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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크 카라지치


파일:Вук_Стефановић_Караџић.1816.jpg

Вук Стефановић Караџић / Vuk Stefanović Karadžić
1787년 11월 7일 ~ 1864년 2월 7일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

1. 개요

„Пиши као што говориш, а читај као што је написано / Piši kao što govoriš, a čitaj kao što je napisano“.
('말하는 대로 쓰고, 쓰이는 대로 읽어라.')

부크 스테파노비치 카라지치는 19세기 민족주의 시대, 발칸 전역에 흩어져 있던 세르비아 민족의 단결을 위해 근대 언어의 발굴과 문어 및 정서법 개발에 힘쓴 언어학자이다.

'세르비아어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2. 생애

부크 카라지치는 18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 치하 세르비아 동부 로즈니차(Лозница / Loznica) 근교의 트르시치(Тршић / Tršić)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서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려야만 했었다. 인근 트로노샤 정교 사원[1]에서 세르비아어 교육을 받았고, 이후 세르비아의 최초 중등학교인 스렘스키카를로브치(Сремски Карловци / Sremski Karlovci)의 중학교 입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는 19세 청년이였기에 중학교에 들어가기에는 나이가 많아 입학에 실패하였다.

하지만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계속 이어졌고, 마침내 베오그라드에서 중등 과정을 마칠 수 있게 된다. 이후 부다페스트와 노비사드에서 의학 관련 분야의 일을 하기도 하다가 오스트리아 에서 슬로베니아인 언어학자인 예르네이 코피타르(Jernej Kopitar, 1780년 8월 21일 ~ 1844년 8월 11일)를 만났고, 그와의 만남으로 세르비아어의 발전과 남슬라브 민족 간의 공통어 확대에 깊은 관심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1818년에 남슬라브인들이 써왔던 키릴 문자에서 세르비아어에 불필요한 문자를 빼고 새로이 일부 문자를 창안하여 세르비아어 키릴 문자 정서법을 확립했다.

그러나 그의 언어 체계 수립 노력은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에 의존해야만 했던 세르비아의 영주 밀로시 오브레노비치에 의해 그리 환영 받지 못한 채, 오히려 발칸에서 터키의 지배권을 약화시키는 잠재적 위험 요소로 취급받아야만 했다. 이에 반해, 당시 범슬라브주의 확산과 발칸 반도 진출에 높은 관심을 지녔던 러시아 제국은 부크 카라지치의 주장들을 높이 평가했고 그에게 연금 등 다양한 지원들을 내림과 동시에 그의 주장을 동유럽 슬라브인들에게 확대하여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근대 표준어 개발이라는 높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르비아 민족의 운명을 주변 외세에 의존해야만 했던 국내 사정에 따라, 부크 카라지치의 활동 반경은 제한되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1864년 오스트리아 제국 에서 사망하고 묻히게 된다. 후에 그의 유골은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1897년에 베오그라드 국립 대학교에 묻히게 된다. 학교의 설립자이자 세르비아 공국 초기 최대 계몽주의 문학가이며 철학가, 언어학자로 공국의 최초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던 도시테이 오브라도비치(Доситеј Обрадовић / Dositej Obradović, 1739년 2월 17일 ~ 1811년 4월 7일)의 묘 옆에 안치되었다.

3. 평가

오늘날 부크 카라지치는 근대 세르비아어 개혁은 물론, 농민 문화를 대변할 수 있는 민속 문학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는 특히, 세르비아 농민들의 민요, 이야기, 속담 등이 담긴 모음집을 통하여 농민들의 구전 문학을 보다 현대적으로 발전시켰으며, 농민들의 어려운 현실을 외면하고 미화하기 보다는 이를 세르비아 농민 문화의 현실적 주요 요소들 중 하나로 인식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외에도 어린 시절 들었거나 기억에 남아 있던 약 100여 편의 서정시와 서사시가 포함된 여러 권의 세르비아 민속 산문시집과 함께 최초의 세르비아어 사전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4. 기타

부크 카라지치와 도시테이 오브라도비치에 대한 세르비아인들의 애정은 대단해서 1949년 베오그라드에 부크와 도시테이 박물관을 설립했다. 해당 박물관에서 그의 업적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이던 1980년대에 부크 카라지치의 일대기를 다룬 총 16부작의 사극 드라마도 제작되어 방영되었을 정도이다. 위키백과(세르비아어). 유튜브에서도 검색하면 볼 수 있는데, 문제는 동유럽의 구 공산권 나라들에서 만든 예전 영화나 드라마 작품들이 늘 그렇듯이 화질이 굉장히 안 좋다.[2]

세르비아 10디나르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있다. 과거 유고슬라비아 디나르 지폐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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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17년에 건립했던 나름 오래된 전통을 가진 사원이였다.[2] 사실 동유럽권 국가들의 1960, 70, 80년대때 나온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구작들은 패트와 매트 같은 일부 인기작들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보존 상태가 심각할 정도로 안 좋은 작품들이 많다. 아예 HD, UHD 디지털 방송 기술이 국제적 표준으로 완전히 자리잡혔음에도 기술이나 자금 부족으로 HD 리마스터링을 못하거나, 원본 필름이나 녹화분 비디오가 분실 또는 열화 훼손이 심해서 HD 리마스터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작품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기술력 좋은 서방국가들한테 리마스터링 맡기면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