈했다.[5] 매카시즘으로 인해 (급진적)사회개혁운동의 계보가 단절되어 버린 것이 큰 이유다. 알린스키 본인도 이것 때문에 이 책을 썼다고 한다.[6] 반면 운동권의 교조주의화에 대해 매카시즘 보다는 시대상으로는 운동권들이 스탈린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렇게 변질되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7] 이제 와서 결과론적이긴 하겠지만, 정답을 말하자면 매카시즘의 탄압이 운동의 핵심인 학습과 정치사업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건 맞고, 그럼에도 이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가 좌경적 교조주의, 극단주의나 우경적 기회주의, 수정주의로 전락한 것이다. 양자는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이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의 실패 원인 분석과도 상통한다. 당장 소련과 중국만 보더라도.[8] 지금이야 이게 한참 잘못된 거란 걸 많이 알지만 이 때는 자기들끼리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된 것은 기본에, 유대인들 앞에서 햄을 먹는다거나 가톨릭 신자 앞에서 마약을 하는 것 같은 무개념 행동이 빈번했다.[9] 이 계기는 1968년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경찰이 폭력적으로 진압한 사건이었다. 이런 현실에 좌절하고 절망한 급진주의자들에게 그는 3가지의 선택지를 제시했다. 그것은 (1)그냥 지금처럼 통곡해라.(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2)미쳐서 테러를 해라.(그리고 그들은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3)너희들의 지역으로 가서 조직을 구성하라.(그렇게 대표가 되어 다음 전당대회에서 대의원이 되어라)였다.[10] 2008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공화당의 해킹(...)으로 힐러리가 알린스키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 드러난걸 보면 힐러리 본인도 이를 숨기려고 한것이 확실하다.[11] 여기서 말하는 미국 주류 노조라 함은 유럽이나 제3세계 노조가 아닌 대충 한국노총이나 일본의 렌고 생각하면 된다(...).[12] 대표적으로 전태일이 알린스키의 사상에 감화된 연세대 대학생과 함께 노동운동의 노선을 바꾸어 과격한 성향으로 가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