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훈장 모란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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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전 朴來栓 | Park Rae Je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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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박래전(朴來佺) |
출생 | 1963년 4월 17일 (음력) |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상안리 (現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 |
사망 | 1988년 6월 6일 오후 12시 23분경 (향년 25세)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7가 한림대학교한강성심병원 | |
가족 | 아버지, 어머니, 형 박래군[1], 조카 박성아[2] |
학력 | 서신중학교 (졸업) 송산고등학교 (졸업) 숭실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 82 / 제적) |
1. 개요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가.가족으로는 형 박래군[3], 조카 박성아가 있다.[4]
2. 일생
2.1. 시인을 꿈꾸던 청년
1963년 4월 17일(음력) 경기도 화성군(現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여 도에서 실시하는 자유교양경진대회에 대표로 뽑히기도 했으며, 교내 독후감 대회에서 빈번히 수상했다.1982년 숭실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거기서 그는 문학회 활동을 하며 시를 쓰곤 했다. 그는 자신의 시가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를 원했다. '동화', '반도의 노래', '바람일 수는 없다' 등의 시를 썼다.
동화(冬花) - 박래전
당신들이 제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당신들의 코끝이나 간지르는 가을꽃일 수 없습니다.
제가 돌아오지 못한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풍성한 가을에도 뜨거운 여름에도 따사로운 봄에도 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떠나지 못하는 건, 그래도 꽃을 피워야 하는 건, 내 발의 사슬 때문이지요.
겨울꽃이 되어 버린 지금, 피기도 전에 시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향기를 위해, 내 이름은 동화(冬花)라 합니다.
세찬 눈보라만이 몰아치는 당신들의 나라에서 그래도 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꽃입니다.
당신들이 제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당신들의 코끝이나 간지르는 가을꽃일 수 없습니다.
제가 돌아오지 못한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풍성한 가을에도 뜨거운 여름에도 따사로운 봄에도 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떠나지 못하는 건, 그래도 꽃을 피워야 하는 건, 내 발의 사슬 때문이지요.
겨울꽃이 되어 버린 지금, 피기도 전에 시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향기를 위해, 내 이름은 동화(冬花)라 합니다.
세찬 눈보라만이 몰아치는 당신들의 나라에서 그래도 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꽃입니다.
2.2. 학생운동
대학에 입학한 후 어두운 현실에서 시만 쓰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해 '우리말사랑회'라는 학생운동 조직에 가입하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5]그러나 겁이 많고 소심한 성격이었던 그에게 민주화운동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처음 시위에 나섰을 때는 두려워서 도망치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사복경찰에 붙잡힌 박래전은 경찰의 협박을 이겨내지 못했고, 자신으로 인해 선배들이 수배되자 죄책감을 느껴 고향으로 내려간 후 대학에서도 제적되고 군에 입대한다.
전역 후에도 계속 고향에 머무르다가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상경해 학생운동에 참여했으며, 6월 항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87년 12월 민중후보선거대책위원회 선전국장, 1988년 3월 민중정당결성학생추진위원회 선전국장을 지내고 제20대 숭실대학교 인문대학 학생회장에 선출되었다. 그 후 수배 상태로 숭실대 학생회관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2.3. 민주를 외치며 타오르다
형 박래군 씨가 당시 상황에 대해 회고한 글1988년 6월 4일 오후 4시경, 숭실대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고 외친 후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유서에는 '학살원흉 즉각 처단'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7가 한림대학교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분신으로 인해 전신 80%에 3도 화상을 입은 상태였고, 이틀 후인 6월 6일 12시 23분 숨졌다.[6] 장례는 민족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운구에는 대학생 4,000여 명이 함께했다.
박래전의 죽음 이후 대학생 2,500여 명이 숭실대학교 도서관 계단에서 ‘故 박래전 열사 분신 투쟁 계승 및 학살 원흉 처단 실천대회’를 열고 “광주는 살아있다. 끝까지 투쟁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장례 기간에는 도서관 계단에서 ‘민중해방열사 박래전 분신투쟁 계승 서울지역 40만 청년학도 결의대회’를 열고 가두행진을 진행하기도 했다.
사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고, 1989년 3월 23일 박래전열사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다.
2021년 국민훈장 모란장에 추서됐다.