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95년 |
조선 경상도 웅천현 대장동 | |
사망 | 1966년 (향년 72세) |
대한민국 부산직할시 | |
학력 | 웅천 개통학교/계광학교(고등과/졸업) 경성청년학교(중학과/졸업) 주시경의 한글학교(국어학 수강) |
직업 | 교육자,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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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2. 생애
웅천 개통학교와 계광학교 고등과를 수료하고 상경하여 경성청년학교 중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주시경의 한글학교에서 국어학을 연구하여 19세때 계광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성에서 등사기를 구입하여 승복차림으로 혹은 노동자 차림으로 위장을 하고 김해를 거쳐 굴암산을 넘어와 죽벽 마을에서 주기용, 허전 등과 같이 태극기를 만들며 웅동에서 기미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웅동의 기미만세 시위에 이어 조직적 투쟁을 하려고 구속을 피했으나 건강이 나빠 활동력을 잃고 한동안 유유전전 하였다.
1931년 봄 김해군 진영읍에서 일본인 박간(迫間)이 경영하는 농장에서 소작료 인상 문제로 쟁의가 발생하자 이에 소작 쟁의 투쟁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1934년 진영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일본인 지주와의 소작 쟁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농민 조합을 설립하는 등의 농민 운동에도 힘썼다.
광복을 맞이하여 진영에서 한글강습소를 열고 건국준비위원회 임원, 미소공동위원회에 경남 단체 대표로 참가하는 등 활동하였으나 좌경인사로 오해를 받아 사회 활동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이주하여 힘든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