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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 깃발 | ||
<colbgcolor=#e40001,#222222><colcolor=white> 약칭 | 청년동맹, 청맹, 청년당 | |
설립 | 1946년 1월 17일 ([age(1946-11-17)]주년) | |
연혁 |
| |
간 부 | <colbgcolor=#e40001,#222222><colcolor=white> 위원장 | 문철 |
부위원장 | 강영진 | |
상위 조직 | 조선로동당 | |
하위 조직 | 조선소년단 | |
주소 |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 중앙위원회 본부 (평양시 중구역 동성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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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관제 청소년/청년단체. 약칭은 청년동맹, 청맹, 청년당이다. 해방정국에는 '민청'으로 불려 남한에 정착한 실향민도 기억하던 단체이기도 하다.'북조선민주청년동맹'(1945~1951) → '조선민주청년동맹'(1951~1964) →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1964~1996 / 약칭 '사로청') →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1996~2016 / 이하, 약칭 '청년동맹') →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2016~2021) →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2021~현재) 순으로 단체명이 바뀌었다.
이름에 '청년'이 들어가는 데서 알 수 있듯 가입 대상은 조선로동당 당원이 아닌 만 14세부터 30세까지의 공민들이며, 북한의 기나긴 징병 기간 때문에 대부분이 학생과 군인이다. 즉 4대 근로인민대중 중 지식인과 군인의 근로단체. 일반적인 근로자의 경우 조선농업근로자동맹이나 조선직업총동맹, 조선사회주의녀성동맹에 가입하게 되어 있지만 만 30세 이하인 경우에는 청년동맹에 소속된다고 한다[1]. 북한의 정치·사회 집단 답게 의무 가입이다. 다시 말해서 이 단체에 가입이 되지 않았거나 이 단체에서 축출되는 경우는 사회적 생명이 끝났다고 봐도 된다.
북한의 여느 단체들처럼 간부직은 모두 조선로동당원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근로단체부의 직속단체다. 현재 청년동맹 중앙위원장은 문철이며, 역대 중앙위원장 중 상당한 거물들도 일부 배출되었는데, 당중앙위원회 간부부장 김시학, 중국대사를 지낸 지재룡, 2023년 현재 선전-근로 비서를 담당하고 있는 리일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룡해 등이 중앙위원장을 역임했다.[2] 조직 구조를 살펴 보면, 평양시 중구역에 위치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조직부, 국제부, 소년단사업부, 학생청년부, 체육부, 로동청년부, 재정경리부, 선전선동부, 간부부, 사적자료부, 대학생청년부, 총무부, 속도전청년돌격대지도국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방으로 가면 도, 시·군 청년동맹위원회가 있고 대학과 고등중학교, 공장, 농장에는 초급청년위원회가 설치되어 있으며, 조선인민군과 중앙기관 등에도 별도의 청년동맹위원회가 있다. 또한 외화벌이 기관인 은별무역회사, 간부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인 금성정치대학[3], 금성청년출판사, 청년문화회관, 청년취주악단, 청년기동예술대, 송도원국제야영소, 학생소년궁전,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등을 산하에 두고 있다.
이곳에서 발간하는 기관지는 청년전위, 새날신문, 대학생 등이 있다. 동맹원수는 대략 500여 만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2021년 10차 대회를 통해 이름을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으로 바꿨다.
2. 역사
<rowcolor=white> "월급 2%, 새 돈으로" 북한 청년 충성심의 기준? (2022년 9월 24일 방송분) | 탄광으로 간 북한 청년들 청년동맹과 건설 (2023년 9월 7일 공개분) |
북한에서는 청년동맹의 시발점이 1926년 김일성이 조직한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4])의 주요 인물들이 1927년 8월 28일[5] 결성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약칭 '공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김일성은 10대 청소년에 불과했고 해당 조직이 그때부터 이미 실존했다고 증명할만 당대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실제로는 아무리 이른 시기로 소급해도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활동하던 1930년대 중후반에 창설되었고, 어렸을 때부터 항일운동을 한 것처럼 과장하기 위해 성립 시기를 앞당겼을 가능성이 높다. 해방 이후 김일성은 이후 소수의 공청 소속 청년들만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산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청년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소수의 공산주의 지지 청년만을 가지고는 북한의 소비에트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가입을 원하는 청년들을 모두 수용하는 북조선민주청년동맹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김일성의 파벌을 중심으로 1945년 10월부터 '민주청년동맹'(민청)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1945년 10월 28일에는 38선 이북의 5개 도 한정으로 청년대표대회가 열렸다. 소련의 '레닌청년공산주의동맹'과 같은 정예 공산주의자들의 단체를 만들기 원했던 오기섭과 같은 입장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은 “지주나 자본가도 돈만 내면 된다는 것이냐”며 극심히 반대했으나 김일성의 조직력에 밀려 그의 제안을 수용하게 된다. #
그리고 이듬 해인 1946년 1월 16일 북부조선민주주의청년단체대표자회의를 열고 다음 날인 1월 17일에 북조선민주청년동맹 결성식을 갖고 공식적으로 창립되었다. 초대 위원장으로는 김욱진이 선출되었고, 최초 맹원수는 25만 명이었다. 맹원수는 빠르게 늘기 시작했고, 그 해 9월에는 130만 명까지 늘어난다. 그러다가 6.25 전쟁 중인 1950년 12월 김일성은 당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를 소집하여 북조선민주청년동맹과 남조선민주청년동맹을 통합할 것을 제의하였고, 1951년 1월 남북조선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회 연합회의에서 조선민주청년동맹으로 통합하기로 의결하였다.
▲ 민청 깃발 |
전쟁 후에도 계속 같은 이름으로 유지하다가 1964년 5월 12일 열린 조선민주청년동맹 제5차 대회에서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약칭 '사로청')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북한 내부에서 영향력을 한층 강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1956년 8월 발생한 8월 종파사건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 때부터 김일성을 위한 사조직으로 전락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김정일이 서서히 정치 전선에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사로청으로 변경하기 직전에 김정일은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청년동맹 사업을 개선강화할데 대하여'라는 담화를 통하여 명칭 변경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은 조선로동당의 전투적 후비대이며 우리 당의 령도 밑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청년들의 대중적 정치조직이다. 기본임무는 청년들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으로 튼튼히 무장시키고 당의 로선과 정책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로 적극 조직동원하는데 있다.
민청을 사로청으로 고치는 것은 현실발전의 요구이다. 오늘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승리하고 사회주의건설이 힘있게 벌어지고 있으며 청년들의 생활과 풍모에서 커다란 전변이 일어나고 있다.
민청을 사로청으로 고치는 것은 현실발전의 요구이다. 오늘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승리하고 사회주의건설이 힘있게 벌어지고 있으며 청년들의 생활과 풍모에서 커다란 전변이 일어나고 있다.
▲ 1993년 2월 사로청 제8차 대회에 참석한 김일성과 김정일 |
그 후 김일성 사후인 1996년 1월 19일, 사로청 창립 50주년 겸 김일성 우상화를 위하여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 내막에는 동구권과 소련의 붕괴, 그리고 고난의 행군 진입이라는 어두운 사회적 상황에서 청년들이 이탈하지 않게끔하기 위한 것이었다.
▲ 1996년 1월 19일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개칭된 이후 깃발을 받아드는 김정일 |
2016년 1월에는 창립 70주년을 맞았고, 이에 대한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김정은이 젊은 세대이기 때문에 이 청년동맹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2016년 8월, 9차 대회에서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사회주의'라는 명칭을 삭제해버렸다.
2021년 4월, 10차 대회에서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으로 이름을 바꿨다. 김일성 및 김정일을 빼고 사회주의 명칭을 부활시켜 선대에 기댄 우상화를 최대한 없애보이려는 의도로 추측된다.
2.1. 역대 위원장
대 | 이름 | 재임기간 | 비고 |
1 | 김욱진 | 1946~1948 | |
2 | 현정민 | 1948~1962 | |
3 | 홍순권 | 1962~1967 | |
4 | 오기천 | 1967~1970 | |
5 | 김시학 | 1970~1972 | |
6 | 리영복 | 1972~1976 | |
7 | 지재룡 | 1976~1978 | |
8 | 리영수 | 1978~1986 | |
9 | 최룡해 | 1986~1998 | [6] |
10 | 리일환 | 1998~2001 | |
11 | 김경호 | 2001~2007 | |
12 | 리용철[7] | 2007~2012 | |
13 | 전용남 | 2012~2017 | [8] |
14 | 박철민 | 2017~2021 | |
15 | 문철 | 2021~ |
3. 역할
2010년 9월 28일 공표된 조선로동당규약 제9장에서는 이 단체를 이 문장으로 소개하고 있다.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은 조선청년운동의 개척자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몸소 무어주신 주체적인 청년조직이며 주체혁명 선군혁명의 대를 이어 나갈 당의 정치적 후비대이다.
2021년 개정된 당규약은 제56조에서 "조선로동당의 전투적후비대"로 규정한다.
쉽게 말해서 김씨 일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단체라는 것이다. 청년들을 당의 사상체계로 무장시켜 인민대중에 당의 노선과 정책을 전파하는 데에 선봉장에 서게 하고 천리마운동 전개, 일탈주민 단속의 역할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60년대 청년선봉대운동, 70년대 사상혁명, 기술혁명, 문화혁명을 의미하는 '3대혁명소조운동'에 청년들이 뛰어든 사례가 있다. 또한 청년동맹에 가입하기 전, 그러니까 만 14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조선소년단을 산하에 두고 지도도 이들이 맡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청소년을 대상으로한 강제노동이다. 1960년대부터 김정일이 권력의 축으로 등장하면서 청년동맹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었는데, 문제는 이들이 어렵고 힘든 건설일에까지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청년동맹은 1970년대 중반부터 속도전 청년돌격대 등의 형태로 지하철 공사 등 건설 현장에 동원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이러한 강제노역은 실시되고 있다. 평양의 각종 건축물 공사에 대학생까지 동원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들이 동원되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이들이 건설에는 무지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부실시공이 판을 치고 있으며, 또 건설 과정에서 안전 조치가 미흡하고 일이 미숙하여 사망 사고도 일어난다고 한다.
이들이 동원된 도로나 시설, 철도 노선과 역에는 대부분 '청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평양-남포 청년영웅도로, 라선청년1, 2호 발전소,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 청진청년역, 혜산청년역, 신의주청년역, 혜산만포청년선, 백두산청년선, 금강산청년선 등 무수히 많다.
그리고 청년동맹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바로 예비 당원 양성 및 예비 간부 양성이 있다. 1946년 조선민주청년동맹 발족 직후인 동년 11월 5일에 중앙청년간부학교를 개설하여 초급 간부를 양성하기 시작했으며, 후에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중앙학교,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대학을 거쳐 1974년 11월 1일 금성정치대학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 다만 여성의 경우 결혼하면 제외와 동시, 조선사회주의녀성동맹에 속하게 된다.[2] 특히 이 시기에 제13회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려 당시 청년동맹 위원장이었던 최룡해가 개회사와 폐회사를 하기도 했다.[3]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구칭인 '금성정치군사대학'과는 다르다.[4] '트드'로 읽는다.[5] 1991년에는 이 8월 28일을 '청년절'로 제정하면서 이 ㅌ.ㄷ를 띄우기 시작했다.[6] 1996년 개칭 이후 제1비서로 변경.[7]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지낸 리용철과는 동명이인.[8] 위원장으로 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