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00:35:02

박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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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자
朴信子
출생 1941년 12월 26일 ([age(1941-12-26)]세)
경기도 경성부 종로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서울수송초등학교 - 숙명여중 - 숙명여고 - 이화여대
가족 관계 조카 박정은
신체 176cm
직업 농구 선수 (센터 / 은퇴)
농구 감독
소속 구단 상업은행 (1960~1967)
지도자 신용보증기금 여자 농구단 감독 (1983~1986)
수상 내역 1967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은메달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후4. 기타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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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농구 선수 출신 감독. 한마디로 한국 여자 농구의 전설.

한국 여자 농구계의 대모(代母) 윤덕주부터 시작해 박찬숙을 거쳐 정은순으로 이어지는 한국 여자 농구계의 최고 센터 계보에 있는 선수. 현역 시절 별명이 한국 농구의 여왕이었고 이 수식어는 은퇴한 지 한참을 지난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비유하자면 한국 여자 골프에서 박세리, 한국 탁구에서 현정화가 차지하는 것과 비슷한 위상을 갖고 있다.

신장은 당시 기준으로 대한민국 대표팀 중에서는 제일 컸지만 국제적으로는 결코 센터로서 크다고 할 수 없는 176cm[1]이었지만 그럼에도 센터로서의 기본기에 충실했고 리바운드 이후 패스로 팀 전체를 속공으로 이끄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nba mania 회원(닉네임 Damon Bailey)의 글. 당시 여자 농구계의 상황과 박신자의 업적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명문이다.

2. 선수 경력

숙명여자고등학교 시절부터 한국 여자 농구 최고의 인재 소리를 듣다가 現 아산 우리은행 우리WON의 전신이 되는 상업은행 농구팀에 입단, 당시 여자농구 최강이던 한국은행을 제치고 상업은행 최강 시대를 열었다. 그 중심에 있던 박신자는 여자농구를 대표하는 스타로 엄청난 각광을 받았다.

1964년 세계 선수권에는 국가대표팀이 아니라 상업은행 팀이 출전했는데,[2] 대회에 전체 성적은 8위에 그쳤음에도 박신자는 대회 베스트 5에 뽑힐 정도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박신자는 1965년 무렵 은퇴를 고려하기도 했지만 은퇴를 번복하고 선수 생활을 계속했고,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FIBA 세계선수권대회에도 한국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 최소 190cm대인 외국팀의 센터들과 대결하며 한국팀을 준우승으로 이끄는 전설을 만든다. 준우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회 MVP는 박신자였다. 이 세계대회 준우승은 당시까지 한국 구기 스포츠가 세계 대회에서 거둔 성적 중 가장 높은 성적. 우승이 아니었음에도 대회가 끝나고 귀국하자 20km에 걸쳐 카퍼레이드가 펼쳐지고 환영대회에 3만 인파가 몰려들었다.

1967년 세계 대회를 끝으로 박신자는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경기에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7000명의 관중이 몰렸다. 박신자가 있는 동안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은 여자농구였으나 박신자가 은퇴한 이후 여자 농구의 인기는 급락했다 한다. 그야말로 '여자농구 = 박신자'였던 셈.

3. 은퇴 후

1980년대 초에 신용보증기금 여자 농구단의 감독으로 농구계에 돌아오나 이때는 고생을 꽤나 했다. 감독이 같은 여자라고 선수들이 감독을 따르지 않는 것도 문제였고 심판들도 여자 감독이라고 꽤나 무시를 했다고 하니. 3년간 감독으로 활동한 후 1988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일했다. 그 밖에 1979년 FIBA 세계선수권 대회의 행정 위원으로, 대한농구협회아시아농구연맹(ABC)의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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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한국여자농구연맹에서 2군 리그 컵 대회로 그녀의 이름을 건 박신자컵 서머리그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우승 구단과 MVP의 트로피는 과거 여자 농구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은 현재 그녀의 모습을 딴 피규어를 수여한다. 여느 트로피에 비해 독특한 모양인 것도 좋은 평을 받고 있다.

유튜브에 올라온 근황 인터뷰.

1999년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테네시 녹스빌에 있는 여자 농구 명예의 전당에 최초의 25인으로 헌액됐다.

2020년 아시아 국적 최초로 선수 자격으로 FIB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2023년 8월 26일부터 9월 3일까지 열린 제9회 박신자컵을 관전하기 위해 오랜만에 귀국해 경기를 지켜보고 기자 화견도 가졌다.

4. 기타

  • 주한미군 문관과 결혼해서 은퇴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막내 아들이 살고 있는 하와이에서 생활하고 있다.

5. 관련 문서



[1] 하지만 일반인, 그것도 1940년대생 여성치고는 엄청나게 키가 큰 편이다. 또한, 당시 대한민국 성인 남성 평균신장이 163~165cm였다.[2] 당시 한국의 경제 사정상 대표팀 파견은 엄두를 낼 수 없던 시기였다. 우연히 상업은행 팀이 국가 이미지 홍보 차원에서(5.16 군사정변 직후다.) 남미 친선 시합에 갔다가 페루에서 열린 대회에 그대로 참가하게 되었다. 원래 나오기로 했던 팀이 못 오면서 대타로 나갔다고.[3] 박정은삼성생명에서 은퇴하면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